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짙은 화장 그녀, 노조에서 길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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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8월 06일 08:0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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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깨어난다는 경칩이 지나고, 헐벗은 채로 한겨울을 지낸 마른 나뭇가지에 푸른 생명이 피어나는 봄이 오고 있다. 이를 시샘이나 하듯 찾아온 꽃샘추위가 몰고 온 바람은 독이 바짝 오른 청량고추처럼 맵다.

       
      ▲왼쪽에서 두번째가 한명희. 

    지나가는 사람들은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어깨를 움츠리고 종종걸음을 한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 듯 싸이의 노래 ‘챔피언’이 경쾌하게 명동 예술극장 앞 광장에서 울려 퍼진다.

    수십 명의 여성들이 보라색 가면을 쓰기도 하고, “해피 우먼스 데이(Happy Women’s Day)"가 찍혀 있는, 손수건처럼 작은 플래카드를 흔들며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추고 있다.

    취재기자들이 경쟁하듯 사진을 찍는다. 지난 3월 8일 여성단체연합에서 103회를 맞은 세계여성의 날을 기념하여 주최한 캠페인겸 거리축제가 명동에서 열렸다.

    종종거리던 수많은 인파들이 발걸음을 멈췄다. 젊은 활동가들은 모인 사람들에게 “세계여성의 날에 대해 아느냐?”고 묻기도 하고, 여성의 날 기념카드를 작성하게 하면서 여성의 날을 알렸다. 또 함께 춤 추기를 권유하기도 하였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젊은 무리들과 함께 한명희가 활짝 웃으며 춤을 추고 있다. 노동자로서 여성운동가로서 40여 년을 열심히 살아온 세월을 모아 춤을 추는 모습이 마치 꿩 무리 속의 학처럼 두드러져 보인다.

    행사가 끝나고 한명희는 오랜만에 만난 후배인 나에게 매콤한 짬뽕국수를 사주고 편안하게 이야기하기 좋은 서울시의회사무실로 나를 안내하였다.

    배고픔 속의 어린 시절

    한명희는 6,25전쟁 직후인 1952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동경유학생 출신이고 엄마는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한 수간호사였지만 전쟁을 겪으면서 이런 것들은 소용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한명희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자 아버지는 헌책방을 운영하였다. 아버지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헌책을 구입해 오면 엄마가 그것들을 팔았다. 헌책방으로 먹고 사는 게 여의치 않자 사업구상을 하던 아버지는 광산개발을 하겠다며 강원도 묵호로 떠났다. 손재주가 좋은 엄마는 구제품에 염색을 하고 헌옷을 수선하였지만 일곱 식구의 입에 풀칠하기도 힘이 들었다.

    엄마는 종종 아버지를 만나러 가면서 집을 비웠다. 남겨진 여섯 명의 형제들은 엄마가 마련해주고 간 곡식이 떨어지면 먹을 것이 없었다. 3남3녀 중 딸로는 맏이였던 한명희는 국제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외사촌언니를 찾아가서 쌀 몇 되를 얻어다가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끼니를 이었다.

    부산에서 도저히 생활이 되지 않아 초등학교 5학년 때 가족이 모두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서울살림살이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북아현동에서 전세를 얻어 운영하던 문방구가 철거를 당했다.

    한명희는 입 하나라도 덜기 위해 열 두 살 되던 해 다니던 초등학교를 그만두고 서울 평화시장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외사촌 언니네 집에서 더부살이로 들어갔다. 어린 조카를 봐주면서 집안의 허드렛일과 공장으로 도시락을 배달해주는 일을 거들어주면서 지냈다.

    고아원으로 보내지다

    사정을 딱하게 여긴 사촌오빠의 소개로 한명희는 동생 두 명과 전라남도 나주에 있는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고아원에서는 밥도 굶지 않았고 중학교도 다닐 수 있었다. 고아원 생활은 내성적이고 온순하던 한명희를 의지가 강하고, 당돌하며, 외향적인 성격으로 바꾸어 놓았다.

    나이 많은 남학생들이 여학생을 괴롭히거나 부당한 행동을 하면 참지 못하고 나서서 해결해 주었다. 이 때 얻은 별명이 ‘불알 없는 깡패’였다.

