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친구는 증평의 행복한 택시 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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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6월 23일 12:0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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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순이의 직업은 택시기사이다. 몇년 동안 회사택시를 몰더니 얼마 전에 개인택시를 받았다. 택시를 살펴보니 은색 빛깔의 그랜저다. 우리네 가난한 살림살이로는 평생을 살아도 가져보기 힘든, 비싸고 큰 중형차다.

    나이 오십이 훌쩍 넘었으니 이제 일하는 현장에서도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하는 나이인데 영순이는 개인택시를 받게 돼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앞으로도 걱정 없이 마음 놓고 평생을 일할 수 있게 되었다. 택시기사 영순이는 "이제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다."며 행복해 한다.

    개인택시 운전하는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하고 행복한 일이어서 호들갑을 떠느냐며 의아해 할 수 있겠지만 영순이가 행복해 하는 특별한 이유를 아는 나는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가기 때문에 함께 즐거워진다.

       
      ▲평생을 함께 할 개인택시와 함께.

    공부가 하고 싶어 동일방직에 입사하다

    김영순은 1976년 동일방직 노동조합 나체시위가 끝난 직후에 동일방직에 입사하였다. 그 전에는 수입한 원목으로 합판을 만드는 대성목재에서 일을 했다. 김영순은 동일방직 정문 맞은편 동네에서 단칸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 오빠네 집에 얹혀 살았다.

    대성목재는 동일방직 근처에 있어서 출근을 하려면 반드시 동일방직 정문 앞을 지나가야 했다. 동일방직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담한 한옥으로 지어진 직업훈련소가 있었고, 가지런히 정돈 된 잔디밭에 여름이 되면 빨간 장미가 탐스럽게 피어나는 아름다운 공장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동일방직 정문 앞에 정복을 입은 경찰이 쫙 깔려 있고, 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걱정스런 표정으로 수근대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고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더니, 데모를 한다고 하였다. 왜 데모를 하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회사가 노동조합을 못하게 하여 항의하기 위해 데모를 한다고 말해줬다.

    김영순과 오빠의 가족이 세들어 살고 있는 주인집 딸도 동일방직에 다니고 있었다. 그 딸의 말에 의하면 “천주교와 도시산업선교회라는 교회가 있는데 그 곳에 다니면서 3년 정도 공부하면 회사에서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똑똑해져서 대학교 나온 사람들도 저리가라고 할 정도가 되고, 그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데모를 한다”는 것이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공부를 할 수 있다니 마치 신세계를 발견하듯 마음이 설레었다. 공부가 하고 싶었던 김영순은 동일방직 사원모집 공고가 붙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입사지원을 하였다.

    김영순은 직포과에서 석정남과 함께 일을 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석정남이 친구네 집에 가서 부침개를 부쳐 먹자고 하여 따라갔더니, ‘사철나무’라는 그룹의 모임을 하는 자리였다. 김영순은 ‘옳다 이렇게 공부를 하는가 보다’하고 생각하며 그룹 활동을 적극적으로 시작했다. 

    모임은 자연히 산업선교회와 연결되었다. 모임에서는 노동법, 한문, 꽃꽂이 등을 배웠는데 현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짬짬이 한문을 읽고, 쓰는 연습을 할 정도로 재미를 붙였다. 당연히 노조활동도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다.

       
      ▲해고 직후 ‘사철나무’ 회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다. 뒷줄 왼쪽 두번째가 김영순.

    복직투쟁과 유치장살이

    1978년 동일방직 똥물사건 이 후 해고를 당한 김영순은 동료들과 함께 복직투쟁을 하였다. 4월 26일 현장점거 투쟁을 하다 구속된 지부장 이총각과 총무 김인숙의 재판장에 섬유노조 조직국장 우종환이가 증인으로 나왔는데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거짓증언을 하였다.

    "왜 거짓말을 하느냐"며 항의를 하다가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랬더니 난데없이 경찰차가 나타나 무조건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들이 다리를 밟고, 짓이기고, 머리채를 휘어잡고, 몽둥이질을 하면서 폭력을 휘둘렀고 경찰차에 실린 동료들은 경찰과 맛붙었다.

