"신자유주의 인신지배 시대에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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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9월 02일 10: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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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란 궁극적으로 보면 폭력 그 자체입니다. 대다수 피고용자들이 본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무조건 고용을 갈구하고, 해고를 두려워하고, 고용관계에 매달려야 하는 이유는 결국 무엇입니까?

자본주의는 폭력 그 자체

한국의 경우에는 고(故) 최고은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촤악의 경우에는 실직자, 해고자 등이 아사까지 당할 수 있기에 그러는 것이고, 그나마 굶어죽는 빈민이 없는 유럽 같은 경우에는 내구재 구입이나 휴가 여행 등을 할 수 없는 이등시민인 실업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즉 체제로부터 경제적인 타격을 입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실업자들이 굶어죽을 수도 있는 한국이나 일본에서 볼 수 있는 생명 박탈이든 유럽 복지국가식의 ‘풍족한 삶’의 박탈이든 우리로 하여금 ‘임금 노예'(wage slave)으로서의 삶을 계속 하게끔 하는 것은 어떤 ‘박탈’에 대한 공포입니다. 공포에 의거하는 체제는 폭력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그 폭력의 유형에 있어서는 반(半)봉건적 식민지 자본주의에서 준(準)파쇼 정권 하에서 준핵심부 자본주의 야수로 압축 성장한 대한민국과, 핵심부 국가들은 커다란 차이를 보입니다. 핵심부 자본주의의 폭력성은 – 적어도 그 사회 안에서는 – 대개의 경우에는 비(非)가시화돼 있고 깊이 내면화돼 있는데다가 ‘합리적 절차’와 ‘평등한 시민’ 간의 친절로 잘 포장돼 있습니다.

예컨대 미국의 ‘가장 터프한 사업가’로 악명이 높은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를 보세요. 그에 대한 일화들을 보면 직원(임원까지 포함해서)들을 ‘즉석 해고’한 이야기나 자기 앞에서 감히 칠판에다가 어떤 설명의 글을 쓰려는 부하 직원에게 분노를 터뜨렸다는 일화 등이 유명합니다.

대체로 아집이 강하고 자신의 권력을 무자비하게 과시하기를 매우 좋아하는 타입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컨대 스티브 잡스가 그 회사 빌딩 앞에서 일인시위하는 해고자에게 ‘매값 폭행’을 감행한다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스티브 잡스 

스티브 잡스와 최철원의 차이

맞아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잡스와 최철원 사이의 차이라면, 잡스가 제도적 장치(경영자의 무조건적 해고권 등)를 이용(내지 악용)하여 폭력적인 권력 행사 정도만 할 수 있는 반면, 최철원이 그 어떤 제도적인 ‘매개체’도 없이 ‘아랫 사람’의 신체를 무조건 폭행해도 되는 것으로, 즉 자신이 적어도 한 순간 동안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사유한다는 것입니다.

즉, 잡스의 폭력성이 어느 정도 제도화돼 있다면 최철원의 폭력성이 직접적이며 물리적입니다. 부하(또한 과거의 부하, 또한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의 신체를 돈주고 소유물처럼 폭력적으로 이용해도 된다는 그의 생각을, 그에게 집행유예형을 내린 법원, 즉 대한민국의 공권력까지 뒷받침해주기에 무슨 거리낌이 있겠습니까?

잡스의 요구사항(효율성의 최대화, 지시 숙달 등등)을 내면화하면 그가 휘두르는 제도적 폭력의 무기, 즉 해고를 면할 수 있겠지만, 최철원들의 무리들이 휘두르는 물리적 폭력과 폭언의 무기는 아무리 몸을 낮추어 많이 굽실거려도 피하기가 매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국내에서 대학원이나 대기업에 다녀본 사람이라면 잘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아랫사람의 몸과 마음을 위사람이 언제나 술 동무로 이용하거나 손찌검이나 폭언으로 짓밟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아랫사람의 시간과 노동을 윗사람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한국형 인신지배는 어떤 면에서는 참 역설적입니다.

