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 근데 내 이름이 뭐였지?"
        2010년 11월 25일 03:1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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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라 하늘 높이 오르는 우리들의 깃발을 / 말하지 말라 이제 늦었다고 / 공장에서 들판에서 부두에서 광산에서/ 이땅의 꺾이고 밟힌 사람들 모두 나와 / 저 펄럭이는 깃발을 향해 서자 / 하고 싶은 말 소리높이 외치고/ 우리들의 꿈으로 온나라를 밝히자 / 우리들의 생각 우리들의 꿈은 / 우리가 스스로 나서서 펼쳐 / 이 땅을 빛과 꽃과 춤으로 덮으리라 / 우리들의 것은 우리가 지키리라” (신경림 시 ‘우리들의 것은 우리가 지키리라 – 민중의 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연합추진위원회의 출범을 축하하며’ 중에서) 

    노동조합과 마찬가지로 정치 영역에서도 ‘독자적인 진보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소수였다. 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백기완 선생님이 대통령에 출마했었다. 백기완 선생님은 우리가 애창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사자이기도 하다.

    가사는 이렇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지지 말자 /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87년 대통령 선거

    이 노래는 5•18 광주 항쟁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죽은 서른살의 윤상원 열사와 그 전해인 1979년 노동현장에서 죽은 박기순 열사를 맺어주는 영혼 결혼식에서 ‘넋풀이’로 불려졌다. 이후 모든 집회에서 애국가 대신 불려지는 민주화의 염원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를 담고 있다. 정부의 광주항쟁 기념식에서도 불려졌으나, 2010년 이명박 정부는 이를 ‘방아타령’으로 대신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백 선생님은 전두환에 맞선 진짜배기 투사이고, 고문으로 인해 많이 상하시기도 한 분이다. 고등학교 시절 형들과 나는 당시 함석헌 선생님이 펴내시던 『씨알(아래 아)의 소리』라는 잡지를 누가 먼저 사는가 경쟁하기도 했다.

    그 잡지는 걸핏하면 판매금지가 돼서 빨리 사지 않으면 볼 수가 없었다. 그 잡지에 실린 글 중에서 유독 백기완 선생님이 딸에게 주는 글이 좋았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와 같은 책을 즐겨 읽었던 기억이 난다.(노동운동을 했던 선생님의 딸은 지금 성공회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아무튼 백기완 선생님은 87년 김영삼과 김대중의 후보 단일화를 위해 출마하셨고, 결국 그것을 말하면서 후보를 사퇴했다. 나는 공장에 다니느라 가서 보지 못했지만 87년 대통령 선거 유세 때 대학로를 가득 메운 군중과 그 앞에서 포효하던 백기완 선생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민중당 창당대회 모습. 

    이재오, 김문수도 참여했던 민중당

    그 때부터 진보적 대중정당을 만들려는 우리들의 노력이 시작되었다. 88년에는 민중의 당이 있었지만 총선에서 득표를 많이 하지 못해 금방 없어졌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계속 이어졌고 마침내 90년 4월 13일 ‘민중의 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연합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10일 51개 지구당에 당원 3천여 명의 당원을 가진 민중당이 창당된다. 발기인 3,520명 중에서 대부분이 노동운동가였다. 

    지금 돌아보면 웃기는 얘기지만 지금 한나라당의 실세 이재오도 그 당의 주요 구성원이었고, 역시 한나라당의 경기도 지사를 하는 김문수는 당시 민중당을 만들기 위한 ‘노동자 진보정당 건설 추진위원회’의 위원장이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긴 것이다. 한 때 누가 무엇을 주장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가 무덤 속에 들어갈 때 그 사람의 신념이 무엇이었는지가 판가름 난다. 

    나는 진보적인 가치를 가지고, 그 어려움을 뚫고 진보정당을 하자고 하던 사람이 전두환, 노태우를 계승하고 있는 한나라당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된다. 물론 그들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고 변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잡기는커녕 호랑이 흉내를 내면서 살아가는 거 같다.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훗날 역사의 평가겠다. 

