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을 때까지 노동운동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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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7월 18일 01:1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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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크링하우젠 에발트 광산에서 8명의 한인 광부가 해고된 ‘사건’은 모든 우리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우리와 같이 학습조를 꾸려 공부하던 한봉(가명) 형과 태영 아제도 해고 통지서를 받았다. 이삼열 박사는 독일 변호사인 위르겐 아우스트(Juergen Aust)와 함께 헤르네(Herne)에 있는 노동법원에 부당해고 소송을 냈다. 우리들의 마지막 동기회장은 재판을 받지 않고 귀국했다. 

    독일에서 부당해고 소송을 내다

    에발트 광산 기숙사는 살벌해졌다. 우리들의 활동을 무표정하게 관망하던 사람들은 코웃음을 쳤다. "돈 벌러 왔으면 광산에서 하라는 대로 가만히 일이나 할 것이지, 괜히 시끄럽게 해서 한인 광부 전체가 광산에 찍혀서 더 힘들게 만들었다."면서 해고자들을 원망하는 눈초리로 보기 시작했다. 특히 한인광 자치회 송대근 형과 한봉 형, 태영 아제한테는 더 싸늘했다. 가끔은 시비까지 걸어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네 아빠는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우선 해고된 같은 학습조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생활을 보장해야 하는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태영 아제는 동생인 태호 아제(너도 알 거다. 인선 아빠다)가 있어서 괜찮은데 한봉 형은 당장 갈 곳이 없었다. 광산 측에서 해고통지와 동시에 기숙사에서 나가라는 통지도 했기 때문이었다. 다행이도 재판중이라서 일시적인 체류는 가능했다.

    나는 우선 네 엄마와 이야기해서 한봉 형을 우리 집에서 함께 있도록 하자고 했다. 엄마가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 이삿짐을 날랐다. 그때 우리 집은, 너도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달하우젠(Dahlhausen)역 바로 앞에 집을 사서 이사한 곳이었다. 제법 큰 집이었다.

    아마도 네 엄마는 우리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은 거라고 생각해서, 교통 좋은 역 부근에 방이 여섯 개나 되는 집을 선택한 것 같다. 그 집은 지은지 100년도 넘은 곳으로, 우리는 아래층에서 살았다. 그 집은 오래 된 3층집이었는데, 주인이 수리를 한 후 층별로 나누어 팔았다.

    한봉 형이 우리 집으로 이사오고, 우리들은 해고 대책모임을 갖는 등 여러가지 노력을 하고 있는데, 어느날 반가운 ‘승전보’가 우리에게 날아왔다. 에발트 한인광부 자치회 송대근 회장이 재판에서 승소해서 복직 판결이 났다는 소식이었다. 

    재판에서 승소하다

       
      ▲에발트광산 작업장 사진과 송 회장 승소판결 기사

    에발트 광산과 루르 광산협회는 법원 판결 이후 해고자 문제를 풀기 위해 적극적인 태도로 협상에 임해오기 시작했다. 

    우리 측의 위르겐 아우스트 변호사와 이 박사는 광산 측과 협상을 한 결과, 해고된 광부 중 일부는 보쿰에서 멀리 떨어진 아헨(Aachen) 광산으로 갔으며, 일부는 귀국을 위한 기술교육제도인 기술학교로 갔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까지 우리는 노동자 연대를 생각하지 못하였다. 아니 연대라는 것 자체를 몰랐다. 에발트 광산업주와는 싸웠지만, 광산노조에 찾아가서 한인 광부들의 사정을 전하고 이야기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우리는 그저 차별에 분노하여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성질만 낸 셈이 된 것이었다. 

    한인 광부들만 불만이 쌓이면, 그 분노의 표시로 갱도에 들어가지 않는 ‘입항 거부’ 행동에 돌입했다. 그리고 그 결과 8명의 해고자가 생긴 거였다. 솔직히 우리도 노동운동에 경험이 없다보니 단결이나 연대라는 생각보다는 힘든 동료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이었다. 

