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비아는 왜 격렬한가?
        2011년 02월 23일 09:57 오전

    Print Friendly

    ‘중동혁명’이 이번에는 리비아에서 그 가장 격렬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현재 리비아는 정부군의 무자비한 공격으로 시민들의 희생이 속출하면서 2011년에 발생한 중동 국가들의 사회적 격동 가운데 가장 큰 유혈사태를 빚고 있다.

    리비아 사태의 속살

    그런데도 주류 언론들은 이번 리비아 사태의 배경에 대해 단순히 중동혁명의 파급이나 가다피 정권의 독재 혹은 리비아의 해묵은 지역간 대립 정도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다른 중동 국가들과 다르게 대표적인 반미국가 가운데 하나라고 인식되던 리비아에서 왜 이런 격렬한 대립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충분한 해명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이 같은 격렬한 충돌을 위해하기 위해선 리비아에 대해 겉으로 알려진 이미지가 아니라 그 속살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부군의 잔혹한 진압에 전투를 벌여 벵가지를 해방시킨 리비아 시민들.

    리비아는 가다피 대령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그는 지난 1969년에 27살의 나이로 당시 노쇠한 이드리스 리비아 국왕이 터키에서 의료 치료차 머물고 있던 틈을 노려 쿠데타에 성공했다. 당시 가다피는 이집트의 나세르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의 성공에 고무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이때부터 리비아는 가다피의 ‘리비아식 사회주의’의 길로 들어선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리비아도 주요한 수입원은 역시 석유였다. 이드리스 국왕이 물러날 당시에 리비아는 하루에 3백만 배럴의 석유를 생산하는 국가였는데, 문제는 이에 대한 대가로 리비아가 받는 수입이 보잘것없었다는 점이다.

    대중들, 가다피 쿠데타를 묵인하다

    그럼에도 이드리스 국왕은 이런 수입에 바탕해서 사치를 누렸고 대중들은 여전히 빈곤을 벗어날 수 없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중의 불만 때문에 리비아 대중들은 가다피의 쿠데타를 묵인했던 것이다.

    가다피는 쿠데타 성공 이후에 몇가지 급진적인 조치를 도입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리비아는 역사적으로 오토만 제국에 뒤이어 이탈리아의 식민지배를 받았기에 사회의 전반적인 개발 상태가 아주 낙후했기 때문이다.

    가다피는 기본적인 차원의 사회적 개발을 위해 정부가 직접 석유지대를 통제하면서 수출시 가격협상에서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 노력했다. 이렇게 국내에 들어온 석유 수입은 각종 사회복지에 사용되었는데 주되게는 주택보장과 의료보장에 충당되었다.

    토지 재분배도 이루어졌으며, 가다피 정부는 모든 거시 경제 정책에 개입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나세르주의자인 가다피는 리비아가 현대적인 세속주의 정치전통에 서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배격한다면서 리비아를 포함한 아랍 세계가 정치와 경제 모든 면에서 이슬람주의의 가치에 바탕하여 통일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가다피의 생각도 극적인 변화를 맞게 되었다. 그 계기는 다름아닌 지난 1993년에 그 자신이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에게서 암살당할 뻔한 일 때문이었다. 더구나 인접국인 알제리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이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가 군부 쿠데타로 실각하면서 양측간의 내전이 발생했다.

    가다피의 극적인 변화

    결국, 가다피가 내세웠던 정치적 이슬람주의는 이내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새롭게 발호하는 알-카에다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이 때문에 지난 2001년 9/11 테러 사건 이후, 가다피는 재빨리 미국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던 것이다.

    2002년에 리비아 외무장관은 리비아 정부가 반테러 분야에서 미국과 긴밀히 공조하고 있다고 인정했고, 몇 달 뒤에는 가다피를 이을 유력한 계승 후보 가운데 하나였던 가다피의 아들, 사이프 알 이슬람 가다피(Saif al-Islam al-Qaddafi)도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진행 중이던 반테러 전쟁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가다피 대령 역시 당시에 "테러라는 현상은 단지 미국 한 국가의 우려 사항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의 우려 사항이다. 미국은 이런 싸움을 혼자서 벌일 수 없다."고 말했다. 이는 그동안의 가다피가 가지고 있던 반제국주의, 아랍 민족주의적 이미지에 비추어보자면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지난 2009년 5월, 아즈다비야(Ajdabia)에서 거행된 이븐 쉐이크 알 리비(Ibn Sheikh al-Libi)의 장례식에 수 천명의 인파가 몰린 것을 목도한 가디피는 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한 편집증적인 두려움을 더 크게 가지게 되었다.