    일제시대를 살았던 이광수나 최남선 같은 유명한 문필가들도 결국은 변절했다. 3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해방’에 대한 꿈을 가진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이대로’ 계속 갈 것 같은 생각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내 이름이 뭐였지?"

    그러나 역사에 대한 낙관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 낙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베트남의 혁명가 호치민은 “혁명가는 무엇보다도 낙관적이어야 하며 결국 승리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칼 마르크스의 꿈이 언제 실현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2천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지만 그것도 아직 꿈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한다.(『호치민 평전』 218쪽과 556쪽에서 인용) 우리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민중당 활동은 재미있었다. 공장과는 달리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술을 마시면서 혹시라도 내 이름이 나올까 걱정하던 긴장도 사라졌다. 이제 당당하게 내 이름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런 긴장감에서 풀려난 해방감을 너희들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까?

    한번은 술을 마시는데 친구가 “야, 근데 내 이름이 뭐였지?”라고 물었던 기억도 있다. 자기 가명을 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나는 지역에 따라, 조직에 따라 다른 가명을 만들기도 했다. 지금 당시 운동했던 사람들을 이름으로 말하면 잘 모른다. 직접 봐야 아는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지하와 지상은 차이가 엄청 컸다. 

    진보정당에 대해 반대하던 사람도 많았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여전히 정권이 국가보안법을 휘두르고 있으니 자신들의 이념을 지키기 위해서는 할 수 없이 몰래 숨어서, 지하에서 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합법적으로 만드는 정당은 자신들이 내세우는 혁명이론을 변질시키고 결국은 개량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은 개량화된 진보정당일 뿐이기 때문에 사회주의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다만 변화된 정세에 맞게 조직의 일부분을 공개하고 있다. 그러나 항상 탄압에 대응하기 위해 지하조직화하고 있다. 당원을 다 공개하지도 않는다. 그런 정당의 모범은 러시아 혁명기에 레닌이 보여주었다. 소위 전위정당이라고 한다. 

    진보정당 반대론

    정반대의 측면에서 비판을 가한 사람들도 있었다. 소위 야당과 연합하여 정권을 바꿔야 하는 데 적전분열(敵前分裂)이 된다는 논리였다. 김영삼은 이미 군부와 타협했으므로 남은 것은 김대중이었다. 김대중에 대해 ‘비판적으로 지지’한다는 기묘한 논리가 동원되었고, 그런 입장에 선 사람들이 민중당을 비판했다.

    민청련 운동을 하고 이후 노무현 정권 때 장관을 지내 김근태와 같은 사람들은 ‘진보정당 시기상조론’을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기상조로 반대했던 사람들이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진보정당에 결합하지는 않았다. 

    이처럼 좌우의 날선 비판을 딛고 민중당은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91년 지방의회 선거에서는 42명이 출마하여 1명이 당선되고 출마지역에서 13.27%라는 상당히 높은 지지를 받기도 했다. 나는 민중당 활동을 하면서 진보정당 운동에 처음으로 몸을 담갔다.

    우리는 지구당 사무실에서 ‘자본론 강의’도 하고, 각종 소모임을 통해 노동자들의 학습모임도 만들고, 부천역 앞에서 선전홍보전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한번은 부천역 앞에서 유인물을 나눠 주다가 모두 역전 파출소로 끌려가기도 했다.

    그들은 거세게 항의하는 우리에게 파출소 안에서 천장에 대고 권총을 꺼내 공포탄을 쏘았다. 그렇다고 기죽을 우리가 아니어서 싸움은 더 커졌고, 다음날 한겨레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나기도 했다. 우리는 끌려간 것보다 당시 생소했던 민중당 이라는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을 더 좋아라 했다. 막 생겨나기 시작한 노동조합에 대한 지원과 연대를 통해 점차 지역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90년 벽두에 노동조합의 전국조직이 만들어지고, 진보정당이 창당된 것은 이후 진행될 90년대는 80년대와 전혀 다른 질의 운동이 전개될 것을 예고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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