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386세대, 광주세대라 불러라"
        2010년 09월 17일 10:31 오전

    Print Friendly
    흐르는 시간의 허리를 예리한 칼로 잘라낸 ‘단면도’에 새겨진 것들, 수많은 사람과 사람, 그들의 얽히고 섥힌 사연과 사연,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역사’가 된다. 한국 현대사에서 1980년이라는 시간대를 횡으로 자른 ‘단면도’에는 붉은 피와, 꿈틀거리는 거대한 저항,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열망과 이를 저지하는 군홧발들이 ‘광주’라는 이름으로 새겨져있다.

    집단적 분노, 집단적 공포, 집단적 목표가 가능했던 80년대는 1980년 5월 광주라는 ‘시간의 횡단면’에서 출발한다. 많은 젊은 이들은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을 찾아서 가족을, 교정을 버리고 홀연히 현장으로 떠났으며, 화해보다는 투쟁을 선택했다.

    386이 486으로 되면서 그들 중 일부는 기득권층이 됐으며, 과거를 훈장 삼아 팔아먹으며서 현재를 배반하고 있다. 이 글의 필자는 386세대이지만, 그런 호명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광주 세대’라 칭한다. 해야 할 일을 찾아서 떠났던 그때의 20대가 이제 흰 머리, 성긴 머리의 50대 중년이 됐다.

    그때를 시작으로 자신의 30년을 되돌아본다. 회고를 위해서가 아니라, 공유를 위해서다. 자신의 살과 뼈 그리고 피에 녹아서 ‘육화’돼 있는 그 경험을, 역사로도 배우지 않고 있는 후배 세대들과 공유하기 위해서다. <레디앙>이 1980년부터 2010년까지 ‘그의 역사’ 얘기를 들어보는 이유다. 이 글은 필자가 딸에게 들여주는 형식으로 작성한 것이다. <편집자 주>

    촛불이 시킨 글쓰기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고 했다. 또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얘기한 사람도 있다. 너희들은 역사를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촛불’ 때문이었다. 내게는 의미있는, 그러나 너희에게는 그저 별의미가 없거나 다른 의미를 가진 거리를 지나가면서 문득 지난 역사를 너희에게 말하고 싶어졌다. 특히 시청 앞이 그랬다. 너희는 붉은 악마들의 월드컵이나 촛불이 떠오르겠지만 내게는 87년 6월 항쟁의 정점이었던 연세대학교 학생이었던 이한열의 장례식을 치렀던 장소로 기억된다. 

       
      
       
      
       
      

    하지만 벌써 20년도 넘은 옛날 이야기였고, 너희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단지 오늘만이 아니라 과거를 돌아보았다. 또 그 과거에 대해 너희 세대가 거의 모르고 있다는 사실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아니 우리 아버지 세대가 그랬듯이 우리 역시 너희에게 우리가 살았던 과거에 대해 아무 것도 얘기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이런 차이를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글을 쓰기로 했다. 아마도 그 자리에 참석한 많은 내 또래 부모들이 그랬을 것이다. 그 과거는 현재와 어떻게 닿아 있는가?

    나는 역사란 “우리 모두가 온 몸으로 써 나가는 것”이라고 일단 말하고 싶다. 언젠가 베트남 배낭여행을 하면서 외국 사람들에게 “한국역사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반은 비극이고, 반은 희극이다(half is tragedy, half is comedy)"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외세에 의한 분단이 되고, 전쟁까지 치른 나라가 다시 다른 나라에 침략군으로 들어간다. 베트남이 그렇고, 이라크가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우리가 서 있는 현실은 지난 시기 우리 아버지 세대 모두가 ‘온 몸으로 써 온 역사’다. 고등학교 때 늙은 세계사 선생님이 “객관적인 주관적 의식을 가져라”라고 강조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도대체 객관화된 주관적 인식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부터 최대한 객관적으로 1980년부터 2010년까지의 한국 현대사를 말하려고 한다.

    객관화된 주관

    한 개인이 겪은 얘기가 중심이기 때문에 주관적일 수밖에 없겠지만. 내가 너희들에게 광주항쟁에 대해 얘기하면 너희들은 마치 내가 4.19에 대해 얘기를 들었던 것처럼 먼 옛날 얘기로 들릴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그 과거 없이 어떻게 현재가 있을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해방이후 우리 역사는 10년을 주기로 커다란 파동을 겼었다. 그리고 조금이라고 앞으로 전진 하려고 하면 어김없이 그에 대한 반동이 있었다. “역사란 도전에 대한 응전(應戰)”이라고 토인비가 말했을 때 그것은 한국사회에서 지배자들이 해 온 행동에 딱 맞아왔다. 

