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나는 지금 할 말이 없다"
    2011년 05월 23일 04:1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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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할 말이 없다, 라는 말로 글을 시작한다는 건 역시 아무래도 이상한 것이다. 표현이 생경해서 그런 것일까? 한 번 더 써본다. 솔직히 할 말이 없다. 역시 이상하다. 지금 나는 “청년 세대의 권익을 위해 행동하고 의견을 대변하는”, “청년노동조합”이라는 청년유니온에 대해 쓰기로 했다.

거기다 으레 따라붙는 ‘(현재로선) 한국에 하나밖에 없는’, ‘(한국) 최초의’ 같은 수사를 고려하자면, 어찌되었건 어머니 가랑이 사이로 쑥 나온 지 어언 스물다섯 해, 비록 노안이라는 루머에 시달리고 있으나 청년 세대에 속하지 못할 이유가 하등 없는 내가 “솔직히 할 말이 없다”라 한다면 뭐랄까… 어느 쪽이든 간 왠지 민망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몰라 몰라, 민망하다고.

   
  ▲필자의 두리반 공연모습.(사진=뉴타운컬쳐파티) 

우린 언제까지 서로 민망해야 할까?

왠지 모를 민망함을 무릅쓰고 다시 글을 시작해보자. 하지만 솔직히 할 말이 없다. 최소한 이 글을 쓰는 지금 시점에서 나의 이 태도가 바뀔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그렇다면 입구를 달리 가보자. “왜 솔직히 할 말이 없는가?” 내지는 “솔직히 할 말이 없는 이유는 뭔가?”

조금 우스운 입구이기는 하지만, 왠지 이쪽으론 들어서도 될 것 같다. 처음부터 할 말이 없었는가? 그렇지 않다면, 언제부터 할 말이 없어졌는가? 할 말은 왜 없어졌나? 그 과정은 어떻게 되는가? 비록 할 말은 없으되, 할 말이 없는 이유에 대해선 왠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좋다. 나는 이 길로 들어서기로 했다.

시초. 솔직히 할 말이 없다는 것을 굳이 공개적으로 밝힐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고 릴레이에 대한 의뢰가 들어왔을 당시만 해도, 나는 비록 조합원은 아닌 신분에서지만 내 처지에서도 뭔가 할 말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여기서 내 처지란? 아실 분은 아시겠으나 나는 기본적으론 음악을 업으로 삼고 있는 자, 즉 음악가다. 물론 메인스트림에서 성공한 이는 아닌 지극히 언더그라운드적인 음악가인지라 그것만으론 먹고 살 수 없기에 이렇게 여기저기 글을 기고하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악기를 가르치기도 하고, 공연을 기획하기도 하고, 뭐 대체로 이 정도.

그러고 보면 소규모 음악가들의 생활협동조합을 지향하는 자립음악생산자조합 같은 것도 친구들과 함께 만들어가고 있고, 철거농성장에서 맨날 죽 치고 이런저런 데모나 하면서 놀고 있는 것을 보자면 우리가 흔히 ‘활동가’라 부를 만한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것 같기도 하다. 먹고 사는 양태를 보자면 대략 ‘문화생산자’ 더하기 ‘좌빨’. 나이마저 20대 중반이다보니 청년유니온에 관심 가지지 않을 이유도 없고, 태도가 없을 이유도 없던 것이었다.

음악가 입장에서 얘기하는 게 맞나?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의뢰 받고선 며칠 뒤부터 도대체 무얼 써야하나? 골이 지끈지끈 아파오던 것이다.

하나, 음악가의 입장에서 청년유니온에 대해 어떻게 코멘트 하는 것이 적절한가 판단이 서질 않았던 까닭에. 둘, 청년유니온이 문화생산자, 혹은 (청년)문화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어떠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던 까닭에. 의뢰를 받은 시점부터 몇 주간 나는 이러한 이유로 여러 애로를 겪었으며, 결과적으론 솔직하게 할 말을 찾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보다 단순한 두 번째부터. 말했듯 나는 청년유니온이 ‘문화’라는 영역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청년유니온 공식 카페에 들어가 보면 가장 위쪽의 이미지엔 “청년층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지위 향상을 도모”한다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

문제는 이러한 문구는 실은 아무런 의미값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번 릴레이 프로젝트의 기고자 중 한 명인 청년유니온 조성주 정책팀장도 지난 글에서 “…다양한 청년운동, 진보운동과 청년유니온이 어디서 어떻게 만나고 접점을 만들어나갈 것인가(…) 환경, 생태, 여성주의, 에너지, 문화 등 너무나도 중요하고 긴박한 문제들과 청년유니온은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또 그것이 노동운동이 어떻게 다른 운동들과 조화될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실험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라 적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자문한 뒤, 그에 대한 최소한의 방향도 제시하지 않은 채 글을 마치고 있다는 점이다. 조금 시니컬하게 말하자면 이를 단순한 인사치레로 치부해도 크게 틀리진 않을 것이다.