    이 박사도 노동운동을 한 분이 아니어서 부당하게 당하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자기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았다. 물론 학습조원이 그 광산에 있어서 적극 자문하고 지원을 했지만, 입항 거부 행동의 의미와 그 결과 같은 것을 깊이 고민하지 않고 한 것이 걸렸다. 또한 주독 한국대사관에서 그렇게 노골적으로 독일광산업주 편에 서서 설칠 줄은 몰랐다.

    아! 우리를 지켜 줄 거라 믿었던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이 독일광산업주 편임을 알게 되자 나는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한국 대사관은 독일광산업주 편이었다

    아빠와 우리 학습조는 깊은 늪으로 빠져들었다. 우리는 충분한 경험과 학습, 단련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뭣도 모르면서 당하는 자와 연대해 그들에게 힘을 보태준다는 생각으로 활동을 해왔다. 우리가 주체로 나서기보다 늘 지원하는 역할만 해온 것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아빠가 나름대로 세상을 보는 눈을 그 전보다 점점 넓고 깊게 만드는 과정은 대부분 한국에서 날아온 현장 사례집 같은 인쇄물을 보고 배우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현장조직을 대상으로 한 실천 경험이 없었다. 우리의 고민은 더 깊어졌다. 그럴 즈음에 이 박사가 우리 학습조를 불렀다.

    그는 "한국에서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면서 빨리 오라고 했다. 우리는 달려갔다. 그 기막힌 사건은 이른바 ‘똥물 사건’으로 유명한 동일방직에 관한 것이었다.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노동자들에게 똥물 벼락을 날렸다는것이었다. 남성 조합원들이 말이다. 잠깐 자료를 이용해서 그때 이야기를 되새김하자.

    동일방직 이야기 (자료인용)

    동일방직 사건은 60년대 말부터 도시산업선교회를 중심으로 의식화되기 시작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어용노조 추방운동’ 의 하나이다. 섬유노조 동일방직 지부는 1972년 5월 10일에 정기대의원회에서 어용지부장을 추방하고 주길자를 지부장으로 하는 새 집행부를 구성하면서 노조민주화의 일보를 시작했다.

    민주노조가 되자 회사측은 노조 집행부를 회사측에 유리하도록 재구성하는 시도를 하였다. 회사에 매수된 고두영 일파는 1976년 7월 23일에 노조간부들을 경찰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고 나머지 노동자들은 기숙사 문에 못질을 하여 가두어 둔 채, 회사측 대의원 24명을 모아 대의원대회를 열고 고두영을 지부장으로 선출하였다.

    대의원 대회의 결과에 분개한 노동자 200여명은 바로 기숙사를 부수고 노조사무실에 모여 농성을 시작했다. 농성 3일째인 25일에는 기동경찰이 농성 중인 여공 400여명을 포위하고 해산하지 않으면 모두 연행하겠다고 경고하였다.

    여성노동자들은 작업복을 벗어 던지고 속내의 차림으로 노총가를 합창하며 저항하였다. 이들은 아무리 비열한 경찰일지라도 설마 반나체의 여자 몸에 손을 대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경찰은 돌격이라는 구호와 함께 경찰봉으로 알몸의 여성노동자를 후려갈기고 구둣발로 짓밟으며 연행했다.

    이 사태로 72명이 연행되고, 40여명이 충격으로 졸도했으며 14명은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어떤 여성노동자는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켜 5개월 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다.

    동일방직 노조는 자본, 권력, 그리고 어용노조가 연합한 노조파괴 책동을 종교계 및 민주운동단체와 연대하여 극복한 지 1년이 못되어 다시 더욱 악랄하고 교묘한 파괴책동을 맞는다.