    또 중학교 3학년 때 고아원 선생님이 한 분이 그만두게 되었는데 평소에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때리고,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면서 느낀 바가 있어 선생님 역할을 자원하였다. 중학교 3학년의 소녀 한명희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고아원 아이들의 먹을 반찬을 만들기 위하여 밭 농사일을 하고, 학교에 다녀온 후 저녁에는 아이들의 숙제를 봐주고 주말에는 20~25명정도의 아이들이 벗어놓은 고리땡(골덴) 바지와 내복, 잠바들을 모아 영산강에서 까만 잿물비누로 비벼서 빨았다. 손가락 끝이 짓무르고 좁쌀 만한 피가 고였다. 일주일 내내 손가락이 아팠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담임선생님은 종종 한명희에게 남으라고 하여 선생님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쉬게 한 후 자전거로 고아원까지 태워다 주기도 하였다. 한명희의 고아원 생활에 대한 사실이 알려져서 졸업 무렵 전남도지사에게 상을 받았고 신문기사로 실리기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엄마는 “집안 형편이 어려우니 살림이나 배워 적당한 데 시집가라.”고 했다. 반발감이 생겼다. 계속 공부하고 싶었다. 공부에는 별취미가 없었지만 공부를 하면 지긋지긋한 가난의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아서 였다.

    스스로 학비를 벌어 야간고등학교에 다니다

    엄마의 반대를 무릅쓰고 숭의여고 야간부에 입학을 하였다. 담임선생님께 부탁을 하여 을지로 2가 건설회사에서 급사로 일하게 되었다. 사무실 청소, 전화 받는 일, 잔심부름을 하였는데 한번은 사무실 여직원이 돈을 잃어버렸다면서 급사인 한명희를 의심하였다.

    가난해서 학비를 벌어 공부 하는 것도 힘들고 서러운데 도적으로 의심을 받다니 억울하기도 하고 분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증거를 내놓으라고 따졌다. 돈 가지고 가는 것 보았느냐고 항의하였다. 화가 나서 책상위에 있는 사무집기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졌다.

    이 소동을 나중에 사장이 알게 되어 급사가 사무실을 뒤집느냐고 야단을 쳤다. 한명희는 “사장님 같으면 돈을 가져가지도 않았는데 의심을 받으면 기분이 좋겠느냐” 며 사장에게도 대들었다.

    이 일이 있고난 얼마 후 사장은 한명희가 전화를 못 받는다며 야단을 쳐서 회사를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한명희는 고등하교 졸업할 때까지 새벽 청소 일 등을 포함해서 두서너 번 직장을 옮겨 다녔다. 3년 내내 직장생활과 공부에 지쳐 이틀에 한 번씩 코피를 쏟았다. 길을 걷다가 쓰러져서 몇 번이나 응급실에 실려간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을 한명희는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살았다.

    좌절 된 신분상승의 꿈, 겉치장으로 달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973년 1월 동네 친구의 소개로 외국인 회사인 콘트롤데이타에 입사서류를 냈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쓰고 면접을 보다보니 컴퓨터 기억장치를 조립하는 공장이었다. 절망이었다. 고아원에 맡겨질 때는 학교라도 다닐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는데 공장은 다닌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도 싫었고 인정하기도 싫었다. 처음에는 일주일만 다녀보기로 하였다.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는 콘트롤데이타가 컴퓨터 부품을 조립하는 공장이란 것을 말하지 않고 수준 높은 외국인회사라고 속였다. 특별한 대안 없이 그만 두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에서 일하면서 노동자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사회적인 절망감을 감추기 위해 겉치장에 빠졌다.

    3개월치 월급으로 명동에서 순모코트를 맞춰 입고 유명메이커 구두를 사신고,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면 아주 괜찮은 직장이라고 허풍 떨면서 저녁을 사고 맥주도 마셨다. 현장에서 화장품 장사를 하였는데 수입이 월급의 2배가 되었다. 피아노도 배우고, 테니스도 치러 다녔다.

       
      ▲콘트롤데어타 해고자 모임. 사진 가운데가 한명희. 

    그러나 성격상 일을 대충하지 못한 성격이다 보니 작업 목표량을 채우기 위해 야간근무를 하고 토요일 날 밤을 세워 일을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수긍하지 않고 도전하고 따졌다. 동료들과 함께 생리휴가나 임금인상에 앞장서고, 바른말 잘하는 성품 때문에 관리자들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어 정기승급에 누락이 되기도 하였다.

    날라리처럼 꾸미고 다니면서 그럭저럭 5년을 다니다보니 현장에서 자신의 정체감을 확립하고 싶었다. 그래서 반장시험을 보았다. 반장은 현장관리자로서 여자로서는 최고의 직책이었다.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생산부장이 좋아한다는 꽃 한 다발을 사가지고 찾아가 “내가 반장이 되면 다른 사람보다 월등한 통솔력을 발휘할 수 있다‘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탈락했다. 생산부장은 한명희가 따지기 잘하고 고분고분하지 않아 현장 관리자로서는 부적격자라고 이미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명희는 좌절하지 않고 재시험에 도전을 하였다. 회사에서 신뢰하는 신임관리자를 찾아가 자신을 반장으로 추천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실제 그 관리자는 현장에서 한명희가 예측불허의 고장을 말끔히 수리하고 정교한 조립도 거뜬히 해내는 것을 관심 있게 눈여겨 관찰하고 난 후 한명희를 추천하였다.