    이븐 쉐이크 알 리비는 지난 2001년 파키스탄에서 체포되어 미군이 수감 중에 사망했는데, 당시 리비아의 가다피는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군에 저항해 싸우고 있던 리비아 출신 전사들을 체포하는데 미국과 공모했다. 이런 그에 대한 추모에 리비아 대중들이 상당한 정도의 규모로 몰렸다는 것은 그의 정권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가다피의 모순과 대중의 배신감

    그러나, 가다피가 한편으로는 반제아랍민족주의적 외양과 수사를 사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미국의 반테러전쟁에 협력했던 모순적인 양상이 가다피 정권에 대해 느낀 대중의 배신감을 전부 설명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경제문제가 개입되어있다. 그러나, 이것은 주류 언론들이 보도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성격의 경제 문제였다. 

       
      ▲지난 2002년 7월 이집트를 방문한 가다피의 손을 다정하게 쥐고 반겨주고 있는 무바라크. 뒤에는 가다피의 그 유명한 여성경호부대원이 보인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가다피 정권은 첫번째 위기를 맞았다. 석유 수출로 벌어들인 수입의 과잉 부분을 방만하게 사용한 결과, 경제가 혼란에 빠지고 경기침체를 맞이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자라났지만, 가다피를 이런 정치적 곤경에서 살려준 것은 엉뚱하게도 미국이었다.

    1986년에 당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카다피의 첩보원들이 서독에 있는 미군 장교 클럽에 시한폭탄을 설치하여 다수의 미군들이 희생당했다고 비난하면서, 그 보복으로 리비아의 수도인 트리폴리와 벵가지를 폭격하여 200명의 민간인들을 사망케했다. 여기에 덧붙여 미국은 리비아에 대해 경제적 제재를 가하기도 했다.(당시 미군 폭격기는 가다피가 살던 수도 트리폴리의 리비아 대통령 관저를 폭격했고, 이 와중에 가다피의 15개월된 수양딸이 목숨을 잃었다.)

    이런 미국의 군사적 공격에 리비아 국민들은 가다피에 대한 불만을 잠시 접어두고 일단 가다피를 옹호했다. 그런데, 가다피는 다음 해인 1987년부터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는데, 그는 이러한 이런 자신의 정책을 포장하기 위하여 ‘대중 자본주의'(popular capitalism)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가다피,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을 선택하다

    이해부터 그 이전까지 리비아 정부의 기본적인 경제정책이었던 수입대체 경제 정책이 폐기되고, 농업과 산업무문에서 국제통화기금의 매뉴얼에 따른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이 도입되었다. 1988년 중반에는 수입과 수출 쿼터를 모두 폐지하면서 리비아 경제를 세계 경제에 더 한층 개방했다.

    이런 그의 경제 정책으로 인해 큰 손해를 보게된 농민과 노동자들, 자영업자들의 불만들이 쌓여갔지만, 이번에도 그를 살려준 것은 역시 외부의 압력 때문이었다. 즉, 지난 1992년에 유엔이 리비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가했는데, 이러한 대외적 압력과 위기 상황으로 인해 가다피 정권은 대중들이 가진 불만의 예봉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을 둘러싸고 벌어진 리비아 정부 내의 분열과 갈등도 이런 위기 앞에 잠시 주춤했고, 가다피의 리더십은 다시금 그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가다피의 용인하에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을 가장 앞장서 밀어붙인 사람은 소크리 가넴(Shokri Ghanem)인데, 그는 지난 2006년까지 총리로 지내다가 리비아 국영석유공사장(National Oil Corporation)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이 자리에 취임하자마자 석유 부문으로 외국 투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아주 파격적인 정책들을 펼쳤는데, 그러한 협력 대상으로는 영국 석유기업인 BP, 미국 석유회사인 옥시덴탈(Occidental Petroleum)에서부터 중국 석유공사(China National Petroleum)까지 아주 다양했다.

    핵무기 개발 포기와 서방과 타협

    그는 이들 회사들과 석유 탐사와 생산 관련 협정들을 서둘러 맺었다. 서방 정치인들도 이런 과정에 협력했는데, 대표적으로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과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현 총리가 그랬다. 이러한 물밑 거래 때문에 영국 정부가 영국 스코틀랜드 상공 미국 민간여객기 폭파 사건의 리비아 용의자들을 국제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리비아로 인도했던 것이다.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총리 역시 이런 거래관계 때문에 지난 2008년 리비아의 반식민지투쟁의 영웅인 오마르 알 무크타르의 손자 앞에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 대가로 50억 달러를 리비아에 지불했다. 당시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는 이런 제스처를 통해 "리비아로부터 들어오는 불법 이민자들을 막고, 석유를 더 많이 들여올 수 있다"고 말했다.

