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나라를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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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6월 26일 08:3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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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글을 극단적으로 피곤한 상태에서 쓰기에, 문법이 틀리거나 단어 선택이 적절치 않은 경우가 있더라도 부디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제(23일) 낮에 학회차 찾아간 모스크바에서 돌아왔는데, 모스크바에서 선후배들과의 만남이 많았던 데다가 각종 일이 바빴기에 거의 쉴 수도,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었습니다.

지상건널목이 사라진 모스크바

제가 10여년 간 집필해온 『조선사 통설』을 드디어 출판사에 넘겨주는 등 일을 어느 정도 해결했지만, 극단적 피로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피곤했다 해도, 그저 안 보고 지나갈 수 없는 부분들이 꽤 있었기에, 이를 여기에서 독자 여러분들의 참고를 위해 적어둡니다.

서방 학자들에게 ‘국위선양’을 하려고 했던 학회 주최측의 주선으로는, 우리는 모두 드베르스카야라는 모스크바의 중심가에 위치한 고급호텔에 투숙했습니다. 그 드베르스카야 거리를 걷다보니 한 가지 놀라운 점이 당장 눈에 띄었습니다. 지상 건널목이 전혀 없었던 것이죠. 지하보도는 더러 있었지만, 지상건널목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하보도의 경우에는, 휠체어를 쓰시는 장애우들에게는 아마도 그 이용이 거의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승강기 등의 시설이 전무했기 때문입니다. 아, ‘전체주의’ 시기만 해도 그 거리에는 횡단보도가 분명 있었는데, 왜 ‘민주화’ 이후로 없어졌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오늘날 모스크바는, 보행자, 즉 차 없는 평민들을 위한 도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차주만이 이 도시에서 진정한 의미의 시민권을 가집니다. 평민들에게 남은 것은, 차량의 대부분이 1970년대에 생산된, 출퇴근 시간에 서울 이상으로 붐비는 ‘지옥철’과 가면 갈수록 없어져가는 무궤도전차, 전차들입니다.

평민들이 사실상 시민권이 없는 ‘부자 공화국’에서는, 부/권력과 무관한, 그러나 다수의 생존과 진보를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여러 직업 집단들은 공산정권 시절에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푸틴 등 집권 패당의 수괴들도 스스로 인정하듯이, 러시아에서는 교사의 평균 임금은 한화 약 50만원에 불과합니다(http://www.sptimes.ru/story/33815).

교사 평균임금 50만원

실제로는 비교적으로 가난한 지방의 경우에는 20~30만원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모스크바만 해도 물가 수준은 서울의 2~3배에 달하는데도 말입니다. 결국 1950년대의 한국처럼 생계가 곤란한 교사들은 그 부담을 학부모들에게 고스란히 넘겨 그들로부터 각종의 ‘무명잡세’들을 반강제로 거두거나, ‘투잡스족’으로 변신해 아침이나 저녁에 마트에서 바닥닦이를 해야 합니다.

무리한 노동에 만성적 피로를 앓거나, 학생들을 등치는 데에 익숙해진 교사로부터, 학생들이 무엇을 어떻게 배우겠어요? 신흥 ‘사회 귀족’의 자녀들이 조기 유학 가거나 사립 ‘귀족 학교’에 다니지만, 평민 자녀들이 가면 갈수록 우민화돼가는 것입니다.

평민의 3분의 1 정도는 이제 아예 책을 읽지 않으며, 또 약 3분의 1 정도는 지동설을 믿지 않아 (과거의 교회 가르침대로)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해서 돌고 있다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참고자료). 한 때에 우주선을 최초로 띄운 나라는, 인제 중세적인 무지의 늪으로 빠져들어갑니다.

교사들보다 대학교수의 월급은 약 30~40% 정도 높지만, 근무 여건은 마찬가지로 최악입니다. 제가 만난 러시아에서 대학 교직에 있는 선배들은 대체로 주당 10~12시간 강의해야 됐습니다. 잔업을 해야 그나마 수당이 지급돼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먹고 살 수는 있어도 연구할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소련 망국 이후 20년간 한국학 분야의 경우에는 일부의 새로운 고전 번역서(『해동고승전』, 『용비어천가』 등)와 근현대 문학 번역서(김소월, 김동인, 박완서, 은희경 등등)들이 나왔지만, 새로운 연구 단행본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학문도, 무상교육도 실종되고 있다

소련 시절에 왕성했던 일부의 현재 ‘비인기’ 분야(한국어 문법, 식민지 시대 노동운동사, 공산주의 운동사, 전통시대 민중 저항사, 조선시대 정치사회사 등)에서는 전문가들이 아예 남아 있지 않거나, 극히 소수만 남았습니다.