    옷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고, 팔이 뒤틀리고, 경찰차의 유리창이 깨졌다. 폭행을 휘두른 경찰은 공무집행을 했다고 멀쩡히 놔두고, 폭행당한 김영순과 동료들만 즉결재판을 받고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구류를 살면서 김영순은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김영순은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여할 수 없었다.

    또 9월 16일 기독교회관에서 연극을 공연한 후 시위를 하다 연행당해 즉결재판을 받고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유치장에서는 경찰들이 시도 때도 없이 불러내 반성문을 쓰라고 강요하였다. 김영순은 반성문 대신 동일방직 해고의 부당성과 복직이 될 때까지 투쟁할 것이라는 다짐 글을 썼다. 본래 내성적인 성격에 말수가 적었던 김영순은 해고당하고 난 후 복직투쟁을 하면서 점점 투사로 변해가고 있었다.

    재취업과 해고 그리고 버스안내양

    그러나 언제까지 복직운동에 매달릴 수는 없었다. 먹고살아야 했기에 김영순은 동료들과 안양에 있는 대농방직에 취업을 했다. 이력서에는 동일방직 근무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다. 경력사항에 동일방직 근무 기록을 하는 것은 해고를 자초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료들과 재미있게 어울리며 일을 하던 어느 날 대농방직 노동조합 지부장 박종근이 김영순과 동료들을 불렀다. 그는 "왜 이력서에 동일방직에 근무한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느냐"면서 사문서 위조로 고발하면 감옥에 가야 하니 스스로 그만두라고 하였다.

    노조지부장이 노동자 해고에 앞장서다니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박종근은 나중에 섬유노조 위원장을 거쳐 노총위원장까지 해먹었는데 당시 김영순과 동료들에게 한 행동을 보면 섬유노조와 노총의 본질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다. 그 날 저녁 짐을 싸서 산업선교회로 돌아오는 길에 너무 억울하고 기가 막혀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다.

    1980년 노총 농성을 끝내고 시내버스 안내양을 시작하였다. 새벽 4시부터 통행금지 직전까지 일을 하면 다리가 퉁퉁 붓고 몸은 천근만근으로 무거웠다. 쉬는 날도 없이 일하면서 버스비 입금액이 줄어들면 삥땅을 하는지 의심을 받았고, 날마다 몸수색을 당했다.

    김영순은 몸수색 당하는게 자존심도 상하고 수치스러웠다. 그러나 몸수색을 거부하면 회사 측은 “삥땅쳤냐?”며 다그치는가 하면 “중이 절이 싫으면 떠나면 되듯이 그만두라.”고 협박까지 했다. 몇 번의 해고 경험이 있었던지라 김영순은 슬며시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나는 삥땅은 절대 안한다. 몸수색 할테면 해봐라.’하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성실히 일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사가 찾아왔다. 찾아 온 형사는 사무실 직원과 안내양을 관리 담당하고 있는 기숙사 사감에게 “김영순이는 사상이 불순한 사람이니 잘라라.”라고 말했다. 기숙사 사감은 “김영순은 성실한 사람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다 책임질 테니 신경 쓰지 마라.”며 끝까지 해고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실을 김영순에게 일체 말하지 않다가 나중에 이야기 해 주었다. 그만큼 김영순은 열심히 일했고, 기숙사 사감도 그것을 인정해 주었다.

    특전사 출신의 남편과 결혼하다

    어느 날 오빠의 주선으로 선을 보았다. 김영순은 결혼에는 별관심이 없었지만, 또 결혼을 특별히 거부해야 할 이유도 없고, 무엇보다 사는 것이 너무 힘이 들었다. 그래서 오빠의 권유를 받아들여 자의반타의반으로 트레일러 운전을 하던 남편과 결혼을 하였다.

