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를 둘러싼 참혹한 전투장에서
    2011년 02월 16일 09:2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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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진보신당 대의원 선거에서 한 후보가 낙태 단속 찬성 및 근절을 유일한 공약으로 걸고 나온 사건이 발생했다. 이와 별개로 다른 한 후보는 낙태에 대해서는 옹호하면서도 사형제 강화와 체벌 강화를 걸었다. 이 사건은 진보신당 내에서 낙태를 둘러싼 문제가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를 드러내는 중요한 단면이다.

사형제-체벌 찬성하는 후보도

사건을 접하면서 참으로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우선 최근 낙태 관련 단속 강화 등 반동적 흐름에 부족하나마 최소한 진보정당으로서의 개입과 맞대응을 해야 할 시기에 오히려 당 내에서는 오히려 낙태권 및 재생산권을 보장하는 강령을 수정해야 한다는 움직임에 부딪쳐야 하는 상황이 아이러니했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는 이런 움직임에 대해 어떻게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당내 주요 활동가들 사이에 공감대나 관심이 현저하게 부족함을 계속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여타 정당 전술과 전략에 대해서는 피 터지게 논쟁해도 여성의 낙태권 및 재생산권에 관해서는 오히려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방기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도리어 한국사회의 진보정당이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비단 직접적이고도 적극적으로 낙태 단속을 주장하는 일부 당원들만이 현재 문제인 것이 아니다. 그 동안 내부적으로 진보정당이 ‘생명’을 부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어렵다는 일부 중견 활동가의 난색, 혹은 ‘생명’을 부정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 남성과 여성 모두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는 의견들도 줄곧 접한 바 있다.

이들 의견을 접하면서 절망이 좀 더 깊어졌음을 고백해야겠다. 우선 당이 현재의 강령 수준으로 낙태 관련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 가능할지라도 그건 당 내 낙태 관련 논쟁을 비껴가거나 무시하는 선에서나 가능하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당이 낙태 관련 주체적인 개입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낙태 이슈에 관해서 당은 전위도 무엇도 아니며 다만 참혹한 ‘전투장’일뿐이었다. 그리고 ‘진보’와 ‘낙태’의 외설스럽고 앙상한 관계가 드러난 바로 그 현장이기도 하였다. 문제는 낙태 단속을 주장하는 일부 당원들이 아니라 그들이 의견이 통용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강령 수준의 대응도 못하는 현재 당의 면면이다. 그리고 소위 낙태 이슈에 관해서 조금도 진취적이거나 한발 앞선 진보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한국 사회 진보 이데올로기의 앙상함,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국가에 의한 음성적 낙태 권장된 적도

혹자는 미국이나 유럽 등의 진보정당에서 낙태 관련 이슈가 진보-보수를 가르는 핵심적 기준이었음을 언급하며 한국 사회 진보정당 역시 그 수준을 유지할 것을 기대하기도 한다. 이 부분은 현재 진보신당의 강령에도 반영되어 있고, 당 내 여성주의자들이 현재 정당에 기대하는 최소한의 수준이기도 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기대는 아직 순진하거나 근거 없는 낙관인 것으로 여겨진다.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낙태 반동 준동은 서구, 특히 미국 사회의 생명권 vs 선택권의 구도를 한국 사회에 가지고 온 것이지만, 한국 사회의 낙태를 둘러싼 구도는 그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서구와 같이 소위 ‘생명권’을 근거로 낙태를 부정해 왔던 사회가 아니라 국가와 가부장이 함께 출산 조절 계획의 일환으로 낙태를 권장해 왔던 사회이다. 대놓고 "낙태하세요!"라고 외치지 않았을 뿐 음성적으로 낙태는 널리 권장, 시행되어 왔다.

다만 현재 소위 ‘저출산 문제’로 인해 더 이상 국가가 낙태를 권장하거나 ‘관용’의 대상으로 보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이중적 국가의 행태에 있어 생명권의 운운은 다만 몰염치한 핑계일 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국의 진보는 군사 정권과 야만적인 자본의 폭력에 대항하여 ‘생명’을 지켜낸다는 것을 도리어 스스로의 척도로 여겨오기도 하였다.