   
  ▲공연 중인 필자.(사진=뉴타운컬쳐파티) 

그들은 너무 적게 발언하고 있는 거 아닐까?

그러나 한편으론 인사치레라도 어디야,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청년유니온 카페를 포함하여, 여러 루트를 통하여 찾아보았으나, 나는 청년유니온이 청년문화건 문화 전반이건 (조직 내에 문화팀이 버젓이 있음에도) 책임 있게 발언한 경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쯤에선 조금 우울해할 수도 있는 거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다. ‘문화’라는 영역에 대해 청년유니온은 최소한 공적으론 어떠한 구체적인 의견을 제시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고로, 이에 대해 코멘트를 한다는 행위 자체가 민망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히 문화 영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어떨까?

어쩌면 청년유니온은 환경, 생태, 여성주의, 에너지는 물론 심지어는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해서도 너무 ‘적게’ 발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전 김슷캇의 릴레이 기고 "우리의 공통성은 어디에 있는가?"에서도 논란이 된 바이나, 이를테면 “우리는 ~한 사회를 위해 ~라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정도의 가이드라인도 대중에게 제시하지 못한다면 인적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한 작은 공동체까지는 모르되 신뢰감 있는 조직으로 성장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말했듯, 뭔가 코멘트를 하는 행위 자체가 민망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첫 고민에 대해서도 풀어내봐야겠다. 이는 조금 더 위험한 질문일 수 있는데 “청년유니온은 음악가를 정말로 환대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묻는 것은 음악을 업으로 삼고 ‘음악가’란 팻말을 붙이고 다니는 나 자신도 ‘음악가=노동자’라는 명제에 주저하는 까닭에서다.

음악가는 노동자인가?

물론 총체적인 음악 산업을 놓고 보자면 분명 그 내부에 확실히 ‘노동자’라 볼 수 있는 경우들도 적지 않겠으나, 대부분의 음악가는 엄밀히 따지자면 ‘자영업자’에 오히려 더욱 가까울 것이다(하긴 사회가 꼭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두 계급만 존재한다 생각하는 것도 병이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를 뒤집어, 역으로 청년유니온이 문화 내지는 문화생산자에 대해 딱히 입장을 내지 않는 것이 이해가 가는 구석도 있다. 원칙적으로 청년유니온은 청년 노동조합을 표방하고 있는 탓에 ‘노동자성’이 모호한 영역에 대해서 굳이 발언할 이유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했을 때, 그렇다면 나는 음악가로서 청년유니온을 지지할 이유가 있는가? 이쪽에서도 역시 모호하긴 마찬가지다.

이 경우 청년유니온이 취할 수 있는 방향은 크게 두 갈래다. 하나. 공통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연대를 조직한다. 다른 하나. (연대 따위) 없던 일로 한다. 나는 당연히 전자가 청년유니온에게 유리하다 본다. 자영업자에도 영세 자영업자가 있고, 상대적으로 부유한 자영업자가 있듯이 음악가에도 영세한 규모의 음악가가 있고 그보다 사정이 나은 음악가 있다.

이런 경우, 비록 “음악가=노동자”까지는 주장하지 못 한다 할지라도 영세한 규모의 음악가들에겐 최소한 “노동자 계급과 연대하는 것이 음악가 계급에게도 더욱 좋은 일이다”라는 것을 설득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게다가 영세 자영업자 계층이라면 노동 계급의 그것과는 다소 형태가 다를지언정 분명히 ‘노동’의 관점에서 풀어나가야 할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청년유니온에 거는 기대

이를테면 최근 음악계와 문화예술계에선 음악가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고 이진원, 신예 시나리오 작가/감독 고 최고은의 안타까운 죽음과 더불어 꽤 큰 규모의 음악 페스티벌에서 공모를 통해 무대에 오르게 된 일부 음악가들에게 교통비만을 지급하려다 크게 문제가 되고 이런 관행에 대항하는 페스티벌이 조직되기도 하는 등, 음악가의 ‘노동자성’과 문화예술분야 종사자의 사회적 안전망에 대해 고민하는 흐름들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시점이다.

아무리 ‘자영업자’와 ‘노동자’라는 계급적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상황과 처지에 따라 공통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포인트가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음악가/문화생산자로서 청년유니온에 기대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 지난 릴레이 기고에서 김민하(이상한 모자)는 “청년유니온이 기존의 조직노동운동이 포괄하지 못하는 청년실업 등의 문제를 노동운동의 관점에서 풀기 위해 조직된 노동조합”이라 쓴 바 있고 나 역시 비슷하게 인식하고 있다.

