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받으며 노동운동 할 수 있어 행복"
    2010년 12월 10일 08:5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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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는 끝났다 /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최영미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 중에서)

이런 데 다니면서 왜 노동조합을?

전문노련의 정식명칭은 전국전문기술노동조합연맹이다. 경제사회단체, 엔지니어링, 연구기관, 정부 출연기관 등의 다양한 전문가들이 모여 1989년 연맹을 만들었다. 전문노련은 전국공익사회서비스노동조합연맹(공익노련)으로 이후 다른 공공부문과 합쳐져 전국공공사회서비스노동조합연맹(공공연맹)으로 그리고 다시 철도, 화물연대 등 운수부문과 합쳐져 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연맹(공공운수연맹)으로 확대 발전한다.

전문노련은 2만명 남짓한 규모였지만 지금의 공공운수연맹은 15만명의 조합원을 가진 민주노총 안에서 금속노조 다음의 규모를 가진 조직이다. 지금은 연맹을 벗어나 하나의 산업별노조인 공공운수노조를 만들려고 하는 중이고, 그것 때문에 내가 2010년 12월부터 대전에 내려와 있는 중이다. 너희들에게 설명하기에는 너무 어려우니 그냥 넘어가자.

나는 그동안의 활동 경력이 인정되어 바로 국장으로 임명되고 주된 업무는 조직을 거쳐 연대사업을 담당하게 된다. 연대사업이란 다른 노동조합 혹은 정당, 그리고 시민사회단체 등과의 유관사업을 함께 하는 부서다. 그리고 동시에 정당 활동을 한 경험을 살려 정치 사업을 담당하게 된다.

새로운 활동이 주는 신선함은 사람을 흥이 나게 한다. ‘흥’이야 말로 무슨 일을 하든 제일 중요하다. 제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학력이 높고, 활동방식에 차이가 있었지만 노동조합이라는 점에서는 똑 같았다. 처음으로 청량리에 있는 한국과학기술원(KIST)을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넓게 깔린 잔디밭에 놀랐다. 

“아니 이런데 다니면서 왜 노동조합을 해요?” 그렇게 물었다. 

연구  결과의 왜곡

그러나 한국개발연구원 등 인문사회계는 물론이고 전자통신연구소 등 역시 정부의 각종 통제가 지속적으로 가해졌다. 연구를 하고서도 그 결과를 왜곡시킨 채 정부의 입장에 유리하게 왜곡되어 발표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군사정권 시절에는 더 심했을 것이다.

너희들도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을 담당했던 건설기술연구원의 김이태 박사에 대해서는 들어 보았겠다. 그는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한반도 물길잇기 및 4대강 정비계획의 실체는 운하 계획이다”라고 양심선언을 했다.

그는 연맹 산하 건설기술연구원이 국토해양부로부터 연구용역 의뢰를 받아 4대강에 대한 연구를 담당한 연구원이었다. 학자적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다. 무척 힘든 과정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인 올해 12월 8일 김이태 박사는 ‘투명 사회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에도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박사급을 포함한 이들은 ‘연구자율화’를 내걸고 노동조합을 결성하게 된다. 그리고 노동조합을 통해 많은 부분 정부의 일방적 통제를 막아낼 수 있었다. 

더 얘기를 진행하기 전에 노동조합에 대해 말해 둘 필요가 있겠다. 노동자란 2가지 의미에서 자유로운 사람을 말한다. 하나의 자유는 직업을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다. 너희는 디자이너가 될 수도 있고, 문필가가 될 수도 있다.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는 셈이다.

다른 하나는 직업을 갖지 않으면 굶어 죽을 자유다. 농민과 달리 아무런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팔아야한다. 그리고 그 대가의 일부로 임금을 받는다. 우리가 임금 노동자라고 부르는 이유다. 어딘가에는 취직을 해야 먹고 살 수가 있다. 

운동이라는 것

그런데 자본가와 비교하여 노동자는 상대적으로 약자다. 해서 우리나라의 경우 헌법에 노동3권을 두었다. 노동조합을 만들고(단결권), 자본가와 단체로 교섭을 하고(단체교섭권), 정 안되면 생산을 정지시켜 자본가를 압박하는 파업의 권리(단체행동권)다.

