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기업' 역공, 철저한 제재로 막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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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6월 25일 10:5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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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3일, 서울행정법원이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황유미, 고 이숙영씨에 대해 산업재해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4년이 걸렸다. 노동자의 죽음이 업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시간이었다. 노동자들과 가족들의 한이 삼성이라는 철옹성 벽을 넘는 데 걸린 시간이기도 했다.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일을 희망으로 만들기까지 당사자들이 겪었을 고통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것이었다.

반도체산업 직업병 철저히 은폐

우리나라에서 암이나 백혈병(혈액암)이 산업재해로 인정받은 경우는 있지만 반도체 사업장의 백혈병이 산업재해로 인정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판결을 보도하는 언론들이 ‘반도체 백혈병 노동자 첫 산재 판결’이라고 제목을 뽑는 것에서도 그 의미는 잘 드러난다.

반도체 산업은 유해 화학물질과 전리방사선 등 발암 물질을 사용하는 작업이 많다. 이러한 작업환경, 그리고 외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직업성 암은 이미 보고 되었어야 한다. 그래야 직업병 환자에 대한 사후 관리와 함께 직업병 예방을 위한 대책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반도체 산업의 암을 비롯한 직업병은 철저히 감춰져 왔다. 그 배경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산재보험제도가 직업병이 드러나기 어려운 구조라는 점, 젊은 여성들이 주를 이루는 반도체 산업이 그간의 노조운동으로 포괄되지 못했다는 점, 특히 최근 집단 발병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삼성반도체의 경우 무노조경영 등 억압적 노동관리를 특징으로 한다는 점 등이다. 업무로 인한 질병이 발생하더라도 현실에서는 무수한 장애물을 뚫고 산업재해로 승인 받기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번 판결을 이끌었던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가 반도체 산업의 안전보건과 관련된 자료를 찾을 수 없어 외국 자료를 직접 번역했다는 이야기는 ‘노동자의 생명을 우리사회가 어떻게 대접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아무쪼록 이번 판결이 학계와 제도권을 비롯한 노동안전보건계가 반도체 노동자의 작업환경과 건강 문제를 자신의 과제로 받아 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반올림’에 따르면 삼성전자 반도체와 LCD 공장 노동자 중 백혈병, 림프종, 재생불량성빈혈, 뇌종양 등으로 인한 사망자가 47명, 질환자는 130명에 이른다고 한다. 민간단체 하나가 밝힌 실태가 이 정도라면 문제의 전체 규모는 생각보다 클 것으로 보인다.

일반 국민보다 발병률 3~4배 높아

일반 국민과 비교해 해당 노동자들의 발병율이 3~4배 높다면 작업환경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삼성은 지금까지 질병의 ‘업무 관련성’을 부인하면서 ‘개인 질병’이라는 주장을 계속 해오고 있다. 이번 판결은 이러한 주장을 뒤엎고 작업환경으로 인해 백혈병이 발생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특히 당사자들의 집단적인 직업병 투쟁을 통해 쟁취한 승리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2007년, 고 황유미씨의 유족들이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의 유족 급여를 신청하면서 4년간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반올림’이 만들어진 후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가 병을 얻었다’는 제보가 이어졌다.

이들 중 16명이 근로복지공단에 직업병 신청을 했디만 전원 불승인 판정을 받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유족들은 행정소송을 했고 6월 23일 첫 판결이 내려졌다. 삼성에 노동조합이 있었다면 이 모든 과정이 좀더 쉬웠을 것이다. 어쩌면, 억울하게 죽어가는 노동자를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가족의 억울한 죽음을 규명하겠다는 절박함 속에 산재, 인권단체들이 하나로 뭉쳤다.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를 집단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 황유미씨가 일한 라인의 경우 사망 2명을 포함해 6~7명이 비슷한 질병을 얻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러한 집단 발병은 이들이 하루의 절반을 보내는 작업장의 환경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집단적인 직업병 투쟁이 가지는 힘이다. 집단 직업병 투쟁은 과거 근골격계 투쟁에서 보듯이 질병의 사회적 의제화 및 해결에 효과적으로 기여했다. 그리고 지금 이 투쟁의 중심에 ‘반올림’이 있다. 23일 판결에 대해 “이제 다시 시작”이라고 말하는 ‘반올림’의 앞으로의 4년이 지난 4년보다 덜 외로울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해야 한다.