    1950년

    해방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우리는 남과 북으로 나뉜 채 전쟁을 했다. 수백만이 죽고 다친 한국전쟁의 흔적은 고스란히 현재에 투영되어 있다. 해방의 기쁨은 5년도 못되어 동족간의 전쟁으로 끝났다. 한국전쟁 당시의 사상자 수를 보면 얼마나 큰 상처를 남겼는지 알 수 있다. 

       
      

    이 전쟁 이후 “빨갱이”라는 단어는 우리 모두를 아프게 억누르는 단어가 되었다. 전쟁은 어떤 사상을 가졌는가와 무관하게 우리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전쟁이 끝나고 난 뒤 일제에 붙어 치부해 온 자들은 고스란히 현재의 지배계급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를 “청산하지 못한 역사”라고 얘기한다. 프랑스나 독일 등과 객관적으로 비교해 보면 우리가 청산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 진다. 한국전쟁을 통해 일본은 자본주의가 급격하게 성장하고, 미국은 전쟁 이후에 닥친 불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 

    1960년. 

    이승만의 독재와 부정선거에 맞선 4.19 학생의거가 있었다. 부패한 권력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총으로 백성들을 죽이면서까지 권력을 지키려고 한다.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죽은 김주열이라는 학생의 죽음은 87년 6월 항쟁 때 최루탄 직격탄을 맞아 죽은 이한열과 같은 모습이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는 것을 역사는 반복하여 보여준다.

       
      

    무려 272명이라는 젊은 피를 역사에 바침으로서 한발 더 민주주의를 향해 나가려는 순간 1961년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라는 반동을 맞게 된다. 그리곤 숨이 막히는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야 했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통해 한 탄압은 고스란히 전두환에게서 반복된다. 

    1970년 

    전태일이라는 한 젊은 노동자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며 온 몸에 기름을 붓고 분신했다. 경제성장이라는 자본의 일방적 논리 앞에 선 맨 몸 노동자의 피에 맺힌 절규였다. 이 죽음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노동운동이라는 것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것은 노무현 정부 아래서 배달호, 김주익, 허세욱 등 수많은 노동자들의 분신으로 반복되었다. 심지어는 80년대에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사람들이 많이 정권에 참여했던 소위 ‘참여 정부’아래서 농민 2명과 하중근이라는 건설노동자가 집회를 하는 도중에 경찰의 곤봉에 맞아 죽기도 했다. 정권은 바뀌어도 노동자의 열악한 처지와 탄압은 변하지 않고 있다.

    1980년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을 시작으로 피기 시작한 민주화의 봄은 바로 뒤이은 전두환의 총칼 아래 다시 얼어붙는다. 무려 만 명에 가까운 광주의 노동자와 시민들이 죽거나 다치고, 연행되었다. 

       
      공식적인 기록만 이럴 뿐이다. 정확한 통계는 여전히 모른다. 사망자 240명, 행방불명된 사람 409명, 부상자 5,019명, 기타 2,052명으로 집계된 통계도 있다. 민간인 168명, 군인 23명, 경찰 4명 등 총 195명 사망, 부상자 4,782명, 행방불명자 406명(정부 인정은 70명뿐)이라는 얘기도 있다.

    80년대 내내 감옥은 전두환에 맞서 투쟁하다 들어 온 학생들과 노동자로 넘쳐 났다. 통계에 의하면 80년부터 83년 사이에 집회 및 시위로 구속된 학생들의 숫자만 1,400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것은 현재 촛불집회를 전후하여 이명박 정부가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연행하고, 구속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통계숫자에 내가 포함이 되어 있다. 웃기는 일이다. 도대체 무엇이 전진하고 있는가? 내가 철이 들기 시작한 1980년 이후 정권이 몇 번 바뀌었지만 한 해 1,000명 이상의 구속 노동자, 학생이 생기는 우리의 역사는 거의 바뀌지 않았다.

    80년까지의 이런 역사의 흐름을 배경으로 그 이후 이야기를 너희들과 함께 해보려 한다. 90년과 2000년은 어땠는가? 그리고 2010년은 어떤 역사의 변동을 가져올 것인가? 

    이것은 한 개인이 살아 온 이야기이지만, 결국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로 내가 겪었던 것을 중심으로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겪고, 고민하고, 실천해 온 과정을 쓰면서 너희들이 그 시대와 현재를 연결시키는 역사적 안목을 가지기를 소망한다. 

