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폭도라고? 봉기의 음악을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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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8월 12일 08:2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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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억압자와 억압자 사이의 중요한 투쟁 중의 하나는 바로 언어를 둘러싼 투쟁입니다. 특정 기표들이 특정 이데올로기와 이미 연결돼 있는 특정 담론을 소환할 힘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일본 식민주의자들에게는 3.1운동은 ‘소요’이었고, 전두환/노태우 일당에게는 5.18은 ‘폭동’이었습니다.

사회경제적 불만의 폭발

이러한 용어(기표)들을 쓰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명분없는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당연하게도 제 정신 있는 사람에게는 3.1운동은 ‘소요’가 아니고, 5.18은 ‘폭동’은 아닙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한겨레>와 같은 자유주의 좌파 언론들마저도 지금 영국의 런던 등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빈민들의 반란/봉기를 고집스럽게도 계속 ‘폭동’이라고 부르고, ‘난동’, ‘폭도’와 같은 용어들을 사용합니다.

   
  ▲"그들을 폭도로 불러선 안 된다."

물론 표피적으로 본다면 정당한 명분에 나름대로 충실했던 3.1운동이나 5.18운동과 달리 지금 런던에서 가게 물건의 약탈 등 우리에게 쉽게 ‘반사회적 행동’으로 비추어질 수 있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에 이와 같은 호명법은 일면 타당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뉘앙스를 잘 봐야 합니다.

3.1운동이나 5.18운동은, 어디까지나 부당한 정치적 권력의 퇴진을 요구하는 정치적 운동이었던 반면, 지금 영국에서 일어나는 빈민들의 봉기는 ‘정치’ 영역과 직접적으로 무관한, 사회-경제적 영역에서의 불만의 누적으로 인해서 일어난 사회적 운동이고, 경제적 갈등을 축으로 하는 운동입니다.

이러한 성격이 강한 운동인 이상, 중산층의 사유재산에 대한 도전(약탈)은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차이는 있다 해도 피지배자들이 사회적 불의에 맞선다는 의미에서는 이번 영국의 빈민 반란은 아주 기본적으로는 한국의 ‘전설적인’ 여러 민중 운동들과 맥을 같이 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잘 이해하고 ‘폭동’과 같은, 적들이 쓰는 용어들을 멀리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흥 빈곤층의 저항

갈등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신자유주의 도입과 유럽 사회 소외계층들의 ‘제3세계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빈민층의 출현입니다. 전통적 빈민층인 저임금 노동자계층과 달리, 이들 ‘신흥 빈민층’은 아예 공식 부문에 진입조차 못합니다.

저임금이든 최저임금이든 아예 ‘직장’ 그 자체를 가질 수가 없다는 것이죠. 반란의 진원지인 토트넘 지역 같으면 어떤 직업이든간에 구인공고가 나타나기만 하면 평균 약 55대 1의 경쟁률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는 신자유주의가 망가뜨린 사회에서 공식 부문으로의 진입장벽이 높습니다.

보다 ‘나은’ 동네로 이사 가자면 런던 중산계층 거주지들의 살인적으로 높은 집세를 감당해야 하고, 고학력 직장을 잡자면 일단 연간 9천 파운드까지 올라갈 수 있는 대학 등록금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체 인구 중에서 최고 부자들의 10%가 가장 가난한 사람 10%보다 약 273배나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그 불평등의 정도로는 이미 제3세계의 수도들을 다 능가한 런던이라는 도시에서는, 저학력 빈민층의 젊은 실업자에게는 정말 갈 데가 아주 없습니다.

거기에다가 그가 백인이 아니라면 길거리를 걸어다니는 일조차 어려워집니다. 경찰의 불심 검문에 계속 걸려 모욕적인 대접을 계속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란이 일어난 지역 같으면 흑인이 백인보다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릴 확률은 26배나 더 높답니다.

   
  ▲흑인이 경찰 불심검문에 걸릴 확률은 백인의 26배. 

부자들이 약탈한 것을 ‘공유’하는 것

불평등과 폭력, 미래와 희망의 절대적 부재를 늘 직면해야 하는 실업자, 공식 부문 진출을 못해 마약거래나 미등록 저임금 노동(계약 없는 아르바이트), 갱의 싸움으로 시간 보내야 하는 젊은 ‘유색인종’은 결국 그 누적된 분노를 참지 못해 각목을 들고 부자들의 재산을 ‘약탈’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저 당연한 일은 아니겠습니까? 반란 가담자들이 스스로도 이야기하듯이, 그들이 부자들이 여태까지 약탈해온 재물을 그저 ‘공유’하고 싶어할 뿐입니다.

이번 런던 등지의 빈민 봉기는, 신자유주의의 구조적 모순들을 그 직접적 원인으로 합니다. 극소수 부유층의 재산 증식을 최대화하도록 하는 체제는, 상당수 빈민층의 고통을 동시에 최대화하는 것입니다. 왜 빈민층이 이 구조적인 약탈을 가만히 앉아서 당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에게 구조적 모순에 대한 저항의 권리는 분명히 있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들의 산발적이고 국지적인, 비조직적인 저항을 하나로 연결시켜 조직적인 혁명운동으로 이끌 만한 좌파세력이 영국에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사회주의노동당 등 ‘혁명’을 내세우는 일부 정당들은 있긴 하지만, 주로 중산계층 출신의 그 지도자나 활동가들은 지금 반란자들을 이끌 만한 역량을 보유하지 못해 아쉬울 뿐입니다. 조직 노동운동이 이 반란과 손을 잡아 체제 전체를 흔들 수 있었다면 지금 이 순간에 우리는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억압을 참지 못해 일어서게 된 빈민들은 잔혹할 때가 있고, 무의미하다 싶은 폭력을 행사할 때도 있습니다. 그들을 억눌러온 체제가 극도로 잔혹한 만큼, 그들의 행동에는 그러한 요소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죠. 그러한 의미에서는 그들이 가해자로 보인다 해도 실제로는 피해자들이고, 그들의 행동은 총체적으로 볼 때에 정당할 뿐입니다.

총성 속에도 음악은 있다

억압에 대한 저항은, 그 형태는 어떻든간에 근원적으로는 늘 정당합니다. 1918년에, 러시아 혁명의 "잔혹성"을 비난하는 일부 친우들에게 답하면서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 알렉산드르 불르크가 "혁명의 음악을 귀 담아 들으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총성이라 해도, 인류 해방을 위해 울리는 총성이라면 그 속에 음악이 들리는 것이고, (혁명가도 아닌 자유주의자인) 블로크가 위대한 시인인 이상 그걸 느꼈습니다. 직감했죠. 저는 지금 똑같은 말을 하고 싶습니다. 제발 이 반란의 화재나는 소리, 창문 깨지는 소리 속에서 우리 시대의 아픔을 전해주는 음악을 들어주시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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