    가다피 정권이 추진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개혁 때문에 리비아 의회조차 그 폐해를 지적하고 나설 정도였는데, 지난 2000년 초반부터 가다피 정권이 국유기업들을 민영화하고 자유무역 지대를 마구 창설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외국계 회사들이 비판의 표적이 되었는데, 이런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가다피가 유엔 제재를 해제하고 유럽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정치적 주권을 지나치게 양보한다고도 성토했다.(리비아가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고 서방과 타협한 것도 이런 과정의 일부였다)

    리비아 국회 내에서 대중의 불만을 좌시할 수 없었던 일부 사람들이 이런 가다피의 신자유주의적 경제 개혁 속도를 줄여보려고 애썼지만, 가다피 정권은 이에 냉담한 태도를 취했다. 가다피 정부와 협력 관계에 있던 IMF 역시 이런 반발을 겨냥하여 지난 2006년 보고서에서 "시장 경제를 발전시키려는 (리비아 내의) 진전이 더뎌지고, 가다서다를 반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IMF와 협력

    이 점에서 가다피의 아들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도하고 있는 것도 과장된 면이 있다. 유력한 계승자 가운데 하나로 지목된 아들 사피(Saif)는 주류 언론에서 온건파로 분류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부시의 반테러 전쟁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사람인데가가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 도입이라는 면에서는 다른 아들들보다 선두주자였다.

    무엇보다 그는 최근에 리비아 TV에 나와 시위대를 잔혹한 진압으로 협박했던 당사자이다. 가다피의 또다른 아들인 무아타심(Muatassim)은 강경파로 분류되지만, 그 역시 수출자유무역지대 창설에 누구보다 열성일 정도로 신자유주의의 전도사이다.

    두 형제가 앙숙인 것마냥 보도하지만, 이 두 형제는 실상 신자유주의적 경제 개혁이라는 공통의 목표에서는 다를 바가 없고, 단지 그 속도와 폭을 놓고 다투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공을 자신이 획득하여 리비아 통치계급 내에서의 우위를 확보, 후계자로 인정받고자 할 뿐이다.

    또 하나 다뤄야 할 것은 리비아의 지역 갈등이다. 주류 언론들은 주되게 이들 지역이 부족 전통 사회이자, 퇴위한 국왕의 출신 지역이란 점, 그리고 이 지역이 받은 소외에서 가다피 정권에 대한 민심 이반의 원인을 찾는다.

    이런 지적이 틀린 지적은 아니지만, 덧붙여질 부분도 있다. 앞서 파키스탄에서 체포되어 사망한 알 리비(al-Libi)의 고향이기도 한 아즈다비야(Ajdabia)도 리비아 동부 지역, 즉, 키레나이카에 속하며 이번 리비아 내전의 격렬한 충돌의 중심지가 된 벵가지도 이 지역에 속한다.

    이들 지역에서 한 이슬람 전사의 사망에 많은 추모객이 모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리비아 동부 지역은 원래 리비아 내에서도 외국 점령군에 강력하게 저항해온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이 지역의 부족들이 바로 오토만 제국과 그 다음에는 이탈리아의 점령에 대항해 가장 영웅적으로 싸운 사람들이다.

    이런 저항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바로 앞서 베를루스코니를 언급할 때 거론한 오마르 알 무크타르(Omar al-Mukhtar)다. 그는 현재 리비아 10 디나르 지폐에도 얼굴이 그려져있는 인물이기도 한데, 그는 지난 1981년 고(故) 안소니 퀸이 주연한 영화, <사막의 라이언(The Lion of the Desert)>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동부의 불만과 전체 대중의 불만

    가다피의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이 속도를 더해가면서 외국계 회사들의 권력과 전횡이 심각해지고 있던 것이 이들에게 달갑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란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더구나 과거 식민 종주국이었던 이탈리아가 석유와 관련되어 리비아 사회에 재진입했던 것이나, 불법 입국하려던 리비아인들을 이탈리아가 강제 송환하고 이에 리비아 가다피 정부가 협력했던 것도 정부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확신시키는데 한 몫했다.