    노조활동으로 신분상승의 껍데기를 벗어 던지다

    1977년 어느 날 한명희는 당시 콘트롤데이타에서 민주노조활동을 주도하고 있는 이영순으로부터 노동조합 대의원 활동을 권유 받았다. 평소에도 현장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 쟁취하기 위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대의원들을 보면서 흠모하였던 터라 망설이지 않고 수락을 하였다.

    대의원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서 바로 어용노조 민주화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사람을 만나 설득하고 함께 조직하는 일이 허리에 힘이 팍팍 들어갈 정도로 활력이 넘치고 큰 기쁨이 되었다. 노동자조직을 통해 못할게 없겠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겁나는 것도 없어지고, 노동조합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게 되면서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언제나 짓눌려 지내고 소외당한다는 생각으로 인생은 비참하다고 생각했는데 노조활동을 통해 비로소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은 것 같았다.

    한명희는 한 마리 작은 새가 껍질을 깨고 세상을 향해 걸어 나오듯 사회적인 열등감과 신분상승의 허울을 벗어 던지고 노동자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게 되었다. 명동에서 구두 맞춰 신는 짓 안하고, 요란스러웠던 손톱의 메니큐어색과 두터웠던 화장도 엷어졌다. 이제 어딜 가서 누구를 만나든지 당당하게 노동자라고 이야기 하게 되었다.

    노조민주화투쟁을 통해 이영순 집행부가 들어서고 한명희는 대의원이 된 지 3개월 만에 부지부장이 되었다. 노동자들을 위해 교육과 지원을 담당하는 영등포 산업선교회를 알게 되었고, 노조 간부들의 역량강화를 위한 크리스챤 아카데미 교육을 통해 한명희는 노동운동가로서 조직가로서 삶의 길을 닦았다.

    민주화의 봄 그리고 철수반대 투쟁

    1979년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이 막을 내리고 민주화의 봄이 찾아왔다. 그 후 5.18광주 민주화항쟁이 전두환 군사정권에 짓밟히고, 1981년 노동계 정화조치로 이영순과 간부 6명이 해고를 당했다. 한명희는 운명처럼 지부장 직무대행을 하게 되었다.

    해고자들의 생계지원, 복직지원투쟁을 하면서 콘트롤데이타 미국본사에 노조간부 6명이 해고를 인정할 수 없다는 공문을 보낸 후, 해고자들의 전원복직을 위한 농성을 하였다. 이태희, 박성희, 박영선 등이 구속됐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82년 7월 콘트롤데이타 미국본사에서는 한국공장 철수를 통보해왔다. 노동자들은 최고의 생산성으로 알짜배기 기업을 만들어 주었는데 철수라니 인정할 수 없었다. 전 조합원이 모여 철수 반대투쟁을 하였다. 2년이 넘게 임금인상투쟁등의 일상투쟁과 해고자복직, 철수반대투쟁을 하다 보니 모두가 지쳤다.

    지부장 직무대행을 하던 한명희는 몸무게가 12kg이나 빠지고 잠을 자기 위해 누우면 천장에서 벌레들이 꿈틀거리며 한명희를 향해 돌진해 와서 온 몸을 휘어 감는 악몽에 시달리며 가위눌리기도 하였다.

    콘트롤데이타 해고자 모임에서

    노동운동가의 길

    1983년 철수반대투쟁이 마무리 되었다. 한명희는 사회과학공부를 하면서 노동운동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모색을 하게 되었다. 노동운동기금 마련을 위해 전 재산을 모두 털어 1984년 주산, 부기학원을 차렸다. 학원은 선생들에게 맡겨놓고 한명희는 공장에 들어갔다.

    몇 군데 사업장을 전전하며 소그룹을 조직하고 지도하였는데 소그룹이 21개가 되었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소그룹을 지원하였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이 들어 친정엄마가 한명희가 살던 당산동으로 이사를 와서 소모임이 끝나고 아침에 출근하는 노동자들 50~60명에게 밥을 해주기도 하였다.

    독실한 기독교신자며 간호사였던 엄마는 평소에도 집안 형편이 어려워 끼니를 거르면서도 가난한 산모들의 아이를 받아주고, 초상집의 염도 해주고, 결핵환자들에게 주사를 놔주었는데, 소문을 듣고 몰려 온 결핵환자들이 부엌 쪽문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많았다. 

    엄마는 이 모든 것을 아무런 대가 없이 무료로 해주셨다. 이렇듯 평생을 베풀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다국적 기업인 콘트롤데이타 철수반대투쟁 현장에서 투쟁승리를 위한 기도를 해주시기도 하면서 한명희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한명희는 1985년도까지 공장에 다니면서 현장조직을 하였다. 1986년도에는 노동자들의 대중조직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기독노동자연맹을 조직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다양한 형태의 운동들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기로 운동의 역량도 엄청났다. 기독노동자연맹은 선진적인 정치투쟁을 지향하던 인천노동운동연합과 서울노동운동연합과도 연대하였다.

