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공포, 사랑 & 오슬로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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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8월 05일 09:0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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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개 극한 상황에 처한 사람의 경우에는 그가 취하는 극단적 행위를 이해해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그 행위에 명분이라도 있으면 ‘역지사지’를 해서 "방법론적으로는 좋지 않았지만 이해된다."는 방식으로 판단합니다.

오슬로 학살 깊이 들여보기

혹시 최서해 (1901~1932)의 소설 <홍염> (1927)을 기억하세요? 지주의 횡포로 절망의 상태에 빠진 조선 빈농은, 그 소설에서 끝내 자신의 원수인 중국인 지주 은가(殷哥)를 도끼로 쳐죽이고 그 집에 방화를 하고, 이와 같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지주가 빼앗은 자신의 딸을 구출하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최서해와 아직도 친했던 카프 계열의 무산계급 작가들이 좋아하기에는 너무나 비조적적이고 비연대적이고 호소력이 약한, 바르지 못한 해결 방법이었지만, 좌파 작가든 일반 독자든 일단 커다란 억울함을 당한 사람의 이와 같은 행동을 꼭 좋아하지 않아도 적어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1990년대의 러시아에서는 임금을 악질적으로 체불하여 노동자들을 계획적으로 굶겼던 사용주나 공장 지배인들을 참지 못해 끝내 죽였던 일부 노동자들을 그 당시 사회가 어느 정도 이해했듯이 말입니다. 대부분이 이렇게 저렇게 억울함을 당해본 사회에서는 억울함을 참지 못한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는 관대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이번의 2011년 7월 22일 오슬로 학살의 경우에는 바로 이 요소는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 범인 브레이비크는 외교관의 여유있는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 여유있게 회사 직원 내지 중소기업인의 삶을 산 데다가 학교에서 한 번 따돌림을 당한 일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이민자들에 대한 증오를 내뿜고 있지만, 사실 그가 살았던 오슬로의 부유한 서부 지역에서는 가난한 이민자들의 자손들을 만날 가능성도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 물질적 풍요 속에서 자라온, 가시적으로는 그 어떤 억울함도 당한 것 같지 않은 복지국가의 시민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미증유의 살인마가 된 것이었을까요?

복지국가 자손들이 살인하는 이유

신념 때문이라고요? 신념이야 당연히 중요한 기폭제의 역할을 했지만, 신념만으로는 불가피한 방어가 아닌 상황에서는 인간으로서 가장 어려운 행동, 즉 동류를 죽이는 행동을 하기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념적 동기 이외에는 그 어떤 심성적 배경이 있어야 이와 같은 행동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가?"라는 질문을, 브레이비크에게만 던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약 1년 전에 아프간 침략에 참여하고 있는 노르웨이 군인의 한 무리가 "전장에서 인간을 죽이는 그 느낌은 어떠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섹스보다 훨씬 더 아찔하고 좋다."고 자신만만하게 응답해 노르웨이에서 상당한 충격을 일으킨 적은 있었습니다(http://www.vg.no/nyheter/innenriks/artikkel.php?artid=10036779).

그들에 의하면 방아쇠를 당기고 쓰러진 ‘탈레반’의 시체를 봤을 때의 느낌은 섹스하면서 느끼는 오르가슴 그 이상이었답니다. 그들의 이런 ‘살인적인 야담패설’이 문제가 되자 그 군인들의 우두머리, 즉 노르웨이 특무부대의 대장은 "전장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우리가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못박고 자기 자신도 폭격 등을 하면서 사람을 많이 죽였다고 태연하게 고백(?)했습니다.

