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파 이론적 빈곤을 비판한다
    2011년 06월 08일 08:5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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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 쓰는 이유

이장규 동지의 글을 읽었다. 이장규 동지의 글은 내 글에 대한 비판으로 가장 존중할 만한 문제 제기를 했다. 벌써 두 분의 독자파에 대한 답변을 한 이후라 다시 내가 이장규 동지의 글에 대해 답변하는 것이 독자들을 피곤하게 할 것 같아 글쓰기가 주저된다.

그러나 이장규 동지의 글은, 통합파에 대한 의미 있는 비판을 제기하는 글이라 답변하지 않을 수 없다. 더불어 김현우 진보신당 녹색위원장 동지의 글도, 내용은 다르지만 같은 맥락의 문제 제기를 하고 있어 답변을 해 본다.

2. 계급분열이 새로운 주체 형성인가?

이장규 동지는 ‘독자파 동지들은 운동의 혁신 전망을 제시했지만 통합파 동지들은 그와 같은 혁신의 전망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혁신 내용으로서는 녹색사회당(보다 녹색으로! 보다 적색으로!)이라는 이념적 지표와 새로운 주체 형성으로서의 비정규직•청년세대 조직화를 들고 있다.

이와 같은 이장규 동지의 주장을 뒷받침 하듯, 김현우 녹색위원장은 최근 <레디앙> 기고 글 “다시 녹색사회당으로 가자”에서 신광영 교수의 한국 사회의 계급분석을 인용하고, 한국 노동자계급 구성의 다양성을 제기하며 이에 기초하여 급진적 노조조직 건설을 제시하고 있다. 이른바 새로운 주체형성 전략인 것이다.

김현우 녹색위원장은 생산의 유연화와 하청화로 인해 비정규직의 증대하고 노동자계급 내 이질성이 확대 되었지만 민주노총은 이렇게 이질적인 노동자들을 조직하는데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주장한다. 민주노총은 정규직화, 노령화로 인해 노조의 보수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민주노총을 부정하지 않지만 비정규직 및 하층 노동자에 대해서는 새로운 급진노총으로의 조직화를 주장한다.

그런데 나는 김현우 동지가 노동자 계급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계급론과 통계 자료를 제시하는 것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왜냐하면 “노동자계급이 하나가 아니다”라는 주장은 자본주의가 시작된 이래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들먹거리지 않아도 이것은 지나가는 개도 아는 이야기다. 만약 “노동자계급이 하나”였다면 이미 이 사회는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에 벌써 도달했을 것이다.

조금 깊이 들어가 보자. 자본의 축적과정은 필연적으로 자본의 가치구성을 고도화된다. 자본간 경쟁은 노동력 사용을 줄이고, 노동을 기계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이를 기술 편향적 축적이라 한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늘 상대적으로 잉여 상태이다. 더불어 자본간 경쟁으로 인해 ‘자본스톡/노동’의 비율이 자본마다 다르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은 다양한 형태로 균열된다.

노동자, 하나가 아닌 거 다 아는 상식

특히 지금과 같이 이윤율의 구조적 하락 국면에 접어들면, 자본 투자가 줄고(이를 자본파업이라 한다) 실업이 광범위하게 조직되면서 노동이 불안정해진다. 비정규직, 파트타임, 사내하청, 파견근로와과 같은 준 실업이 이 과정에서 광범위하게 조직된다.

자본은 특정 부분만 정규직화하고 나머지 노동을 분할시킴으로써, 배제된 노동층에게 장시간, 저임금과 같은 과잉 착취를 구조화 한다. 이것은 노동자간 임금 격차로 나타난다. 즉 마르크스가 말한 궁핍화란 노동자 개인이 소비하는 재화의 양이 줄어든다는 말이 아니고 이렇게 기술편향적 축적으로 인해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노동자계급의 불안정이 증대되는 것을 말한다.

김현우 동지가 ‘노동자는 하나가 아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통계자료를 장황하게 인용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김현우 동지를 지지하는 독자파들이나 모르면 모를까, 다른 이들은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모두 아는 사실을 위해 그가 왜 이렇게 노력할까?

독자파들의 코믹스런 주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김현우 동지는 노동자가 여러 집단으로 분류될 수 있으니 노총도 여려 개로 조직해도 된다고 주장한다. 김현우 동지 주장대로라면, 정규직 노총, 하청노동자 노총, 파트타임 노총이 있을 수 있겠다.

민주노총은 민주노총대로 나름의 역할을 하고 비정규직은 비정규직대로 새로운 노총을 조직하여 급진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다. 김은주 부대표도 자신은 비정규직을 조직하기 위해 ‘새노추’에 왔다고 주장했다. 참 모두들 장하시다.