즉 ‘생명’을 자유자재로 박탈해 온 ‘야만적’인 국가와 시장 중심 사회에 반대하는 것이 곧 진보의 바로미터이고, 진보가 엄수해 온 기본적인 저지선이 ‘생존권’ 혹은 ‘생명’ 옹호라 여겼던 것이다. 그 동안 진보진영에서 ‘생존권을 사수하자’는 간단한 구호를 가장 널리 사용해 왔음을 상기해보라.

생명 옹호와 생명 이후 권리

문제는 이 구도가 생명 옹호는 보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으로, 다른 권리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사고하게끔 한다는 점이다. 진보 진영 또한 생명을 옹호한다는 대의나 이데올로기가 보다 호소력 있다고 여기고, 활용하고 있다. (4대강 사업 반대와 황우석 연구를 ‘생명보호’로 절대화하고 단순화해서 반대하는 일부 진보진영의 논리도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이는 ‘생명’이 언제나 정치적으로 다루어져왔다는 것을 망각하게 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생명 옹호만이 진보의 윤리가 되었을 때 진보는 ‘생명 이후’의 권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취약할 수밖에 없다. 낙태처럼 직접적으로 ‘생명을 훼손’한다고 여기는 이슈의 경우 이러한 진보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예를 들어, 진보정당이나 진보진영에서 ‘의료 보험에 임신 중절 시술을 포함하자’를 주장하기 어렵다는 견해를 많이 접하곤 한다. 추상적인 ‘낙태 비범죄화’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한다 하더라도 국가가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임신 중절 사례를 지원하는 등의 구체적인 문제로 들어갔을 때 훨씬 진보진영이 대응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진보진영에서조차 낙태가 하나의 권리라기보다 추상적인 의제로만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잘 드러내는 부분이다.

진보진영에도 존재하는 절대적인 ‘생명’ 옹호자론자들의 오해와 달리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의 권리가 신장됨에 따라, 혹은 여성운동의 입장에서 낙태권을 옹호한 역사는 거의 전무하다. 자유주의적인 여성의 신체 권리의 입장에서 낙태에 관해 깊이 있는 논의가 이루어진 적도 없다.

한국 사회에서 낙태가 이루어진 것은 소위 여성의 ‘선택권’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언제나 국가나 가족이 산아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에 이루어졌다. ‘하나 낳아 잘 기르자’는 산아 조절 캠페인을 기억해 보라.

‘생명’ 옹호론자들의 착각

그리고 한국 사회는 통상 성규범과 반대로 기혼 여성의 낙태 비율이 더 높다. 이는 한국 사회 낙태가 언제나 ‘아이 수’ 조절의 문제로 기능해 왔다는 점을 말해 준다. 낙태를 통해서 불가피하게 ‘아이 수’를 조절해 온 것은 출산이나 양육을 국가가 책임지지 않은 채 언제나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해 왔다는 점, 또 한편으로 남성의 성적 자유에 대해서는 문제시하지 않고 관용해 온 문화를 뒷받침하였다. 한국 사회에서 낙태는 다만 말해질 수 없는, 불가피하게 이루어진 과거로만 여겨져 왔다.

소위 프로라이프나 진보진영 ‘생명’ 옹호자론자들은 이런 문제를 낙태를 단속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낙태를 단속하고 범죄화하는 것은 불가피한 경우의 낙태를 음성화하고 여성의 건강권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이들이 가진 또 다른 오해와 편견은 여성운동이나 진보정당 내 여성주의자들이 단편적으로 ‘낙태’를 옹호하는 입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이런 오해가 쉽게 드러나는 경우는 낙태 비범죄화 찬성이 곧 낙태 찬성이라고 여기는 경우이다. 낙태 이슈에서 여성의 권리를 존중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매우 간단한 주장마저 낙태를 양산하고 낙태를 찬성하는 것으로 해석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서구의 대립 구도를 피상적으로, 그대로 한국 상황에 적용하는 나쁜 버릇에 불과하다. 임신 중절의 상황에서 여성이 고려하고 결정해야 하는 다양한 지점들에 대한 일체의 고려가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대다수 여성주의자들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든 낙태는 여성들에게 고통스러운 경험이라는 점, 일생을 통해 해석하게 되는 경험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여성에게 낙태는 단순히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낙태를 결정하기까지 이르는 과정과 그 후의 자신을 결정짓는 정체화 과정이다.

