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정치의 갈림길에서 묻다"
        2010년 08월 26일 03:4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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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정치위원회는 왜 ‘성정치’란 단어를 쓸까?

    성정치위원회 활동가로서 성정치란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묻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은 곤혹스럽다. 혹자는 여전히 ‘성소수자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사실, ‘성소수자’를 ‘성소주자’라고 부르지 않는 것만 해도 사람들이 ‘기특해’ 보일 때도 많다. 그나마 대중화된 ‘성소수자’란 이름 대신 ‘성정치’란 이름을 굳이 채택한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성정치위원회 활동가들이 성소수자위원회란 이름 대신 성정치위원회란 이름을 채택한 것은 성소수자가 겪고 있는 듯 한 문제와 차별들이 비단 성소수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문제의식이 컸기 때문이다. 성소수자들이 이성애중심적, 가부장적 배제구조 속에서 ‘보이지 않는’ 차별을 감내하고 살아가야 한다면, 비성전환 이성애자들은 ‘정상가족’이라는 이성애 가족의 롤모델에 맞추어 살기 위해 아둥바둥 살아가야 한다.

    예를 들어, 35세 미만 단독세대에게 국민주택기금 대출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성소수자를 비롯한 결혼하지 않는 단독세대들에 대한 가시적 차별이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 얘기한다면 다른 한편으로 비성전환 이성애자들은 그 차별을 받지 않고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하게, 어쩔 수 없이 가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일부 성소수자들 또한 이 사실을 인식하고 어쩔 수 없이 결혼에 뛰어들기도 한다).

    사실 이 한국 사회 내 차별과 배제의 구조 속에서 그나마 경쟁력 있게 살아남는 사람들은 가족을 통해 유지될 수 있는 재산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즉, 성소수자의 문제는 다르게 이야기하면 이성애 가족을 왜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 이성애 중심적인 가족 정치가 은폐시키는 문제들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성소수자 정체성에 국한시키지 않겠다는 것은 일면 단단하게 보이는 비성전환 이성애자 정체성 또한 문제 삼겠다는 의미이다. 당신들도 ‘안전한’ 정체성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적 양극화가 심화될수록 중산층 가족 정치 또한 그 위기를 더해 가기 마련이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기존의 전통적 가족을 회고하고 기존 가족이데올로기에 호소하는 것은 답이 될 수 없다. 중산층 가족의 신화와 위기를 직시하고, 가족의 의미를 끊임없이 재구성하여 재창조하며, 공동체적 유대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현재의 경제 위기와 민주주의 위기는 성소수자 또한 그간의 정체성 정치에서 나아가 의제의 정치, 섹슈얼리티의 정치, 가족 구성의 정치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성정치위원회를 성정체성 만으로 회원자격을 두지 않고 성정치에 동의하는 당원들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틀로서 마련한 것 또한 이 때문이다.

    새로운 진보에의 요구와 진보신당

    간단하게나마 성정치위원회의 문제 의식을 설명한 것은 우리의 문제 의식과 입당이 그간 진보 정치의 행보와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좀 더 직접적으로 얘기하자면, 2008년 분당 사건이 그 본질이 무엇이었든 ‘새로운 진보’, ‘새로운 진보정치’의 상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제시되었고, 생태, 평화, 여성주의 등의 상이 새로운 진보의 창구로서 제출되었다.

       
      ▲ 2009년 퀴어퍼레이드 (사진=동성애자인권연대)

    나를 비롯해 그 동안 진보정당에 무관심했거나, 혹은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본인의 일로 여기지 않았던 활동가들은 분당 이후 진보정치를 ‘새롭게’ 세우겠다는 의지에 관심을 기울이며 ‘새로운 진보정치’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의제로서의 성정치를 전면화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진보신당에 결합하였다. 이는 일면 기존 ‘진보정치’라 는 고정된 틀의 정체성이 약화됨에 따라 벌어진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과거 민주노동당 분당 과정을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분당 자체가 진보 헤게모니의 위기의 표현이라고 생각했고 새로운 진보의 형식과 내용을 갖춤으로써 이를 극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이러한 헤게모니의 위기는 과거 진보가 포괄하는 대중이 너무나 협소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른바 88만 원 세대, 비정규직 등을 과거 진보정당이 포괄해내지 못함에 따라 NL-PD의 대립구도가 대중에 대한 헤게모니를 확장해내기보다는 서로의 경쟁 속에 갉아먹는 구도로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진보정치의 위기에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나는 여기에 노동자 정체성을 다른 정체성과 다르게 분리하는 분할 정치가 한 몫을 담당했다고 생각한다. 소위 민주노총이 진보정치의 주요한 추동력이었지만 민주노총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 또한 이러한 분할 정치에서 진보 정치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함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분당 과정은 자영업자나 비정규직 등 조직되지 않은 채 노동을 팔아야 하는 사람들과 새롭게 만나겠다는 각오로 읽혔다.