다만 ‘포괄하지 못하는’보다는 ‘배제하고 있던’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포괄하지 못하는’은 왠지 ‘조직노동운동이 포괄할 수 있었으되, 포괄하지 못했던’이라는 뉘앙스다.

굳이 ‘배제하고 있던’이라 쓰고 싶은 것은 왠지 청년유니온이라면, 오히려 현재까지의 조직노동운동에선 처음부터 배제되어 상상할 수 없던 영역에서까지 ‘노동’의 관점으로 개입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그래서 현재의 ‘노동자 운동’을 질적으로 혁신해 사회의 전반적인─환경, 생태, 여성주의, 에너지, 문화를 포함한─영역에서 ‘노동’과 ‘계급’의 문제의식을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논쟁이 경합하는 청년유니온

특히 전통적인 노동계급이 ‘사회 내에서 배제된 자들(몫 없는 자들)’과 반드시 일치하고 있진 않는, 고로 ‘노동’과 ‘계급’을 고정된 진리로서가 아니라 가열찬 논쟁과 주장들의 경합을 요구하는 투쟁의 장(field)으로서 고민해야 되는 지금의 시점에서 청년유니온의 역할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비록 음악가/문화생산자의 입장에서 글을 시작하기는 했으나 이미 문화의 영역을 넘어선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론 사회의 전반적인 디자인 자체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다.

“어떤 디자인의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물론 아주 무게가 나가는 질문이고, 이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청년유니온이 아직 충분히 안정화되지 않은 신생 조직이고, 따라서 역량 한계 등의 문제로 완전히 만족스러운 어떤 대안을 제시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임을 역시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차근차근이라도 준비해나가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은 다르다. 또 내부에서 논의하는 것과 공적인 담론의 영역에서 논의하는 것은 다르다. 조성주 정책팀장도 말하고 있듯, 사실 청년유니온의 논의가 퍼져나갈 수 있는 영역은 결코 작지 않다. 문제는 역시 너무 ‘적게’ 발언하고 있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현 시점에 양/질 모든 측면에서 부족하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발언하지도 않을 것인가? 오히려 청년노동조합이라면 가장 적극적으로 다양한 상(像)을 제시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오히려 그런 다양한 상들이 서로 논쟁을 하고 경합하는 장이 바로 청년유니온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유의미한 대안들을 산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논쟁이다. 아직 초기인지라 조직이 안정화 되지 않았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 할 수도 있겠으나 되려 안정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논의나 논쟁이 가능하기도 하다(또한 ‘안정화 될 수 있다’는 자체가 하나의 도그마이기도 하다. 차라리 ‘유연화 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어찌되었건 나는 영세 자영업자고 청년유니온은 노동조합이다. 내가 내 주위의 친구들과 함께 낼 수 있는 답과 청년유니온이 내는 답은 다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에 대한 답을 준비하는 과정을 생략하고선 도무지 도약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할 말 없는 것과 감정 있는 것

…라고 여기까지 썼다. 라지만 나는 이쯤에서 다시 민망하기 이를 데 없어진다. 말했듯 청년유니온에선 아직 이에 대해 발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반칙이다. 그렇다면 나는 반칙왕이다.

잠깐 옆길로 새자. 영화 <반칙왕>에서 대호(송강호)는 술에 취해 집에 들어가고 있는 상사에게 달려들다 그만 자빠지고 만다. 영화는 코가 깨졌는지 턱이 깨졌는지 혹은 자빠지긴 자빠진 건지 가타부타 말이 없이 그 순간 끝난다. 영화는 끝났으나 결론이 어떻게 났을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무운을 빌고만 싶다.

내게도 마찬가지다. 방금 나는 자빠졌다. 자빠졌는데, 청년유니온이 일으켜 세워줄지 쌩까고 갈지 침을 뱉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진짜 민망한 건 뒤에서 누가 자빠진 줄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청년유니온을 지켜보았을 때, 매사에 조심하는 나머지 누가 자빠진 줄 알면서도 불똥 튀길까봐 그냥 조용히 걸어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꼭 범생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결단을 내리는 것도 중요하다. 청년유니온에 있어, 그 시점이 머지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 나는 이 글을 적으며 부러 구체적인─이를테면 정책이라든지─이야기들은 어지간하면 제외시켰다. 괜히 초장부터 체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앵클어택을 할망정 백태클까지 걸고 싶진 않은 까닭에서다.

다만 다음에 다시 이런 기회가 있을 때, 내가 “(청년유니온에) 솔직히 감정 있다”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편이 최소한 “솔직히 할 말이 없다”로 시작하는 것보단 아무래도 낫지 않겠는가. 우리는 언제까지 서로 민망해하기만 해야 할까? 슬슬 속도를 붙일 필요가 있다. 팟, 팟, 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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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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