물론 여기까지 오는 데 수많은 투쟁과 희생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자본가는 노동자와 대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시도를 막고자 한다. 심지어는 폭력을 쓰기도 한다.

울산에서는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사람들에게 ‘식칼 테러’를 가하기도 했다. 얼마전에는 SK 그룹 최태원 회장의 사촌인 M&M 대표 최철원이라는 사람이 내가 속한 연맹의 화물연대 조합원을 "한대에 백만원"이라며 알루미늄 야구방망이로 때리기도 했다.

여전히 세상은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백안시한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대부분의 권리가 이전 사람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면 거꾸로 오늘의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보다 나은 세상을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게 바로 운동이다. 

최근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노동조합의 많은 권리가 축소되고 있다. 불완전한 노동3권을 가진 공무원노조는 이런저런 시비 끝에 법외 노조가 되었고, 교사들의 조직인 전국교직원노조도 심한 탄압을 받고 있다. 공공부문 노동자들에게는 파업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하는 필수유지업무제도라는 게 도입되기도 했다. 아직도 이 땅의 노동자들은 온전한 노동3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민주노조, 고난의 시절

연맹이란 이런 노동조합들이 가입해 있는 상급단체를 말한다. 직종별 혹은 산업별로 조직되어 있다. 언론, 병원, 공공부문, 제조업 등으로 연맹이 구성되어 있고, 이 연맹들이 모여 민주노총을 구성한다. 민주노총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다음에 얘기하자.

사람들은 전노협은 잘 알지만 전국업종노동조합협의회(업종회의)는 잘 모른다. 전노협이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전국조직이었다면 업종회의는 사무직 연맹들이 모여 만든 전국조직이었다. 언론, 병원, 증권 계통의 사무, 전교조, 그리고 전문노련 등이 주요 구성단체였다. 아직 민주노총을 만들기 전이었다. 

   
  ▲업종회의 간부 수련회. 사진을 잘 보면 젊은 날의 권영길 당시 업종회의 의장을 찾을 수 있다.

민주노총은 전노협, 업종회의, 그리고 전노협에 가입하지 않았던 현대그룹과 대우그룹 에 속한 노동조합 등 대공장들이 함께 모여 95년에 만들어 진다. 모든 단체들이 한 번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내가 전문노련에 들어간 직후인 6월 1일 전국의 1,145개노조 41만명의 조합원을 포괄하는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가 만들어 진다. 이 전노대가 발전하여 민주노총이 되었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그냥 우리나라 노동운동이 이런 길을 걸어왔구나 하는 정도로 가볍게 이해해 주길 바란다. 

그러나 이 모든 역사의 진행은 정권의 방해와 탄압 아래서 진행되었음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1988년부터 1995년까지 구속된 노동자는 무려 2,354명이나 되었다. 선생님들의 노조인 전국교직원노조를 만들고 가입했다는 이유로 1,500여명의 교사들이 학교에서 쫓겨났다.

특히 전노협에 대해서는 집중적인 탄압을 가했다. 출범 5개월 사이에 단병호 위원장을 비롯하여 200여명의 노조간부와 노동자들이 구속되었고, 15개 지역 차원의 노동조합협의회 가운데 10개 지역에서 의장단을 포함한 1백여명이 수배되었고, 전노협 소속 사업장에 18번이나 경찰들이 난입했으며, 심지어는 전노협 중앙위원회장에 백골단이 치고 들어와 전원 연행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가입 노조 절반 가량 탄압 못이겨 감소

이런 정권의 극심한 탄압으로 전노협 결성 1년여 만에 가입한 노동조합의 48%, 조합원 수의 45%가 감소했다. 얼마나 극심한 탄압을 받았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1991년 2월 13일 한진중공업의 박창수위원장은 당시 진행되고 있던 대우조선의 파업에 대해 지원방안을 ‘논의’했다는 이유만으로 전노협, 대기업노조 연대회의 간부 6명과 함께 구속됐다.

그리고 5월 4일 이마가 6cm 쯤 찢어져 안양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6일 새벽, 병원 마당 시멘트 바닥에서 박창수의 시신이 발견됐다. 정부 기관은 투신자살이라고 발표했지만 전노협에 대한 탈퇴 강요를 거부해서 감옥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창수 열사의 장례식장을 덮쳐 시신을 탈취해간 경찰.