집단적 직업병 투쟁의 효과

이번 판결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놀라는 걸 볼 수 있었다. 승소할 걸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당연히 직업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법원을 비롯한 한국사회의 실질적 지배자, 삼성의 힘이 이번 판결에도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직접 나서 관련 회의를 부랴부랴 소집한 것도 이번 판결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를 역설적으로 드러내준 대목이다.

이렇듯 삼성반도체 직업병 노동자들의 투쟁은 ‘재벌, 정부, 제도’와의 싸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투쟁은 역으로 ‘재벌, 정부, 제도’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그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23일 판결 후 삼성은 ‘공인된 국가기관의 역학조사 결과와 다른 판결’이라면서 ‘반도체 근무 환경에 대한 객관적인 진실을 규명’하겠다고 밝혔다. 판결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 속에는 삼성이 무엇으로 그동안 수많은 직업병을 은폐해왔는지 드러나 있다.

삼성이 말하는 ‘공인된 국가기관’이 무엇이며, 소위 ‘객관적인 진실’은 누가 제공해주는가? "발암 물질은 없다."는 일방적 작업환경 측정 결과를 발표하면서 공정성 의혹을 받고 있는 노동부 산하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이므로 삼성전자가 소송에 적극 참여하도록 조치하라."는 내부 공문을 돌린 근로복지공단 등이 ‘공인된 국가기관’이며, 이들이 쏟아내는 ‘객관적 진실’이 진리가 되고 법이 되어 ‘직업병이 아닌 개인 질병’이라는 삼성의 주장을 뒷받침해온 것이다.

삼성은 이처럼 지식과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왕국을 지키는 한편, 유족들에 대해서는 노골적인 금권 매수도 마다하지 않았다. 생명에 치명적인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살인기업’에 대한 철저한 제재 없이는 불행한 사건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 캐나다, 영국 등에서 ‘기업살인법’을 제정하면서 노동안전보건을 엄격하게 관리하는 까닭이다.

삼성이 말하는 공인기관과 객관적 진실의 실체

23일 서울행정법원은 고 황유미, 고 이숙영 씨에 대해서는 ‘업무관련성’을 인정했지만 고 황민웅씨 등 3명에 대해서는 불승인 결정을 내렸다. 작업환경과 질병간의 인과 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간 근로복지공단에 비해 법원이 직업병 인정기준을 폭넓게 적용해왔다.

법원은 “업무와 재해 사이의 인과 관계는 반드시 의학적, 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입증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제반 사정을 고려할 때 업무와 질병 사이에 상당한 인과 관계가 있다고 추단되는 경우에도 입증 된다.”는 판례를 유지하고 있다.

이 기준에 비춰 봐도 이번 불승인 판결은 납득하기 어렵다. 더구나 재판부는 고 환민웅씨 등이 ‘유해화학물질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 질병과의 인과 관계를 인정하지 않아 상급심 재판에서 논란의 소지를 남겼다.

이번 삼성반도체 직업병 인정 투쟁은 산재보상 기준 및 절차의 개선이 시급함을 말해준다. 사업주에 비해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노동자가 자신의 직업병을 증명해야하는 현행 제도 하에서 직업병 승인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어럽다.

법원은 판례대로 ‘상당인과관계설’를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 나아가 직업병 ‘입증책임’을 노동자가 아닌 사업주가 지도록 바꾸어야 한다. 즉, 개인질병이라는 것을 사업주가 입증하지 못하면 직업병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많은 유럽 국가들에서 적용되고 있는 기준이다.

관련해 산재단체들이 오는 27일 오후2시, 국회에서 ‘삼성 반도체 직업병을 통해 본 산재보험제도 개혁 방향’이라는 토론회를 개최한다. 모쪼록 삼성 반도체 직업병 판결로 높아진 관심이 실질적 제도개선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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