    국가 수입을 재분배하고 각종 기초 정책적 차원에서 동부를 홀대하면서 지역간의 분열을 이용, 가다피가 정치권력을 유지하려한 것도 불만의 원인이었다. 이 때문에 가다피는 사회적 불만을 차단하고자 이들 지역의 부족들이 지닌 권위를 전복하려 끊임없이 기도해왔다.

    그럼에도 현재의 상황이 동부와 서부간의 지역적 대립만이 아니라 전국적인 차원의 저항으로 발전할 조짐도 보이는 것은 동부의 불만과 그동안의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으로 소외된 리비아 전체 대중의 불만 사이에 연결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다피 대령이 내세운 반제아랍민족주의적 수사와 미국의 반테러전쟁 및 신자유주의간의 정략결혼이 낳은 사회적 파탄의 결과인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나세르에서 시작된 아랍민족주의가 사다트에 이르러 제국주의와의 타협으로 귀결되고, 이어 무바라크에 이르러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으로 그 극단을 달리다가 사회적 폭발에 이르렀다.

    반면에 리비아에서는 이집트 대통령 세 명이 보여준 그 모든 정치적 변신과 타협, 배신을 가다피 한 명이 다 보여주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충격과 자극

       
      ▲가다피. 나세르와 사다트, 무바라크를 한 몸에 표현한 인물.

    그렇다면 향후 리비아 내전이 미칠 영향은 무엇일까? 그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지만,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기타 중동 국가들과 달리 리비아의 시민들이 정부의 잔혹한 진압에 저항해 무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미 다수의 도시들이 시민과 시민에 동조하는 군대의 일부에 장악된 상태인 듯 보인다. 이는 2011년에 발생한 중동 지역 민주화운동에서 그 사회적 도전의 수위가 가장 격렬한 예에 속한다.

    그러한 격렬한 사회적 동원과 체제에 대한 도전 과정에서 리비아 시민들과 노동자, 농민들의 각성과 조직력은 기타 이집트나 바레인, 튀니지와는 또다른 양상을 띄면서 전혀 다른 차원의 충격과 자극을 던질 수 있다.

    즉, 이집트의 평화적 시위를 통한 정부 퇴진과 연이은 중동 국가들의 벤치마킹이 1단계라면, 이집트 노동자들의 연이은 파업은 2단계라고 할 수 있다. 바레인 같은 경우 노동자들이 일시적으로 총파업을 하기도 했다.

    지금 리비아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무장 항쟁-단지 알 카에다의 소수 무장저항이 아니라 80년 광주항쟁 같은 대중적 무장-은 3단계로 새로운 차원의 자극을 중동에게 선사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류의 충돌은 중동 지역 통치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종류의 사회적 상황이기도 한데, 리비아의 상황은 중동 지역 통치자들에게 더 한층의 공포와 두려움을 안길 것이 분명하다.

    중동 지역 엘리트들의 공포와 분열

    이집트에서의 군부의 중립적 태도에 반발하여 바레인에서는 과감하게 군부의 무력을 행사, 유혈진압을 했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국제적 비난과 바레인 정치 엘리트들내의 분열, 그리고 대중의 반발이었다. 이 때문에 바레인 정부는 이내 유화책으로 돌아섰다.

    이런 바레인의 사례를 보고 놀란 중동 지역 국가들은 바레인같은 결과가 나타날까봐 다시금 저마다 이런저런 유화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자기에게 더 큰 위협이 된다고 본 리비아 정부는 바레인보다 더 압도적인 무력을 사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바레인보다 더 큰 차원의 ‘부작용’, 즉 시민들의 무력 항쟁이라는 결과를 낳아버렸다. 이런 중동 지역 국가들의 사태 대처를 둘러싼 강-온 처방 사이의 끈임없는 진자운동은 중동 국가들의 엘리트들을 더 한층의 공포와 분열, 혼란으로 밀어넣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중동 지역 한 국가의 민주주의 이행 여부는 단지 한 국가 수준으로 파악할 수 없는 구조가 되버린 면이 있다. 그것은 인근 국가들의 대응과 그에 대한 시민들의 대응이 낳는 정치적, 사회적 파장이 즉각적으로 인접한 국가들에도 영향을 미치는 일종의 근린(近隣)연관 속에서 파악해야 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당장 리비아의 내전 상황을 보면서 이집트 군부는 이집트 민주시위대와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군부의 무력 행사가 어떠한 결과를 낳을지 아주 현실감있게 목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