    1976년에 김영태가 신임 위원장에 당선되고 1978년에 섬유노조 규약을 개정하면서 소속 노조에 대한 중앙의 지배력을 절대적으로 강화하려 하였다. 본조와 회사는 대의원대회의 개최 승인요청을 이유 없이 거부하면서 동일방직 노조의 지원단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또한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강제교육을 하여 노조와 노조원들을 분리시키고자 했다. 또 본조는 대의원대회의 구체적인 과정에까지 개입해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것은 동일방직 노조와 본조의 대결을 불가피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동일방직 노조집행부는 1978년 2월 21일에 새 대의원을 선출한다는 공고를 붙였는데 2월 20일에 남자공원 10여명이 노조사무실로 들이닥쳐 투표함을 부수고 노조간부를 폭행하였다.

    노조간부들은 노조사무실에서 철야하며 경계하고 있던 중 21일 새벽 5시 40분경 회사측 조종을 받은 남자 노동자 5~6명이 방화수통에 ‘오물’을 담아와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선거하러 오는 여성조합원들의 얼굴과 옷에 닥치는 대로 발랐다.

    오물로 짓밟힌 노동자들은 그래도 회사 일을 하기로 했는데 전국섬유노조는 3월 6일 동일방직 노조를 사고지부로 처리해 버리고 이총각 지부장과 부지부장 2인, 총무부장 등 4명을 ‘도시산업선교회와 관련이 있는 반조직행위자’라는 이유로 제명했다.

    그 후 노동자들은 그들의 사정을 교회에 호소하는 한편 명동성당과 인천답동성당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이에 종교계 등 민주세력이 지원에 나섰다. 김수환 추기경을 필두로 한 종교지도자들이 정부 당국과 접촉하여 협상한 결과 단식농성은 풀었지만 협상안은 회사에 의해 일방적으로 파기되었고 노조에 대한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회사측은 노동자들이 무단결근을 했다는 이유를 들어 ‘해고예고 예외인정신청’을 중앙노동위원회에 제출하였다. 중앙노동위원회는 이 신청을 ‘이유 있다’고 인정하여 4월 1일로 124명에 대한 해고통보를 하기에 이른다. 전국섬유노조본부는 4월 10일에 이들 124명의 해고자 명단을 전국의 각 사업장으로 보내 해고자들이 다른 공장에 취업하는 길조차 막아버렸다. 이것이 그 악명 높은 블랙리스트였다.

       
      ▲이 한 장의 사진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꿀 줄 그때는 몰랐다.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터져나온 말 

    약 한 시간 정도 함께 읽으면서, 우리는 그 내용에 깊이, 아주 깊이 빠져들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분노하고, 울분을 터뜨리고 치를 떨었다.

    나는 한국의 현장을 직접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모두 말렸다. 그때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터져나왔다.

    "저는 죽을 때까지 노동 운동을 하겠습니다. 한국의 현장에 직접 가서 많은 것을 배우고자 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집에 온 후 나도 내가 왜 그런 발언을 했는지 믿기지 않았다. 이상했다. 난 말그대로 교회의 전도부장으로 활동했는데 평생 선교가 아니라 ‘노동운동’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 발언 이후 아무도 나를 더는 말리지 않았다.

    나의 한국행에 대해서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 같은 학습조 동료들 그리고 여러 가지 일을 나와 함께 했던 사람들은 내 ‘뜨거운 정열’을 어떻게 지원할까 많이들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들 모두는 내게 노동운동과 관련된 일을 맡기든지, 제안을 했다. 

    1979년 귀국하다

    나와 같이 학습하던 정 선생은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 일하는 신인령 선생과 최한배를 만나보라며 편지를 써줬다. 그리고 당시 유학와 있던 강대인 선생(강원용 목사 아들)은 황주석이란 분을 소개해 주었다. 또 모금도 해서 동일방직 해고자들에게 전해주라며 봉투도 건네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난 다니던 광산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 네 엄마와 의논한 끝에 너를 데리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때 너는 지저귀를 차고 있었단다. 헌데 한국에는 지저귀가 흔하지 않았다. 1979년 봄이 넘어갈 때 두 살 생일이 막 지난 너를 데리고 돌아왔다. 5년 만의 귀국이다. 너는 그렇게 처음으로 네 아빠가 태어난 땅 한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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