젊은 학자의 대표적인 학위 논문은, 한국에서 나온 개설서 몇 종과 해당 분야의 영문 서적 등에서 따온 개략적인 정보의 ‘짜깁기’에 불과합니다. 학문이 실종되는 것과 동시에 소련식의 무상교육도 조금씩 실종돼갑니다.

법적으로 여전히 ‘무상교육’이지만 실제로는 약 60% 이상의 대학생들은 ‘유료 학생’으로 분류돼 대개 4~6백만 원이나 그 이상이 되는 등록금을 냅니다(http://www.isa-sociology.org/universities-in-crisis/?p=441). 대학이 학문하기가 불가능한 기업으로 변신함과 동시에, 공산 시절에도 존재해왔던 교내 민주주의는 다 죽고 말았습니다.

학생들이 무권리 상태에 있는 것은 물론, 교수회의의 권력도 거의 실종되고 사실상 선출되어지지 않는 극소수 권력자들이 대학 행정을 도맡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구조에서 부정부패는 가히 상상을 초월합니다. 특히 제 모교인 모스크바국립대에서 1992년 이후부터 군림해온 사도브니치 총장 등 ‘명문대’ 권력자의 경우에는, 부정부패 혐의에 대한 보도는 그동안 계속 잇따르고 있었습니다. 깡패들이 운영하는 불량 기업, 이건 지금 러시아 대학의 모습입니다.

교육 분야 등 공공 부문이 조금씩 망해가는 상황은, 종합적 경제 상황과 직결돼 있습니다. 극소수의 관료, 재벌들을 살찌우는 석유, 가스 등 자원 수출 이외의 경제는, 여전히 1991년 이후의 위기 상황을 벗어나지 못해 조금씩 규모가 축소되어갑니다.

국가, 재벌과 결탁한 안보 마피아 포로돼

즉, 지배계급의 사리사욕에 따라서 경제는 점차 단순화, 원시화되는 중입니다. 대표적으로는, 여객기 생산 부문입니다. 망하기 직전의 소련은 여객기 세계 생산량의 25%를 만들어냈지만, 오늘날 러시아의 반 죽은 공업은 일년에 15기의 여객기를 만들기라도 하면 풍년이라고 부릅니다(2009년 통계).

이 나라는 망하기 직전에, 즉 1990년에 715기의 여객기를 만들 수 있었다는 걸 이제 누가 믿겠습니까? 소련 망국으로 죽어버린 컴퓨터 생산은 소생될 조짐은 없고, 정밀기계 생산은 점차 죽어가는 추세입니다. 집권 관료와 재벌들은 원료 수출로 떼돈을 버는 걸로 자기만족하고 있으며, 무슨 구호를 내세우든 간에 실제로는 ‘복잡하고’ 단기적 이윤이 보이지 않는 고급 기술 개발, 생산 부문에 별다른 투자를 하지 않습니다.

이런 투자는, 단기적 이윤에 구속되지 않는 국가만 할 수 있는데, 국가가 재벌들과 결탁한 안보꾼 마피아의 포로가 된 상태에서 그 공공성을 완전히 잃어 집권자의 사리사욕을 채워주는 깡패집단으로 변신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국가는 쏘련의 유산을 갉아먹으면서 러시아를 점차 죽이고 있다고 이야기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 러시아를 원료나 소비재 장사를 좀 해보겠다는 장사꾼의 시각이 아닌 러시아 백성의 시각으로 본다면, 그나마 소련의 유산으로 겨우 유지되는, 그 유산도 점차 낡아감에 따라서 계속 죽어가는 나라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15~20년 후에, 소련 시대에 배출된 교수, 교사, 의사와 그 때에 만들어진 공공 시설들이 다 퇴출되고 나면 결국 망국에 가까운 상황이 올 것은 뻔합니다. 러시아를 그나마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은행과 지하자원, 주요 기업들을 사회화하고 국가를 안보꾼들의 마피아가 아닌 진정한 의미의 ‘공공 기관’으로 만들 민중혁명밖에 없습니다. 이집트 민중들이 보여준 길, 어쩌면 오늘날 이집트보다 더 급진적인 길(이집트의 경우 군대의 권력은 사실 여전합니다), 이건 러시아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죽음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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