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치원 다닐 때 해고된 아빠, 아직도"
    암걸린 엄마, 고1 동생, 저는 1인시위
    By 나난
        2011년 01월 03일 01:3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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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1인 시위 중인 필자.

    제가 유치원에 다닐 시절 아버지는 부당해고를 당하셨습니다. 복직 전에 저는 부당해고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대법원장께 현명한 판결을 호소하는 공개편지를 보내기까지 했습니다.

    조합원 92% 복직을 반대하다

    하지만 그 당시 아버지를 지지하며 도와야할 노동조합의 92% 대의원이 “아버지가 복직되면 8년 무쟁의 무분규가 깨어질 우려가 있다”며 아버지의 복직을 반대하는 내용의 진술서를 대법원에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끈질긴 싸움 끝에 아버지는 승소판결을 받으셨고, 이후 8년 3개월만에야 회사에 복직하셨습니다. (필자의 아버지 김석진 씨는 지난 1997년 ‘회사 측의 성과급 삭감지급’ 내용을 유인물을 통해 배포했다는 이유로 울산 현대미포조선으로부터 징계해고 당했으며, 지난 2005년 해고무효확인 소송에서 승소했다-편집자)

    복직 후에도 아버지는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있어서는 단호하게 비판하며 싸우셨습니다. 그러한 싸움 중의 하나가 지난 2008년 4개월간 동료 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한 사내하청노동자들의 복직 투쟁 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져온 후폭풍은 너무나 거셌습니다.

    이 투쟁으로 아버지는 회사에서는 중징계를, 노동조합으로부터는 무려 5년 동안 조합원 권리 정지 징계를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투쟁 중에 아버지께서는 현대중공업 경비대로부터 심야테러를 당해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병원치료를 받으며 후유증으로 고통스러워 하십니다.

    2년 전 당한 테로로 아직도 병원 치료 중

    현대중공업의 심야테러는 아버지와 단식 농성자 10명이 잠을 청할 무렵 60여 명의 경비대가 복면을 하고 소화기를 뿌려 앞을 볼 수 없도록 만든 후 30여 명의 경찰까지 밀어내고 각목, 쇠파이프를 이용해 테러를 가하고, 농성장을 부수고, 농성장 물품을 불태우는 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농성자가 다쳤고 저희 아버지도 묵직한 소화기에 뒷목을 가격당해 쓰러져 의식을 잃고 현장에서 바로 병원에 후송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유증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대자본의 범죄행위에 분노한 부모님은 결국 서울과 울산을 오가며 가해자인 현대중공업과 현대중공업의 실세인 정몽준 국회의원, 그리고 경찰청을 상대로 사태해결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셨습니다.(관련기사 : 폐암 앓는 아내, 서울로 향하는 이유는?

    국정조사와 국정감사가 진행되는 동시에 국가인권위원회, 국민권익위원회, 경찰청, 노동부 등 국가기관과 가해자들에게도 계속 문제 해결을 요구했지만, 여전히 현대중공업과 경찰청은 제대로 된 해결 방안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2년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김석진 씨의 가족은 서울과 울산을 오가며 1인 시위를 진행 중이다.

    이렇듯 대기업은 엄연한 범죄행위를 가해 놓고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모른 척, 일관하고 있습니다. 현대중공업은 병원치료에 대한 문제 해결 넘어 재발 방지 대책과 공개사과 그리고 당시 테러현장을 방관한 경찰들에 대해 분명히 책임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는 침묵과 힘없는 노동자에 대한 탄압을 통해 거대자본의 더러운 구석을 훤히 드러낼 뿐입니다.

    "꼬마야 힘내라, 정말 큰 힘돼"

    최근 고등학교 1학년인 동생은 겨울방학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와 동생은 국회 정문 앞에서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했습니다. 한파 속의 1인 시위였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추위를 느끼기보다는 이 시위를 통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현대중공업의 실태를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렇지만 쉽게만 보았던 1인 시위를 하는 내내 참 많은 고민과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위를 하는 동안 사람들의 무관심, 냉소적인 시선에 씁쓸함을 느끼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조그만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국회 앞 도로를 지나는 차 안에서 한 시민이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동생에게 “꼬마야 파이팅!” 을 외치며 지지해 주신 일 때문입니다. 저와 동생에게는 “파이팅”이라는 한마디가 그 무엇보다 큰 연대였고 지지였습니다.

    이렇듯, 명색이 노동운동의 메카 울산에서도 저희 부모님의 투쟁에 많은 분들이 지지해주셨으면 합니다. 당장 나에게 직결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모른 척하기에는 같은 노동자로서 너무나도 억울한 일이라는 걸 잘 아실 겁니다. 또한 이 사건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을 경우 제2, 제3의 피해자가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노동자의 연대와 지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원칙과 믿음만 확실하다면 얼마든지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 자부합니다. 저희 부모님은 몇 년이 걸리더라도 문제해결이 되는 그날까지 계속 투쟁하실 겁니다. 그 투쟁이 너무 힘들지 않게, 많은 분들이 연대하고 지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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