    결혼을 하고 보니 남편인 준택이 아빠는 특전사 출신으로 광주민주화 항쟁을 진압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남편이 하는 일에는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군대식 사고를 하는 가부장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결혼 초기에는 많이 힘들었다.

    더군다나 공장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여자들이 공장에 들어갔으면 시키는 대로 일이나 하고, 돈만 벌면 되는 거지 민주노조를 왜 해야 하는 건지, 그까짓 민주노조가 뭐 대수라고 데모를 하다 해고를 당했는지, 해고당하고 취업을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식의 논리를 펴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영순은 남편에게 노동조합이 왜 필요한지, 왜 정부에서 민주노조를 빨갱이라고 매도하는지 설명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 설득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남편은 전두환에 의해 저질러진 광주민주화 항쟁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의 열망을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또한 “군인이 자기네 나라 국민들을 죽이는 것은 잘못 된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되면서 김영순과 생각이 일치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현실에 순응하는 생활만이 미덕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잘못된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김영순은 ‘이 남자가 나보다 더 훨씬 바른 생각을 깊이 하게 되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해지기도 하였다. 성실한 남편과 알뜰하게 살림을 꾸리며 살림살이는 그럭저럭 안정이 되었고 아들 둘을 낳고 재미있게 살았다.

    남편의 병환으로 생활전선에 나서다

    그런데 건강하던 남편이 간경화증에 걸리더니 시름시름 앓으며 계속해서 건강이 악화되었다. 이때부터 김영순은 남편의 치료비와 아이들의 교육비와 살림살이를 도맡아 해결해야 해야 했다.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고 살림만 하던 아줌마, 전문성이나 특별한 기술이 없는 아줌마들을 받아 주는 사업장은 없었다. 집안일과 아이들 때문에 집중력이 떨어지고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고 오히려 기피하였다.

    하지만 김영순은 찬밥 더운밥 가릴 겨를도 없이 닥치는 대로 일하였다. 그 일은 옥상에 방수를 치는 단순 노가다부터 시작하여 식당에서의 허드렛일과 보험 세일즈, 야쿠르트 배달로 이어졌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하다 보니 얼마 가지 못해 일이 너무 힘에 부쳤다. 그랬다고 집안 형편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좌절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편히 잠을 자는 것도, 힘들다고 이야기 하는 것도 사치라는 생각을 하면서 죽어라 일을 했다. 그리고 아픈 남편과 나이 오십이 될 때까지 만이라도 함께 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새벽에 야쿠르트를 배달하면서 아픈 남편을 제대로 간호하기 위해 시간을 내어 호스피스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남편을 지극 정성으로 간호를 했다.

    평생 노동자 택시 기사가 되다

    보험 세일즈나 야쿠르트 배달은 월급 구조가 모두가 수당제이다. 한 달 동안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해놓고도 수금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돈을 벌기는커녕 내 돈을 ‘꼴아박는’ 경우도 발생했다. 김영순은 들쑥날쑥한 급여 때문에 힘들었다.

    이를 지켜보던 동료들이 김영순의 형편을 안타까워하며 택시 운전을 해 보라고 권유하였다. 택시 운전도 힘이 들기는 마찬가지지만 열심히만 하면 급여를 못 받을 정도는 아닐 거라는 것이었다. 망설이지 않고 바로 택시 운전을 시작했다.

    이른 새벽부터 밤 11시까지 하루 17시간 운전을 하고 나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머리가 아팠다. 노가다나 몸을 써서 하는 일은 체력이 많이 소모되기 때문에 힘들었는데, 운전은 가만히 앉아서 몸을 쓰지 않는 일이라 오히려 체력이 저하됐다. 