여성의 권리라는 측면에서 이해를

낙태에 이르기까지 여성이 놓여 있는 성적 관계, 낙태를 경험하면서 여성이 느끼는 고뇌와 고통, 낙태 이후 겪어야 할 후유증 등이 통합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당연히 낙태 여부를 결정하는 순간 가지는 출산과 양육에 대한 부담감도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이고, 피임, 임신, 출산, 양육 등 여성의 재생산 과정 전체가 가족과 국가 발전의 관점이 아닌 여성의 권리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여성의 입장에서 임신을 결정할 권리와 결정하지 않을 권리가 분리되지 않으며, ‘낳으라’는 강제와 ‘지우라’는 강제는 똑같이 여성의 재생산권을 침해한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국가와 가부장이 함부로 여성에게 낙태를 강요하는 것은 낙태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거나 단속을 강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대되어야 하는 것이다.

낙태에 관해 여성의 입장에만 주목하는 것이 무리가 있지 않냐는 의견도 있다. 보다 진보정당의 입장에서 도리어 이는 여성 남성 여부를 떠나서 계급적인 문제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도 제기된다. 그러나 낙태라는 어려운 경험을 겪는 것도, 해석하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여성이며 여성이 일차적인 주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여성의 이해를 지우고 혹은 계급적 문제로만 이 부분을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빠지기 쉬운 예가 ‘가난한 노동자 가족이 아이를 키울 수 없어서 낙태하는 경우’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일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물론 중요하게 감안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 사례만을 취급할 때 가족에서 벗어난 여성이 보통 더 크게 감당하곤 하는 출산, 양육, 낙태에 대한 부담은 논외의 것이 되기 쉽다.

혹은 여성을 (낙태의) 피해자로만 생각하고 남성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은 뒤떨어진 시대인식이거나 진보정당으로서 너무 무리한 요구인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 있다. 이러한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여성을 어떤 이슈의 일차적 경험 주체로 이해한다는 것을 꼭 피해자라고 해석해야만 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이 거부감을 가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성들의 재생산 결정권

나는 여성이 피해자로, 가해자로 혹은 그렇게 분류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자신의 경험을 해석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경험 해석들을 일차원적으로 피해자적 느낌, 혹은 가해자의 죄책감이라고 무 자르듯이 말할 수 없다. 진보정당이 듣는 여성들의 경험이 거의 가해자적 죄책감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사건’이 벌어지는 곳의 당사자의 경험을 복원하지 않고, 그리고 그 경험을 말하고 해석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사건’을 다룰 수 있단 말인가? 그 경험들을 공감하고, 이해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어떻게 가장 절실한 출발점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과거 모자보건법 이후의 암묵적 묵인만 있었을 뿐, 여성의 임신과 낙태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은 우리 사회에 거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피치 못할 임신을 방지할 만한 성교육이 활발히 이루어지지도 않고, 낙태에 소요되는 비용을 합리적으로 마련할 수 있는 통로도 부재하며, 낙태에 대한 경험은 낙인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계획된 임신이 아니더라도 임신되었을 때 그만한 여유를 갖지 못하면 출산을 선택하는 것도 극히 어려운 일이다. 여성의 재생산 결정권이 그만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진보정당은 당연히 정당으로서의 입장을 마련하고, 총론 및 대책,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낙태 문제의 ‘가시화’이고 권리로서 여성의 재생산권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것이다.

지금 다시 이 전투장에서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출발점이 있다. 진정한 복지국가가, 사회주의 국가가 도래한다고 해도 임신을 하였으나 출산할 수 없는 상황은 벌어진다. 그 상황에 놓인 여성이 자신의 ‘생명’과 분리되어 있지 않는 몸에 대한 문제에 심사숙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낳을 수 없다’고 결정했을 때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생각과 종교적 신념의 다양성을 고려했을 때 최소한 그 ‘인정’이라는 것은 법적으로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국가와 사회와 우리는 그 여성이 심사숙고 할 때 고통스러운 낙태의 경험을 줄일 수 있는 선택지를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야 한다. 과연 이 출발점을 부정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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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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