지금도 사업주들이 “민주노총만 탈퇴하면 요구 조건을 다 들어 주겠다”라고 회유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노동자들의 민주적인 단결을 싫어한다. 2010년 12월 현재 오늘도 단지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 하나로 24명 전원이 해고되어 투쟁하고 있는 대전 롯데백화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다. 그 집회에 나온 카이스트 대학생들이 말했다. 

"잘 모르지만 우리도 2~3년 있으면 사회에 나갑니다. 오늘 여기 이 추위를 이기며 싸우고 있는 노동자분들의 투쟁은 곧 우리의 미래를 위한 싸움이기도 합니다. "  지겹게 반복해 말하지만 오늘 우리가 딛고 있는 모든 현실은 지난 시기 긴 투쟁의 산물인 경우가 많다.

92년 대통령 선거를 통해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그는 군사정권과 대비하기 위해 ‘문민정부’라고 했다. 5.16 이후 최초로 민간인이 대통령이 된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처음으로 군을 민간정부의 통제 아래 두었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김영삼 정권과 노동운동

무엇보다도 95년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하는 등 광주학살에 개입했던 14명의 군인들을 내란수괴 등의 혐의로 구속하여 전두환은 무기징역, 노태우는 17년 징역형을 받도록 만들었다. 물론 그들은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김대중에 의해 사면 복권 및 석방된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어차피 군부와 자본의 힘을 빌어 들어선 껍데기만 민간인 정부였다. 92년 4월 각계대표 18명으로 ‘노동관계법연구위원회’를 구성하여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 등 5개 노동관계법의 전면 개정·보완 작업에 들어갔으나 결국 96년 노동법 날치기로 귀결돼 전 세계가 주목했던 전국노동자들의 총파업의 원인이 된다. 그 얘기는 다음에 하자. 

또 한국노총을 앞세워 임금인상에 가이드라인을 정하고, 이를 강제하기도 하고, 1994년을 아예 ‘무쟁의 원년’으로 선포하기도 했다. 노동자들이 투쟁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투쟁은 항상 그만큼의 피해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1년에 거의 수백명씩 구속되는 상황에서도 싸울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다. 살아가기 위한 최대의 조건인 임금인상을 억제하고, 각종 노동통제 정책을 쓰게 되면 반드시 저항이 생기는 이유다. 당시 서울지하철, 한진중공업, 한국통신, 조폐공사 등 수많은 파업투쟁이 일어났다. 

나는 새로 만난 사람들과 즐겁게 활동할 수 있었다. “노동운동의 매력 중에 하나는 아주 좋은 사람들을 아주 쉽게 만날 수 있다는 데 있다”고 나는 자주 말하곤 한다. 사리사욕없이 헌신적으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유쾌한 것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금방 친해질 수 있는 매력이 있다.

노동운동의 매력

더욱이 운이 좋아서 노동조합의 전국조직을 만드는 과정에 함께 할 수 있었다. 그 즈음 나는 언론노조 위원장이면서 당시 업종회의 위원장이었던 권영길 위원장을 알게 된다. 이후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게 되는 권영길 위원장과의 긴 인연도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새로운 풍토에 아주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울산에 있을 때 내가 제일 부러워 했던 사람들이 ‘대공장 해고자’들이었다. 조합원들이 주는 급여를 받으면서 자기가 원하는 노동운동을 아주 맘껏 할 수 있는 그들이 정말 부러웠었다.

우스운 얘기지만 어느날 현대중공업 사람들이 노조 창립기념품이라면서 커다한 검정우산을 하나씩 들고 나오는 것을 보고 부러워 했던 기억도 있다. 그런 내가 월급을 받으면서 노동운동을 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좋아했을지 상상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만큼 최선을 다해서 정열적으로 일했던 것 같다. 

당시 상황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그 즈음 [전문노련] 이라는 기관지에 썼던 글을 그대로 살려본다. 

