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메기도 미꾸라지도 아니다"
        2011년 01월 12일 08: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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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희 회장이 한 말이라던가. 어항에 미꾸라지만 들어 있을 때는 나중에 미꾸라지가 비실비실해진다고 한다. 하지만 메기를 한 마리 넣은 경우에는 미꾸라지 몇 마리는 잡아 먹히되 나머지가 모두 팔팔하게 살아있다고.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더 비싼 값에 미꾸라지를 넘겨서 돈을 더 많이 번다니, 그럴 듯하다. 하여 생선장수는, 메기를 필요로 할 수 있다.

    미꾸라지와 메기

    하지만 미꾸라지가, 자신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 동료 미꾸라지들의 희생을 감수하며 메기를 초대하는 건 슬픈 일이다. 사실 같은 공간을 쓰고 있는 ‘사람’을, 아니 그 공간을 깨끗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몸값 상승을 위해 희생시켜야 할 미꾸라지’로 여기는 일은 한국에서 특정 학교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또 ‘한국에서만’, ‘학교에서만’ 벌어지는 일도 아니다. 그러나 ‘미래 세대를 키워내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생각하면 더욱 씁쓸하다.

    트위터에 올라온 글이라는데 직접 진위는 확인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트윗에 따르면, 단순히 집회가 시끄러워서 짜증을 내는 수준을 넘어 "학생들이 청소 노동자를 도우면 학교 이미지가 나빠져서 향후 취업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을 경원하는 학생들 마저 있다고 한다.

    자신이 다니는 학교를 청소해주는 이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벌어지는 투쟁에 방관이나 적대적인 차원을 넘어, 밟고 올라서겠다는 모습이라니, 비극이다. 바로 생선장수의 논리를 체화한 미꾸라지의 모습이 아닌가.

    예의 그 전통적(?)인 집회 방식으로, 1990년대에 태어난 세대들의 눈에는 괴상한 몸짓과 억지스런 멜로디의 노래와 생경한 구호 등으로 과도한(?) 소음을 유발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니, 과연 새로운 시위 방식이나 대중에 더욱 호소력 있는 집회판을 짜야 하는 것이 운동진영의 중요한 과제이리라는 것에는 생각이 미친다.

    하여 활동가의 의식 속에 긴장감을 불어 넣는다는 의미에서는 분명 ‘메기’가 필요할는지 모르겠다. 도서관의 학생들을 ‘희생시켜야 할 미꾸라지’로 여기지야 않았겠지만, 관성화된 방식을 벗어나서, 다양한 학교 구성원들의 처지를 감안한, 보다 훌륭한 투쟁을 할 방법을 놓친 것은 행여라도 없나, 고민해야 할 문제이긴 하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는 기본

    한편, 잘 모르겠다. 실제로 ‘외부(?)’ 노동조합 총연맹이 ‘학습공간’에 들어가서 무슨 집회를 어떻게 하는지, 학생들의 학습권을 얼마나 침해하고 있는지 나는 가보지 않아서 모른다. 상급단체의 교섭이 이루어지고는 있는지, 그러한 노동법상의 노동자를 위한 규정들이 ‘외주계약’이라는 장치를 통해 무력화되고 있는지도 찾아보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

    싸움이 너무나 절박해서 관성을 벗어난 신선한 투쟁방식을 개발할 여유도 뭐도 없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한끼가 아니라 한달 식비로 9000원을 받는다는 사람들의 처지를 개선시키는데 있어 대학 당국이나 업체의 추가적 재정 부담이 얼마나 필요한지도 계산해 보지 못했다.

    그리고, 따지고 싶지도 않다.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업체와의 계약해지’라는 허울 아래 하루아침에 해고가 된 사람들이 절규할 때 달려온 노총이나 진보정당 사람들이 외부세력인지 아닌지의 논리를 가늠하는 것도, 노동유연화니 최저임금이니 하는 이야기도, 대학당국의 처사가 얼마나 얼척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는 것도 잠시 미뤄두고 싶다.

    그냥 이도 저도 다 떠나서, 사람이 서로를 사람으로 대접하려는 기본 정신은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학생이나 교직원이나, 연구원이나 청소노동자나 같은 휴게실을 쓰는 것이 뭐가 신기한 일이냐는 사고방식은, 사대주의니 유럽중심주의니를 떠나서 우리가 배우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1월10일, 델프트 대학 OTB 인공환경연구소에 있는 휴게소.(사진=경호)

    무비판적 유럽 숭배는 곤란하지만

    물론 유럽이 무조건 좋을 리는 없다. 역외 지역에서의 수탈을 바탕으로 건설한 유럽의 복지국가에 대한 무비판적 숭상 역시 곤란하다. 유럽국가 중 네델란드가 좀 덜한 편에 속한다고는 해도 이곳 역시 인종차별의 문제는 잠복해 있고, 자주 터져 나오기도 하며, 직업의 귀천에 대한 의식도 엄존하고, 경제위기로 인한 구조조정이나 재정지출 축소로 인한 갈등도 불거지고 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음지나 양지에서의 차별 역시 상존하는 사회적 문제로, 프랑스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일하던 식당을 점거하기도 했다. 승리하는 투쟁을 통해 체불임금과 심지어 체류증까지 받아낸 이주노동자들의 사례는 몇 년 전의 유명한 이야기지만, 단속에 걸리거나 난민신청시 서류가 미비하여 추방당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더 자주 뉴스에 오르내린다.