일면으로는 이는 음지에서 이루어지는, 비공식적 행위의 영역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기에 해당 부문의 종사자가 아니면 잘 모를 수도 있는 것이고, 잘 안 알려져 있는 만큼 사회의 공식적인(서구적 자유주의를 표준 준거를 삼는) 윤리 규정과의 충돌을 피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술 강권하는 사회와 외국인 학생

예컨대 절대 다수의 남성들이 군대에 갔다와야 하기에 ‘원산폭격’ 정도면 대한민국 선남선녀의 일반 상식에 속하지만, 고(故) 장자연이 죽으면서 ’31명의 악마’ 명단을 남기지 않았다면 연예계와 무관한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연예계 입문자가 통과해야 할 ‘통과 의례’, 즉 소속사 대표의 폭력과 이 사회 ‘오야붕’들에게의 술시중/성상납 등에 대해서 과연 제대로 알 수 있었을까요?

물론 음지에서 이루어지는 인신지배의 실체가 갑자기 노출되더라도 이는 지배자에게 하등의 불편함도 안겨주지 않을 것입니다. 아닌 것 같으면 아나운서가 되려는 여학생에게 "모든 것을 바치라"고 핏대를 올려도 끝내 의원직을 상실하지 않는 강용석 의원의 경우를 잘 보십시오.

뭐, 장자연을 괴롭혀 결국 간접 살해한 31명의 악마들 중에서는 한 사람이라도 사법처리됐습니까? 이 땅을 인신지배를 하고 있는 자들이 다스리고 있기에 무엇이 어떻게 폭로돼도 그들은 무사할 것입니다. 일면으로는 저들의 인신지배 관행들은 비공식 영역에 속하지만, 또 일면으로는 이 나라의 ‘관습법’, 즉 성문법보다 어쩌면 더 엄격하게 지켜지는 불문율 수준입니다.

그래서 예컨대 한국 대학의 대학원에 입학하려는 외국학생에게 지도교수가 (강)권하는 술을 다 먹을 수 있는 만큼 주량을 키우라는 조언은, 한국어를 배우라는 조언보다 더 절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어 소통은 덜 돼도 상관없지만, 위사람이 아랫사람의 위(胃)까지도 지배하는 미풍양속(?)을 어기면 아주 큰 문제입니다.

과거의 군주들이 ‘삼대(三代: 요, 순, 유임금 시대의 정치)의 치(治)’나 ‘백성교화’를 외쳤듯이 요즘 주상이 ‘선진화’를 외치면서 돌아다니지만, 저들의 그 어떤 구호와도 무관하게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시대에 한국형 인신지배는 구미형 ‘제도화된, 비(非)노골적 폭력’으로 탈바꿈되지 않을 것입니다.

혁명적 투쟁이 필요한 이유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신자유주의에 의해서 일자리 등이 불안화될수록 피지배자들의 안정추구 심리가 강화되는 것이고, 또 지배자들이 그 심리를 이(악)용해서 인신지배 강화를 통한 사적인 및 공적인 착취 강화를 추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대학교에서의 정규직으로서의 취직이 아직도 흔히 가능했던, 거기에다가 운동권까지 아직도 힘이 있었던 1990년대 초반만 해도 국내 대학 대학원에서는 지도교수의 성추행부터 대필 강요까지 아주 성행했습니다.

운동권이 거의 죽고 정규직 고용도 바늘구멍처럼 된 지금 같으면? 도미유학파의 지배구조 속에서 국내 학위 그 자체는 의미를 많이 잃었지만, 고용을 갈구하는 이들의 대학실력자에게의 아부의 필요성은 훨씬 더 강화된 셈입니다.

불안화된 세계에서는 아부, 인신지배에의 복속에 의한 개인적 추종관계 형성 등은 그나마 미래에 대한 어떤 ‘약속’으로 느껴집니다. 신자유주의로 망해가는 사회는 우리에게 더이상 아무것도 공적으로 약속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인신지배 관행을 퇴치시키는 방법은? 우리는 좀 과감해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반값’ 등록금만도 아니고 민주화된, 전근대적인 찌꺼기가 없는 무상 대학 교육까지 강력하게 요구하는 학생운동부터 부활돼야 되고, 대필 요구 등을 고발할 수 있는 강력한 조교, 강사 노조가 필요합니다.

혁명적 투쟁이 아니면 ‘매값’과 "아나운서 되려면 다 바쳐라" 등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과거의 이 유령들을, 우리가 장사지내 우리 손으로 무덤으로 보내야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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