"94년은 노동조합의 ‘현재’를 넘어서려는 광범한 노력이 진행되었던 해였다. 현재 우리 나라의 노동조합은 몇 가지 내부 모순을 안고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모순은 한국노총과 이에 반대하여 정권과 자본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는 민주노조사이의 모순이다. 정부는 한국노총의 독점적 지위를 보장하는 대가로 전국적 노동조합을 정치• 경제정책의 활용도구로 활용해 왔다. 반면 이에 반대하는 노조들은 모진 탄압을 받음으로써 양자사이의 모순은 극대화되어 왔다. 

두번째 모순은 민주노조운동 내부에 존재해 왔다. 한국노총에 대비되는 세력으로서의 민주적•자주적인 노동조합의 흐름은 지역, 업종, 그룹으로 나뉜 채 성장해 왔다. 그것이 현실에서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과 대우그룹노동조합협의회라는 조직으로 나타났었다. 

세번째 모순은 노동조합 내에 존재한다. 변화하는 사회 및 정부와 자본의 총체적인 대응력에 맞서 노동조합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보다 더 높은 질의 조직이 필요한 것은 누구에게도 분명하게 보였다. 그러나 과거 정권에 의해 기업별 노조로 위치 지워진 숙명은 그 동안의 실천을 통해 조합원들로 하여금 자신의 노동조합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를 별로 주지 못해 왔다. 

94년은 이런 모순에 대해 조직적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열어 나간 해였다. 많은 상처를 내긴 했으나 ‘자신감’을 되찾은 94년 투쟁의 성과보다 오히려 큰 것은 ‘조직적 성과’였다. 먼저 기업별 조직을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뒤를 이었다. 제조업에서는 업종별 조직재편을 모색했다.

1월의 전국조선노동조합협의회, 3월의 전국지하철노동조합협의회 구성 등으로 넓은 틀의 협의회가 구성되기 시작했다. 자동차, 기계금속 및 전기전자, 화학 업종 등에서 이런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 비제조업에서는 이와 같은 기업별 노동조합의 연대차원을 넘어 실제적으로 기업별 노동조합을 해산하고 산업별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쾌거도 있었다. 단일노조 건설으로 표현되는 산별 노조로의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는 어렵고, 불투명한 전망을 연 것은 4월 15일 결성대회를 가진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이었다. 뒤를 이어 대학강사노동조합이 오랜 임의단체 시기를 넘어 합법성을 쟁취했고, 이제까지 전국지역의료보험 노동조합총연합으로 존재해 왔던 의료보험 노동자들이 12월 15일 전국의료보험 노동조합으로 거듭 태어났다. 이와 함께 지역조직을 건설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했고, 공공부문 노동조합대표자회의 처럼 공동의 사안에 대응하기 위한 조직 틀도 건설되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도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민주노조 진영 내부의 모순을 정리하는 과정은 곧바로 한국노총으로 대변되는 한국의 노동조합 운동을 바꿔 나가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87년 이래 급속히 성장해 온 노동자를 대표하지 못하고, 조합비의 7배 정도를 국고보조로 받아야 유지될 수 있는 한국노총은 민주적인 노조활동을 전개해 온 편에서 보기에는 당연히 모순된 것이었다. 더욱이 93년에 이어 94년에도 낮은 임금인상율을 기본으로 하는 소위 노총-경총간 사회적 합의를 함으로써 이런 불만은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94년 한해동안 노총을 탈퇴하거나 맹비납부를 거부한 노동조합은 200여개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국노총을 개혁, 혹은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수년 동안 계속되었다. 

더 나아가 한국노총을 대체하기 위한 노력도 구체화되었다. 93년 6월 1일 결성되어 활동해 온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는 11월 노동자대회를 통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약칭 민주노총) 준비위원회’를 결성하면서 발전적으로 해산되었다. 지역, 업종, 그룹으로 다르게 성장해 온 민주노조 진영은 실질적인 통합을 위한 구체적인 행보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94년의 전진은 노동조합의 판도 전체를 바꿔 나가고 있다"

생경한 단어가 많아 이해하기가 조금은 어렵겠다. 다만 천천히 한국노총이라는 어용조직에 맞선 민주적인 노동조합의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려는 노력이 가시화되고 있었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그 과정을 조금만 더 들여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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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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