그래서 조직도 여러 개 만들자? 기막힌 주장

그러나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마르크스는, 앞에서 보았듯이, 자본축적 과정에서 균열되고 분할된 노동자들을 단결시키기 위해 노조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노총을 통해 균열된 노동자를 결합하고, 노동자 계급 내부의 차이를 극복하는 과정이 바로 계급 형성 과정이다.

과거 레닌주의는 노조를 지도하고 노동자계급 형성을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것이 전위정당이라고 했다. 반면 사회운동노조는 노조가 주체가 된 사회운동을 통해 다양한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구성하고 계급적 차이를 극복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이 주체화 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후자의 입장에 동의한다.

그런데 독자파들의 코믹스러움은, 자본축적 과정에서 노동자 계급이 균열되니까 좌파도 노동자 계급을 분할해서 노총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있다. 민주노총이 정규직 노조 중심이니까 비정규직 중심으로 새로운 주체화를 하자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이 분할되었으니, 좌파가 이 분할을 계속 유지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정확히 말해 마르크스주의의 노동자계급 형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논리다. 노동자계급의 분할을 위해 새로운 노동자를 조직하자는 주장을 어떻게 좌파의 이름으로 주장하는가? 물론 한국노총처럼 우익의 논리를 주도하는 노조가 현존한다면 민주노조로 분리되는 것은 정당화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는 그런 상황은 아니지 않는가? 정말 이 이야기를 마르크스가 들었다면 기가 찰 노릇일 것이다. 하기사 마르크스도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좌파가 해야 할 것은 균열된 노동자의 상태를 극복하고 이들을 계급적으로 단결시킬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다. 즉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공동의 요구를 조직하고 이를 통해 계급적 지반을 확대하는 전략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 좌파의 임무다. 그런데 노동자가 하나가 아니니 노동자계급의 조직도 여러 개로 만들자는 말을 좌파들이 주장하니 정말 기막힐 노릇 아닌가?

3. 반사회주의적인 생태주의?

한발 더 나아가 보자. 언젠가 장석준 동지는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투쟁보다 노동시간 단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현우 동지도 같은 맥락의 주장을 한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자본주의적 시장과 재생산의 굴레를 벗어나, 작게 일하고, 일한 만큼 받으면서 자유롭게 사는 것이 노동해방이라고 주장한다.

더 작은 노동, 더 많은 자유가 더 적은 소비, 더 능동적인 삶을 만들 것이라는 점이다. 과거 장석준 동지의 글과 같은 맥락이다. 이것이 소위 독자파들이 내 놓은 혁신적 세계의 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작은 노동, 더 적은 임금은 장석준 동지나 김현우 동지가 주장팔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노동자들이 열심히 요구하지 않아도 자본가들이 알아서 노동자들에게 해준다. 그게 바로 비정규직화다.

더 나아가 정규직이 임금인상 투쟁 안하는 것이 진보이고 생태적인가?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앞에서 보았듯이, 기술편향적 축적과정은 자본의 가치구성을 고도화하고, 이는 다시 노동생산성을 증대시킨다. 노동생산성이 증대되는 가운데,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지 않으면, 국민소득 중 자본의 이윤배분율을 높이는 결과가 초래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노동생산성이 증대되는 과정에서 노동자의 임금이 상승하지 않으면 착취율이 증가한다는 말이다.

결국 장석준 동지와 김현우 동지가, 대기업 노조의 임금인상 투쟁을 비난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본의 착취율 증대를 선전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노동조합의 임금인상 투쟁은 노동생산성 증가에 따른 정당한 몫(적정한 임금 배분율)을 주장하는 것이지 노동자 계급이 탐욕에 물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노동자계급이 수도승인가?

노동조합의 임금투쟁을 비판하는 것은 자본의 착취율의 증대를 지지하는 것과 동일한 결과는 낳는다. 이것은 반마르크스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반사회주의적이다.

나는 물론 이 두 분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어떤 이론적 함의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판단된다. 생태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좋다. 그렇다고 자본의 착취율을 증대시키는 주장을 사회주의자들이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나 또한 동지들의 생태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지한다. 그러나 이것을 이유로 노조의 임금인상 투쟁을 비난하면서 해서는 안 된다. 생태 문제는 친환경적 도시계획, 에너지 효율적 건축구조, 자동차 생산 블록의 해체(자동차/철강•제철/석유화학 등), 재생에너지 체계의 확립, 강력한 사회적 재분배를 통한 과잉 소비주의의 극복 등 구조적 대안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

노동자들에게 자발적 가난을 수용하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노동자계급이 프란체스코파 수도회의 수도승들은 아니지 않는가?

우파들은 환경을 사유화하고 이를 시장거래의 대상으로 만들어서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려 한다. 이것이 코저 정리를 이용한 그 유명한 ‘탄소거래제’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적 대안은 당연히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율을 증가시키지 않는 가운데 생태적 대안을 조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능하다. 그래야 노동자운동과 생태운동의 연대한다.