    분당이 곧 ‘새로운 진보’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분당 자체가 그 ‘새로운 진보’의 가능성을 담지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최근에서야 많은 얘기들을 들으면서 깨닫고 있는 중이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정당에서 과거 민주노동당에서 담지하고자 했던 최소한의 진보정치 발전의 노력들조차 일구어내지 못해내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내가 본 상당수의 활동가들은 그럴 노력을 기울이려는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없는 살림을 쪼개어 쓰느라 어쩔 수 없이 역정을 부리는 관리자의 모습들이었고 전장에서 진 패잔병들의 모습이었다. 피로에 지친 그들을 달랠 방법을 잘 모르겠기에 나 역시도 쓰디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려다 삼키곤 하였다. 전에 몸담고 있었던 당에서 나왔고 방향성은 제시되었지만 기존에 기본적으로 해왔던 방식을 버리기는 어렵고 다른 진보정당과 무한대로 경쟁하는 조건에는 어쩔 수 없이 노출되어 있었던, 올 데 갈 데 없는 모습들이었던 셈이다.

    내부 사정이야 어쨌든, 성정치위원회 활동가들 혹은 촛불 당원, 지못미 당원 등 분당 이후 새로운 외연 확대들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외연 확대가 결과적으로 새로운 진보정치 생성의 흐름으로 만들어졌다고는 보기 어렵다. 고정된 틀의 붕괴는 새로운 흐름과 리더쉽들이 유입될 수 있는 조건은 만들어낼 수 있으나, 결과를 창출해 내기 위해서는 이런 흐름들의 기존의 반성과 결합될 수 있는 형태와 체계를 갖추어야 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과 같은 내부 사정, 특히 주체적 조건과 민주노동당과 경쟁을 해야 하는 조건 등은 그런 형태와 체계를 갖추어내기에는 너무나 제한적인 조건들이었다. 더더욱 아쉬운 부분은 기존 진보정당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정당’ 으로의 호감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새로운 호감을 가진 이들을 어떤 틀로 묶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나로서나 성정치위원회로서도 우선 새로운 의제를 고민하고 만들어내는 데에 집중했을 뿐 이러한 틀이 어떻게 형성될 수 있을지, 주체나 역량적 조건들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지에 관한 고민은 부족했다고 본다. 일전에 생태, 평화, 소수자, 여성 의제 등이 어우러지는 ‘무지개연대’라는 틀이 진보신당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고 제시한 바 있으나 내부 한계 때문에 제대로 작동되지 못했고, 이후 진보신당의 체계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은 삭제된 채 머물러 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정당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지역 운동, 생태, 여성, 88만원 세대, 비정규직 등 새로운 진보가 고민해야 할 숙제들, 방향들은 수차례 제시되었지만 이를 새로운 정당에 대한 호감을 갖고 들어온 이들과 어떻게 만나면서 틀을 만들어나갈 것인지는 각자의 머리속에만 존재한 채 공개적으로 논쟁되거나 ‘패’로 던져지지 않은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과거 진보정당운동 세대가 경험했던 ‘고정된 틀’이 ‘유연하면서도 새로운 세대에 적응하고 주체를 새롭게 형성할 수 있는 틀’로 전환되지 않고서는 ‘새로운 진보정치’라는 과제의 해결은 요원할 것이다.

    나는 진보신당이 갖추어야 할 ‘틀’이나 ‘방향’이 그저 연합정치/독자정치 구도 속에서 ‘규정’되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현재의 강제된 연합정치 속에서 외부적으로 규정된 정체성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연합이든 독자이든 새로운 진보의 생성이 가능하다는 자신감이 있어야만 걸어갈 수 있는 하나의 길일 뿐이다.

    속된 말로 연합 진로를 가더라도 이야기할 수 있는 우리의 내용이 있어야 하고 독자 진로를 가더라도 사람들에게 우리의 필요성을 각인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아니고 ‘사실 사람들에게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무엇이 다른지 설명하기 어렵더라’라고 한다면 그냥 과거 한 몸이었던 사람들끼리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화해를 하고 해후를 풀면 될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 하러 새로운 사람들에게 ‘진보신당의 필요성’을 역설하겠는가. 분당 후 새로이 들어온 사람들에게 ‘함께 가자’라고 설득하겠는가. 만약 우리가 새로운 진보를 만들어내겠다는 자신감과 공감이 없다면 과거 민주노동당을 놓고 비판했던 패권주의니 종북주의 등은 과거 헤게모니 투쟁을 정당화하려는 레토릭에 불과한 것이다. 그건 과거 싸움으로부터 생긴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도 하등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다.

    연합 노선/독자 노선을 결정해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보이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물어야 할 것은 우리에게 어떤 당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왜 현재 우리가 진보신당에 몸담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만약 우리에게 새로운 대중과 함께 진보를 만들어내겠다는 각오와 전망이 없다면 이런 물음들도 공허한 메아리로 맴돌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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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 토리 / 성정치위원회

    개별적 연구와 활동만으로 만족해 하다가 모 캠프 때 모 진보정당인의 눈물에 맘이 흔들려 최현숙 선거에 동참한 후 지금까지 진보신당 성정치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차별화된 진보운동과 성정치, 신좌파적 의제 확산에 관심을 갖고 연구, 활동을 병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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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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