    광주세대 

    우리가 살아왔던 시대를 사람들은 소위 ‘386 세대’라고 이름 붙였다. 지금 너희 세대를 ‘88만원 세대’라고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과거에도 1960년 4.19 투쟁을 했던 사람들을 4.19 세대,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했던 1964년의 한일회담을 반대하면서 투쟁했던 사람들을 6.3 세대라고 불렀던 것과 마찬가지로 숫자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이다. 

    일본의 경우에도 1960~70년대에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을 <전공투 세대> 로 부르기도 하고, 유럽의 경우 1968년도에 학생운동이 왕성했는데 이때의 사람들을 <68세대>라고 부르기도 하는 데 이것을 참고하기도 했겠다. 아무튼 이전 세대와 다른 점을 구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라고 생각하면 쉽겠다. 

    인터넷 검색을 하면 아래와 같이 386 세대를 정의해 놓았다.

    386 세대(三八六世代)는 199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말로, ‘30대, 80년대 학번, 60년대 생인 세대’를 말한다. 주로 1980년대에 학생운동을 통해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세대를 통칭한다.

    386 세대는 199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말로, ‘30대, 80년대 학번, 60년대 생인 세대’를 말한다. 주로 1980년대에 학생운동을 통해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세대를 통칭한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만들어낸 말이긴 하지만 여기에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다. 노동자가 없다. 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우리 역사가 거의 그랬다. 함께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어도 노동자들은 없다. 이후에도 반복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의문을 가지는 부분이고, 너희들도 그 이유를 고민해 보길 바란다.

    "386에는 노동자가 없다"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80년대 민주화 투쟁의 성과는 학생들만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들의 각성과 그에 따른 끊임없는 투쟁에 의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모습을 그나마 유지하게 되었다. 어쨌든 386 세대는 시기적으로 보면 전두환 대통령이 들어선 1980년 제5공화국 때부터 민주화 투쟁을 했던 노동자를 포함한 대학생 또래들의 세대를 말하는 셈이다. 

    내가 386세대로부터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바로 1980년부터 얘기를 시작하기 위해서다. 386세대가 언론이 붙여 준 이름이라면 나는 “광주세대”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80년 광주에서 벌어진 항쟁의 역사가 그 시대를 살아 온 모두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짓누름’은 아마도 우리 세대에게 있어 내 아버지 세대의 “6.25 한국전쟁”의 무게만큼 우리 세대 전체에게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1980년의 역사가 현재로 이어지고 있고, 그 과정에 너희 세대가 살고 있다. 물론 1980년 이전의 역사도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19년간의 장기집권으로 요약되는 오랜 군사독재정권의 시대지만 그에 대해서는 따로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 아무튼 1979년 10월 26일 오랜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이 부하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생기면서 1980년이 시작된다. 

    나는 비교적 평범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대학, 교회, 야학을 거쳐 안산과 부천, 그리고 서울과 울산 등에서 노동운동을 할 때 나보다 훨씬 운동을 잘 하고, 해박한 지식을 갖고, 더 열정적으로 운동했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집안이 어려워서, 여자이기 때문에 중도에 그만둔 사람들도 많다. 내가 운이 좋았던 셈이다.

    이 글은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사람들 중에 겁 많고, 소심하고, 이기적인 성격을 가진 한 개인이 주로 자기의 경험을 통해 역사를 얘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 시대 전체를 껴안고 살아 온 수많은 사람들 중의 아주 평범한 한 개인의 얘기라는 점을 글을 시작하기 전에 분명히 해 두고 싶다.

                                                               *  *  *

    필자소개 – 이근원

       
      ▲ 필자

    대학 입학과 동시에 전두환을 만나 인생이 바뀜. 원래는 학교 선생이 소망이었음. 학생운동 이후 용접공으로 안산 반월공단, 서울, 부천, 울산 등에서 노동운동을 함.

    당운동으로는 민중당 및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을 경험함. 울산을 마지막으로 운동을 정리할 뻔 하다가 다행히 노동조합운동과 접목. 현재의 공공운수노조(준)의 전신 중의 하나인 전문노련 활동을 통해 공식적인 노동운동에 결합히게 됨.

    민주노총 준비위 및 1999년 단병호 위원장 시절 조직실장, 국민승리 21 및 2002년 대통령 선거시 민주노동당 조직위원장 등을 거침. 드물게 노동운동과 당운동을 경험하는 행운을 가짐. 현재는 공공운수노조(준)의 조직팀장으로 있음. 오십을 갓 넘겼으며 고3 딸과 초등학교 5학년 딸을 두고 있음.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