복지국가의 이 자손들은, 억울함을 당해 극도로 흥분된 상태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고, 반대로 ‘유쾌한’ 흥분을 일으키기 위해서 ‘게임’ 삼아, 재미로 사람을 죽인다고 도도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아프간이 아닌 오슬로 시내에서 이와 같은 짓을 저질렀다면 범죄인이 됐을 것이지만, ‘비인간’으로 취급되는 ‘탈레반’을 죽였기에 영웅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살고 나름대로의 재분배 메카니즘을 통해 그 나름의 사회정의까지 – 적어도 내부에서는 – 어느 정도 실현하는 사회에서는,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살인마들이 만들어집니까? 독자 여러분, 이해 안되시지요? 하기야 "섹스보다 살인은 훨씬 좋다, 아찔하다"는 류의 명언(?)을, 유교적 예의염치를 아직도 완전히 망각하지 않은 사회에서 하기는 조금 더 어려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본주의, 살인마 대량생산 체제

살인마들을 대량생산하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 사회 그 자체입니다. 비록 ‘복지’라는 완충 장치에 의해서 완화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생산시키는 기초 심성은 바로 공포입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공포 말입니다.

만인은 만인의 경쟁자이기 때문이죠. 경쟁에서 지기만 하면 당장 짓밟히고 마는 것인데, 이를 잘 아는 자본주의 세계 시민들은 낙오에 대한 무서운 공포를 지니면서 삽니다. 이미 어릴 때부터 말입니다. 이미 초등 4학년이 된 제 맏아들이 휴대폰과 개인 컴퓨터를 사달라고 계속 조르는 이유를 따져보면, "급우들이 다 있는데 나한테만 없다.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직 ‘웃음거리’가 된 것도 아니지만, 미리미리 경계심을 내는 것이죠. ‘모두들’에게 있는 완구를 갖지 못해 ‘웃음거리’가 된 아동, 즉 낙오자들을 이미 봤기 때문입니다.

청년 브레이비크도 그랬지만, 왜 돈이 있는 가정 출신의 노르웨이 고교생 다수가 돈을 내면서 운동을 하거나 헬스에 다닐까요? ‘몸을 만들’ 여유가 없는 저임금 노동자 계층 출신으로 오해 받지 않기 위해서, 즉 동류 사이에서 소외당할까 봐서 그렇다고도 볼 여지는 많습니다(물론 다른 동기도 있겠지만요).

왜 특히 브레이비크와 같은 자영업자들은 많은 경우에는 이민자들에 대해서 가장 배타적일까요? 저임금 노동의 저주를 벗어나기 위한 유일하다 싶은 방편인 거 같아서 자영업을 택하는, 그리고 악착같이 일하고 쉬지 않는 이슬람계통의 이민자들을 ‘무서운 경쟁자’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위협이 북한 위협보다 심각

왜 브레이비크가 푸틴과 같은 파쇼적이다 싶은 리더를 개인적으로 좋아하면서도 러시아를 ‘적국’으로 취급했을까요? 바렌츠해 유전을 놓고 노르웨이와 러시아가 언젠가 쟁탈전을 벌릴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기 때문입니다. 그의 세상에서는 ‘사랑’은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경쟁자와 그들에 대한 공포, 낙오에 대한 공포, 소외에 대한 공포만이 존재했던 모양입니다. 과연 브레이비크의 내면만은 이 정도로 왜곡된 것인가요?

아이가 친구들한테 얻어맞아 집에 오면, "다음에 때리고 오라. 맞고 오지 말라"고 훈계하는 것은 다반사인 대한민국에서는, 적대심과 공포심은 노르웨이보다 많으면 많지 절대 적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아직 가족애와 같은 과거 전통사회 심성의 일부분이 잔존해 그나마 자본주의의 내재적 살인성을 약간 상쇄할 뿐입니다. 집단적 이기주의라는 별로 좋지 않은 방법으로지만 말입니다.

가족마저도 해체되면(그 날은 곧 올 것입니다) 무엇이 남을까요? 만인에 대한 경쟁심라와 공포, 소외감을 빼면. 자본주의 심화의 길로 가고 있는 우리는 지금 바로 지옥으로 행진하고 있을 뿐입니다. 머지 않아 우리에게도 다수의 "명분 없는 살인마"들이 나타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입니다. ‘북한 위협’이다 ‘중국 위협’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야말로 우리를 제일 많이 위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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