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20을 쥐20으로 말할 수 있게 허하라"
    2010년 11월 06일 01:4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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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피로가 가시지 않는 것입니다. 어제 최인훈의 <광장>과 김영하의 <빛의 제국>을 중심으로 해서 한국의 ‘광장'(공공영역)과 ‘밀실'(개인영역)에 대한 발표를 했는데, 시차에 따른 피로와 겹쳐져서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습니다. 한데, 발표는 재미있었습니다.

한국의 광장과 밀실

그 요지 중의 하나는 한국에서의 공공영역, 즉 공공성을 목적으로 하는 ‘소통’과 ‘연대’의 절대적 부족이었는데, 끝나고 나서 청중 한 분은 아주 재미있는 반론을 폈습니다. 공공영역이 과연 한국에서만 왜곡되느냐, 어느 자본주의 국가에서나 과연 국가와 자본이 공공영역을 교묘하게 조종하거나 거기에서의 반대자들의 담론을 내몰아버리는 각종의 작전을 펴는 것이 아니냐는 건 반론의 취지이었습니다.

저는 물론 그 근본 취지에 동의했습니다. 유럽이라고 해서, 과연 반자본주의 담론 같은 ‘불온한 서사’가 공공영역에서 언제 주도적 역할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공공영역이라고 해서 그 완전한 자율성을 오늘날과 같은 체제 하에서는 그 누구도 보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한국과, 혁명의 경험을 갖고 있는 유럽 여러 나라 사이에서는 ‘작지만 큰’ 차이도 없지 않아 있다고 제가 덧붙였습니다. 한국 같으면, 끝없는 대필요구와 착취, 멸시, 그리고 대필을 요구한 ‘실세’들의 약속 위반에 세상에 대한 믿음을 잃은 비정규직 교수는 어떻게 대응합니까?

절망해서 자살하는 것인데, 이렇게 자살한다 해도, 경찰들의 수사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것이고, 세인들이 이 사건에 대해 곧 망각하고 맙니다. 연대가 불가능하거나 너무 어려운 구조다보니 피착취 계급의 한 무력한 구성원이 ‘공석직’ 착취에 덧붙여진 사적인 착취로 힘들어져 세상을 떠나도 국가도, 그 어떤 다른 피착취자들도 그를 도와주려 하지 않거나 도와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권력이라는 엄청난 돌에 깔리면 그저 죽는 법 밖에 없죠. 그런데 유럽 같은 경우에는 교수노조가 비정규 강사까지 받아들여 일단 대필 요구가 들어오면 노조로 뭉친 동료부터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요구와 잦은 약속 위반에 지쳐버린 비정규직 지식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는 적어도 거기에서는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나 여기에서나 다 같은 자본주의지만, 많은 노동자의 생사 여부가 달라질 만큼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하긴 합니다.

한국의 광장과 유럽의 광장

또 하나의 차이라면, ‘말’에 대한 권력자들의 태도의 차이일 걸요. 구미권에서도 G20와 같은 각국 지배계급 우두머리들의 모임이 있을 때마다 경찰 폭력에 대한 시비가 일어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데모, 즉 ‘행동’에 대한 탄압이라는 형태의 폭력입니다.

경찰의 입장에서 지나치다고 판단되는 행동은 ‘처벌/진압’의 미명 하에서 폭력적으로 억눌려지지만, G20에 대해서는 그 무슨 ‘말’을 해도 그 누구도 관여하지 않습니다. 공황을 만들어놓고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무능한 지배자라고 공공연하게 외쳐도 문제 될 게 없다는 것이죠.

혁명을 거친 나라 같으면 적어도 공개 발언의 자유 정도는 지켜지는 경향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최인훈이 이야기한 ‘광장’은 아닙니까? 그러면 한국에서 이와 같은 ‘광장’을 연출해보면 과연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 글을 보시는 분들께서는, G20홍보물에 ‘쥐’를 그렸다가 졸지에 ‘공안사범’이 된 한 대학 강사의 이야기를 이미 보셨을 것입니다.

다소 유머 감각이 섞인 형태로 상당수의 국민들로부터 혐오를 받는 현 한국 정권의 ‘G20’ 호들갑을 비웃은 것뿐, 즉 ‘광장’에서 자신의 의사 표현한 것뿐인데, 이는 결국 시국사범이 되는 길이었습니다. "G20 방해범"? 여기에서는 물론 ‘선진 외국’에 대한 억제못할 아부 기질도 십분 발휘되지만, 그와 동시에 ‘말’ 내지 ‘표현’에 대한 아주 특별한 감각도 감지됩니다.

‘광장’이 있는 합리적 구조 안에서는 말이란 그저 개인의 권리에 속하지만, 여기에서는 말 등의 표현은 공동체(의 지배자)를 해칠 수 있다고 믿는 어떤 ‘주술력’을 보유하는 것으로 믿어지나 봅니다.

말의 주술력

초자연적 주술력을 보편적으로 신앙하는 전근대 사회들은 말을 철저하게 통제하려 하죠. 조선시대 같으면, ‘괘서’ 사건들은 국가적 문제이었습니다. 양재 근방에 걸린 괘서가 전국 민심을 선동할 실질적 힘을 갖지 못해도 ‘감히’ 주상마마나 그 충신들을 모독하는 내용이라면 그 자체는 ‘신성모독죄’에 해당됐습니다. 권력이 신성화돼 있는 것은 전근대 사회니까요.

근대적 권위주의 사회들도 그러한 전근대적 형태를 많이 닮았죠. 천황폐하를 ‘감히’ 말로 모독했다가 감옥에 갔다오는 조선인들은 일제시대에 수두룩했으며, 김 부자의 ‘성상’을 (어쩌면 본의도 아니게) 훼손했다가 ‘특별독재구역’으로 가야 하는 북한인들 역시 적지 않았습니다.

스탈린 초상화 훼손죄로 3~5년 노동교화형을 받는 소련 시민들도 1953년 이전에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구조에서는 ‘말/표현’이란 공동체(의 신성화된 지배자)의 철저한 통제를 받아야 하는 것이고, 개인 권리가 아닌 공동체(지배체제) 관리 사항에 속하는 것입니다. 자율적 개인도, 그 개인들이 소통하는 광장도 원칙상 있을 수 없는 구조죠.

일제시대는 우리에게 ‘치욕스러운 과거’고 북한은 한국 보수주의자들의 ‘적대적 타자’입니다. 그런데 주상마마께서 소집하신 ‘천하제후의 총회’에 대해 ‘감히’ 공개적으로 풍자한 개인을 ‘공안사범’으로 다루는 것은, 과연 일제시대 형법이나 북한의 처벌 관행과 무엇이 다릅니까?

개인의 권리, 표현의 자유, 개인의 자율과 자율적 개인의 소통에 대한 근본적 개념이 아직 통념화되지 못한 곳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봐야 합니다. 물론 냉소주의와 배금주의 이외에 그 어떤 주의와도 무관한 한국 지배자들이 말의 ‘주술력’을 진짜로 믿는 건 아니지만, 그러한 주술력이 인정됐던 전근대의 관행을 그저 그대로 이어받아 계속 이용하는 것입니다. ‘선진화’돼간다는 나라에서 말입니다. 울어야 하는지, 웃어야 하는지 정말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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