동지들의 주장은 노동자운동과 생태운동의 적대성만을 구조화할 뿐이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에게 자발적 가난을 수용하고, 착취율을 증대시키는 것을 수용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노동자운동은 그것을 거절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동지들과 같은 생태주의자들은 이를 빌미로, 노동자들이 자연 착취에 공모하고 있다고 노동자계급을 비난할 것이다.

생태주의자들은 이미 이를 실천하고 있다. 앙드레 고르가 “노동자계급이여 안녕”이라고 했을 때 했던 주장이다. 고르는 동지들의 선배다. 비정규직 노조를 조직하겠다는 동지들의 ‘새로운 주체형성’ 프로젝트의 결과는 궁극적으로 “노동자계급이여 안녕”을 위한 중간 과정이라는 말이다. 다만 동지들은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순수한 열정에서 그렇게 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고르보다 비일관적이다.

4. 패권주의라는 잘못된 문제 설정

이장규 동지는 운동의 혁신을 위해 민주노동당을 탈당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독자파는 그래도 혁신에 대한 기본적 전망은 제시했지만 통합파는 그런 게 없다고 했다. 그러나 독자파들이 제시하는 전망은 얼마나 그럴듯한가? 앞에서 보았듯이 그들의 주장은 이론적 빈곤과 이상한 논리로 가득차 있다. 이것이 대안이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독자파의 논지를 반박한 것은 독자파의 주요 이론가들의 논리가 너무나 취약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그래도 혁신안이라고 하면 그대들은 이 혁신안을 갖고 계속 매진하길 바란다. 그러나 나의 입장에서 보자면, 독자파의 주장은 새로운 전망도, 새로운 주체 형성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이다. 이들의 주장은 독자파의 이론적 빈곤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을 따름이다.

더불어 이장규 동지는 통합파에게 자신들은 혁신안을 제시했는데, 독자파는 그런 전망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합의문이 비록 한계는 있을지라도 통합진보정당의 전망을 잘 구체화 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이 합의문에 주장된 내용만 잘 실천해도 나는 꽤나 큰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통합파가 독립된 전망이 없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한 가지만 더 지적한다. 독자파들은 이번 합의문이 패권주의에 대해 명확한 규정을 못했다고 비판한다. 더 나아가 통합되었을 때 좌파들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대안을 제시해 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논쟁의 구도를 이상한 쪽으로 전위시키는 것이다. 내가 독자파를 비판했을 때, 나는 단 한번도 “독자파에게 앞으로 당이 독자적으로 성장하고, 새로운 주체의 형성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보시오”라고 제시한 적이 없다. 실천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을 어떻게 현재 증명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질문 제기 자체가 우문이기 때문에 나는 그런 비판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설정의 전환

통합 후 당내에서 좌파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명확히 예견할 수 있다면 나도 좋겠다. 그러나 그런 계획을 명확히 제출하라는 것은 미래를 명확히 하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명확히 제출할 수 있겠는가? 물론 내가 명확하게 제출할 수 없다는 것이지, 다른 통합파들은 어떨지 잘 모르겠다. 내가 그들의 입장까지 대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이 문제에 관하여 한 가지만 덧붙이고자 한다. 우리가 선거를 위한 경쟁, 비례대표 누가 더 많을 것인가, 지역위원장을 누가할 것인가를 두고 자주파와 경쟁에 몰두한다면 패권의 문제는 다시 부각될지도 모른다. 즉 의회주의와 주류화를 두고 경쟁한다면 패권주의의 문제는 늘 불거질 수밖에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는 자주파와 좌파의 대결이 아니라 권력을 둘러싼 집단들의 싸움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다.

   
  ▲필자.

그러나 우리가 한미FTA에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인가? 노동운동의 연대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당내 생태주의자들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한반도 평화구축을 위한 평화운동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자주파와 경쟁한다면 내 생각에는 패권주의의 문제는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운동을 위한 경쟁에서 그들과 협력하면 패권의 문제는 그렇게 심각하게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문제설정을 전환해 보자는 말이다. 패권주의에 집착하지 말고 자주파와 어떻게 함께 투쟁할 것인가를 고민해 보자는 말이다.

이장규 동지는 우리 당의 미래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좌파가 사회운동을 중심으로 자신의 어젠다를 조직하고 이를 자주파와 교류하며 힘을 강화한다면 패권주의의 문제를 넘어 공동의 투쟁전선을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좌파의 역할은 바로 이런 운동의 조건과 가능성을 분석하고 투쟁하는 데 앞장서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전혀 다른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패권주의의 문제는 근본적인 문제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동지들의 문제 제기에 답은 되지 않겠지만 진지하게 고민해 주길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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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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