    운동과 결혼의 조건

    1986년 YH 김경숙추모제를 준비하며 여성노동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결혼을 한 후 뿔뿔이 흩어진 70년대 노조운동 경험자들을 다시 모아 여성노동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많은 여성운동가들이 운동을 하다 결혼적령기를 놓치기도 하지만 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결혼을 포기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실제로 어느 여성노동자 소모임에서 ‘인생 계획 세우기’를 하였는데 30살 이후의 계획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는 그 당시 시대상황이기도 하였겠지만 결혼은 곧 운동을 포기하는 것으로 보는 분위기도 팽배해 있었고, 본인들도 결혼을 하면 자연스레 운동을 정리하고 가정으로 들어앉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의 틀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한명희는 평생을 운동하면서 혼자 살아가는 것보다는 결혼해서도 포기하지 않고 운동을 잘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되어 36살의 나이에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결혼 상대자의 조건으로 노동자 출신의 노동운동가이면서 연하의 남자를 꼽았다.

    평생을 운동을 해야 하니 노동자 출신의 노동운동가는 당연하고 연하의 남자를 생각한 것은 당시 36세의 또래 남자들은 대부분 결혼을 해서 총각은 없을 것이고, 또 결혼이 반드시 남자가 연상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도 깨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1988년 어느 날 소모임할 때부터 지도했던 6년 연하의 남성동지가 부모에게 허락을 맡았다며 “아이 하나쯤은 낳아줄 수 있죠?”라고 말하면서 청혼을 하였다. 망설이지 않고 결혼했다. 결혼 후 해고 노동자였던 남편은 계속 복직투쟁을 하고 한명희는 다시 공장에 취업을 한 후 여성노동자회 활동을 하였다.

    미조직 여성 노동자들이 사회적으로 가장 열악한 위치에 처해 있다는 것을 다시 인식하고 여성노동자 자신도 노동자의식과 여성의식을 동시에 획득하면서 여성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현장극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집회를 개발하고 노래극을 만들어 남녀 차별임금, 모성보호 문제, 구사대 폭력, 가정 내 폭력, 직장 내 성희롱 등 여성노동자가 직면한 문제를 알리고 해결하기 위한 활동을 하였다.

    둘째 아이 출산을 앞두고도 1996년 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로 선출되어, 활동하고 그 이후 줄곧 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여성노동자들의 삶의 변화를 위한 활동을 하였다. 

       
      ▲2009 여성선언 발표. 앞줄 가운데가 한명희.
     

    서울시 의회 의원이 되다

    한명희는 지난 2007년 시민사회가 진보정치 사수를 위해 야당에 힘을 보태기로 결정을 한 후 10년을 일하던 여성인력개발센터를 그만두게 되었다.

    지역에서 비공식적인 여성노동자들의 직업훈련과 조직화 사업을 해왔는데 그 일을 그만두고 제대로 정치활동을 할 수 있을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아득했다.

    그 후 2010년도에 민주당 비례대표로 서울시의회 의원이 되었다. 서울시 의원이 된 직후 한명희는 가장 먼저 지하철 9호선의 청소하는 여성노동자 6명을 복직시키고 지하철공사가 청소노동자 정년을 56세로 단체협약에 명시하려는 것을 현행대로 나이 제한을 하지 않도록 묶어놓고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 서울시의 서해뱃길 저지투쟁과 양화대교 예산을 삭감하여 학교무상급식 재정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서울환경운동연합으로부터 ‘한강복구 디딤돌상’을 받기도 하였다.

    2010년 9월에 서울특별시의회 여성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초대위원장이 되었다. 여성특별위원회는 여성의 사회참여확대와 보장을 위한 제도적인 문제점을 개선하고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의 역할 증대와 여성인력의 활용, 극대화 및 각종 시설의 확충 등 여성들의 복지와 권익향상을 지원하는 일을 한다.

    현재 서울시에는 노동문제를 전담하는 조직이 없어 노동분쟁 민원이 급증하고 특히 여성들의 비정규직, 계약직 민원이 많다. 여성특별위원회는 서울시 산하 비정규직 여성문제와 일자리 창출 성매매 문제해결등에도 주력할 계획이다.

    여성노동자로 40여년을 살아오면서 꼭 해결 하고 싶었던 일들이기에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해 나갈 생각이다. 한명희는 다양하고 굴곡진 삶의 현장에서 몸으로 겪었던 일들을 징검다리 삼아 엉클어진 실타래를 풀 듯,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엄마의 마음으로, 정책제안을 하고 조례제정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소외와 불평등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에서 모두가 행복한 삶을 누리는 그런 사회를 염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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