    동료 기사들이 “아줌마 그렇게 일하다가는 핸들잡고 죽는다.”면서 걱정을 해주면 김영순은 “일하다 죽으면 행복하지요.”라며 말 그대로 행복하게 일했다. 사납금을 입금시키고 월급을 받을 수 있으니 돈을 꼴아박는 경우도 없었고, 또 아이들에게 먹이고 싶은 음식 먹일 수 있고, 남편의 병원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세금을 밀리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실하고 부지런히 운전을 하다 보니 단골도 많이 생겼다. 뿐만 아니라 단골이 이웃을 소개해 주기도 하니 당연히 수입도 늘어났다. 5년 이상을 무사고로 회사 택시를 몰다보니 개인 택시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

    다른 사람 보기에도 행복한 택시운전사

    나의 친구들 중에서 김영순이는 말이 별로 없는 아주 조용한 사람이다. 친구들이 모이면 여기저기서 수다를 떨며 떠들어도 별소리 없이 빙긋이 웃으며 참여하는 사람이 김영순이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수용해주는 품성으로 사람의 얼굴처럼 다양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운전을 하는 김영순이가 무척이나 당차고 대단해 보인다.

    1년에 한두 번 정기모임이 있고 가끔 기회가 되면 몇 명의 친구들끼리 여행을 할 때도 있는데 그 때마다 김영순은 일을 끝내고 밤 12시를 넘겨서 기사작업복을 입은 채로 참석하기도 한다. “피곤하고 힘들 텐데 이제는 쉬엄쉬엄 일해라.”고 이야기하면 “일 할 수 있을 때 일 하려고 한다.”며 빙긋이 웃는다.

    영순이는 이제 걱정거리가 없다. 아픈 남편을 간호하며 오십까지 만이라도 옆에 있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 했는데 어느 날 보니까 나이 오십이 넘어서까지 남편이 함께 하고 있었다. 남편이 아팠던 덕분에 영순이는 남편에게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블랙리스트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원하는 직장에서 일해 본 적이 없었는데 건강이 허락하는 한 정년이 없이 평생 동안 일할 자리를 가졌다. 그래서 김영순은 하루하루가 즐겁다. 하긴 원하는 일터에서 몇 번 해고당한 아픈 경험을 가진 우리들에게 일자리는 살아있는 자긍심이고 기쁨이다. 그러니 택시 운전을 하는 김영순을 보는 나의 기쁨 또한 남다르다.

    하루 종일 운전대를 잡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힘이 드는데 주변 사람들은 김영순이에게 “걱정거리 하나 없는 사람으로 행복해 보인다.”며 “취미로 운전을 하느냐?”고 묻기도 한단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행복해 보이는 택시 기사, 이것이 김영순의 일하는 모습이다.

    김영순은 아무리 바빠도 나이 드신 어르신네들은 꼭 손을 잡고 타고 내리도록 도와드리고, 원하는 곳까지 반드시 모셔다 드린다. 짐이 많든 적든 기쁜 마음으로 실어드린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남편을 간호하기 위해 배운 호스피스 자격증을 가지고 손길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싶은 소망을 가슴에 담은 채, 오늘도 조그마한 도시 증평을 달리는 김영순에게 나는 힘찬 박수를 보낸다.

                                                      * * *

    * 아래 시는 필자가 2005년 경에 친구 김영순을 생각하면서 써내려간 시다.

    영순이

    꼭 다문 입술
    아직 소녀처럼 화장기 없는 불그레한 볼
    소리 없는 미소로 수다를 대신하던
    코스모스처럼 예쁜 영순이는
    거리를 달리는 택시운전수이다.

    30여 년 전
    동일방직에서 시작된 해고 인생으로
    같이 얻어맞고 함께 쫒겨나면서
    말없이 흘렸던
    절망의 눈물과 아픔을 하나로 모아
    나이 오십에 영순이는
    작은 도시를
    희망으로 달린다.

    지겹게 따라다니는 사납금과
    오만 가지 사연을 가진
    사람들을 태우고
    언제나 말없이
    거리를 달리는 그녀

    내 친구 영순이를 보면
    나는
    괜히 가슴이 으쓱거려진다.
    야산에서 갓 피어난 진달래를 보는 것처럼
    행복해진다.
    비에 씻긴 깨끗한 거리를 걷는 것 처럼
    경쾌해진다.

    이런 친구를 둔것도
    나에게는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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