    하지만, 제도나 규정에도 최소한의 일관성과 염치는 있어 뵈며, 앞에서는, 명목상으로는, 같은 사람이라는 대접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비정규직이니 파견근로니 신자유주의니 하는 개념을 떠나서, 같은 사람인데 누구는 존재 자체가 죄인인 것처럼 빌딩 창고에서 점심을 먹어야 하고, 보일러실에서 옷을 갈아입다가 화재의 책임을 뒤집어 쓸 뻔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니 최소한 공론화되면, 겉으로라도 난리가 나고, 인간대접을 하지 않았던 책임자는 진땀을 흘리며 변명을 한다. 비인간적인 대접을 한 업주는 문 닫을 각오나 구속될 각오를 해야 함은 물론이다.

    위 사진에 나온 장소는 휴게실 중 흡연 공간이다. 며칠 전에는 사진 속 머리에 두건을 쓰신 분이 흡연 공간 바로 바깥의 더 우아한 휴게실에서 도시락을 드시는 장면을 찍으려 했었다. 이주노동자이신 이 아주머니는 네델란드어도 그닥 잘하지 못하고 영어는 더욱 짧다. 나도 네델란드어로 촬영취지를 설명하지 못했으니 결국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그날은 사진 촬영을 거부했지만, 오늘은 다른 동료들이 통역을 해주니 촬영을 허하셨다.

    사진 찍는 순간 뭉클해진 이유는

    사진을 찍는 순간 가슴 한 켠이 뭉클해지면서 동시에 서늘해지며 핸드폰을 쥔 손이 떨린다. 고맙기도 했고, 서럽기도, 서글프기도 해서일까. 이 분들에게는 신기할 것 없는 일들도, 아무리 유럽제국주의가 식민지에서 착취한 부를 바탕으로 한 것일지언정,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다. 싸워서 성과물로 얻어내 주어 내 앞에 펼쳐준 이전 세대의 노동자들에게 그래서 고마웠던 것 같다.

    그런데 왜 지구 어느 편에서는 아직도 싸워서 쟁취할 일이어야 하며,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되어야 하는지, 아니 더 열악한 곳에서는 청소노동조차도 할 수 없어서 이주를 해야 하는지, 아니 이주조차도 하지 못하고 피폐하게 살고 있는지에 생각이 미치니 서러웠던 것 같다.

    그리고 평소의 나는 음료수가 남은 종이컵을 휴지통에 버리다가 주변에 튀기고 나서도 대충만 닦으면서도, 알량한 의식으로 이런 스마트폰 사진이나 찍어 한국에 보내며, 청소노동자들과 연대하고 있다고 언감생심 일용할 양심의 평화를 얻으려 하고 있다.

    그러면서 몸은 이곳에서 거주하며 어쩌면 이곳의 청소노동자들 보다 나은 처지에 있으면서도, 머리로는 한국의 청소노동자들이나 아주머니의 본국의 길거리의 아이들의 처지를 감히 떠올리며 서러워하고 있으니, 주제넘게도, 서글프다.

    이렇게 한국에 응원의 사진을 보내면, 나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일까? 어쩌면 집회의 소음에 짜증을 내면서도 쓰레기는 곱게 버리고 자기 부모님께 효도하는 도서관의 학생들이, 부모님께는 불효를 일삼고 청소노동자들은 이념 속의, 사진기 속의 ‘좋은 그림’의 대상으로 여기는 나보다, 훨씬 좋은 사람들이 아닐까.

    누가 더 좋은 사람일지 지금 따지는 것은 자아 성찰을 빙자한 ‘자책 노출증’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어쨌든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일상 생활에서의 미시적 인간관계에서든, 구조적 변화를 꾀하는 ‘투쟁’과 ‘운동’에서든, 그래, 우리는 생선장수도, 메기도, 미꾸라지도 아니라,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곳 휴게실을 사이 좋게 나누어 쓰는 청소노동자, 연구원, 학생, 교직원들의 모습을 보며, ‘비실비실한 미꾸라지’가 아니라 ‘아름다운 인간의 모듬살이’를 떠올려야 한다.

                                                     * * *

    * 이 글의 필자는 현재 네덜란드 델프트 대학 OTB 인공환경연구소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연구주제는 주택정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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