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신체포기 각서를 쓴다”
        2010년 08월 19일 10:00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적게는 몇십 권에서부터 많게는 수백만 권씩 팔리는 책.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저자만을 기억할 뿐, 그 책에 들어간 수많은 노동은 알지 못한다. ‘출판.’ 그 중에서도 외주출판 노동자들의 근로실태는 열악하기 그지없다. 편집자, 디자이너, 번역가, 대필가, 글작가, 그림작가 등.

    이에 <출판노동자협의회>는 [외주출판, 노동을 말하다]를 통해 책 뒤에 감춰진 외주출판 노동자들의 노동에 주목하고, 그들 스스로 자신의 노동을 말하고자 한다. 노동시간과 노동강도, 통제방식 등 불연속적 노동환경에 처한 그들이 스스로 ‘권리찾기’에 나선 것이다.

    <출판노동자협의회는>는 이번 기획을 바탕으로 외주출판 노동자와 유사한 형태로 일하는 가내노동자의 노동권 확보를 위한 기틀을 마련하고, 향후 법적․제도적 권리보장을 위한 입법안을 확정한다는 계획이다.

    이번 연재는 상대적 약자일 수밖에 없는 외주출판 노동자들의 처지를 고려해 모든 글은 익명으로 처리될 예정이다. 이번 연재는 <출판노동자협의회>가 기획했으며 <레디앙>이 전한다. <편집자주>

    우리는 일러스트레이터(illustrator)이다

    누군가는 우리를 화가라고도 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우리를 삽화가라고도 한다. 그림을 그린다는 공통점에서 우리는 화가일 수 있겠지만, 갤러리나 화랑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화가들과는 작업의 성격이나 활동분야에서 차이가 있다.

    또한 삽화가라고 하기에는 삽(揷)이라는 한자의 의미처럼 우리가 항상 어딘가에 끼어들어가는 보조적인 그림만을 그리는 것은 아니기에 삽화가로 통칭되는 것에 다소 억울한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짧은 글이 일러스트레이터의 정체성을 논하는 글은 아닌 관계로, 일단 일러스트레이터는 우리의 생활 주변 어디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중 친화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라고 이해해주시면 될 것 같다.

    이렇듯 일러스트레이터들은 출판, 인터넷, 광고, 제품, 팬시 등등의 다양한 매체에서 다양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출판은 그 비중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다수의 일러스트레이터들이 몸담고 있는 분야이다. 그러나 출판문화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일러스트레이터가 처한 현실은 과연 어떠할까?

    일러스트레이터는 저작자이다

    이야기에 앞서 저작권(著作權, copyright)에 대하여 간략하게나마 설명하는 것이 일러스트레이터의 작업 환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싶다. 저작권법에서 말하는 저작물이란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을 지칭한다. 그리고 그러한 저작물과 저작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 바로 저작권법이다.

    저작권은 크게 ‘저작인격권’과 ‘저작재산권’으로 나뉜다. ‘저작인격권’이란 저작물과 관련하여 저작자의 명예와 인격적인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권리이며, ‘저작재산권’은 저작자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권리이다.

    ‘저작 인격권’에는 ‘공표권’, ‘성명표시권’, ‘동일성유지권’이라는 항목이 있다. 이 ‘저작인격권’은 저작자의 일신(一身)에 전속(專屬)되기에 타인에게 양도될 수 없음을 법이 정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인격에 관련된 부분들까지 침해받고 그 권리를 양도받기를 강요당하곤 한다.

    예를 들어 자신이 그린 그림이 들어간 출판물에 저작자의 성명이 표지되지 않기도 하고, 자신의 저작물이 타인에 의하여 편집되거나 변형되지 아니할 권리인 ‘동일성유지권’이 지켜지지 않고,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림이 난도질당하는 모습을 가슴 아프게 지켜봐야 하기도 한다. 몇몇 출판사의 경우는 양도될 수 없는 저작자의 인격에 대한 권리까지 양도받기 위한 계약서를 내밀기도 한다. 이는 저작권 침해에 앞서 심각한 인격 침해이다.

    이러한 문제는 저작자의 재산적인 권리인 ‘저작재산권’으로 넘어오면 더욱 심각해진다. 저작권은 여러 권리의 집합체이다. 각각의 권리들(복제권, 공연권, 공중송신권, 전시권, 배포권, 2차적 저작물작성권)은 특정한 방식으로 분할하여 사용할 수 있으며 저작자는 각각의 권리대로 이용을 허락할 수 있다.

    일종의 ‘원 소스 멀티 유스(one source multi use)’로써 저작자가 제작한 저작물은 여러 가지 매체에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고, 저작자는 각각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음을 저작권법에서 보장하고 있다. 그런데 엄연히 법으로 보장하고 있는 이러한 권리들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들이 계약이라는 이름으로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양도계약서=저작권 포기 각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저작권 양도계약서’라는 불공정하고도 불합리한 계약서로 대표된다. 많은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 ‘저작권 양도계약서’는 ‘신체포기각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신체포기각서’에 서명을 하는 순간 자신의 신체는 더 이상 자신이 것이 아니듯이 ‘저작권 양도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순간 해당 저작물은 더 이상 저작자의 것이 아니다. 클라이언트(의뢰인)들은 저작권을 일괄적으로 양도 받음으로써 이 모든 권리를 자신들의 뜻대로 무제한적으로 행사 할 수 있으며, 그에 따른 수익 또한 저작자에게 분배할 필요가 없다.

    일례로 국내 작가에 의하여 제작된 어린이 그림책 부분의 베스트셀러인 모 그림책의 경우 국내 시장에서의 눈부신 성공에 힘입어 해외 각국으로 수출이 되고 있고 최근에는 뮤지컬 공연과 각종 상품으로까지 그 활용 범위를 확장하면서 잘 만들어진 하나의 콘텐츠가 얼마나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빛나는 모든 성공의 결실이 해당 그림 작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서점에 놓여있는 이 그림책을 볼 때마다, 길거리에서 공연 포스터를 볼 때마다 우리는 가슴이 아프고 한없이 서글프다. 지켜보는 우리들의 마음이 이럴진데 해당 작가는 어떠할까?

    이처럼 기존의 원저작물을 바탕으로 번역, 편곡, 변형, 각색, 영상제작 등의 방법으로 작성한 창작물을 ‘2차적 저작물’이라 지칭한다. 저작권법에서는 설령 ‘저작권 양도계약서’를 쓰더라도 이 ‘2차적 저작물작성권’은 해당 저작자에게 유보되어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받고 있는 거의 모든 ‘저작권 양도계약서’에는 ‘2차적 저작물작성권’에 대한 양도조항이 빠지지 않고 친절하게 명시되어 있다. 이 ‘2차적 저작물작성권’은 앞서도 말했듯이 ‘원 소스 멀티 유스(one sou rce multi use)’의 방식을 통하여 많은 부가가치를 발생시킬 수 있는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권리이다.

    ‘저작권 양도계약서’를 통하여 이러한 모든 권리들을 양도한다는 의미는 해당 저작물이 해외로 번역 출판이 되던, 아트상품이 만들어지든, 영상물로 제작이 되든 기타 어떠한 다른 매체와 형식으로 만들어지든지 간에 작가는 그에 대한 아무런 권리가 없다는 뜻이다.

    세계화에 역주행

    그런 이유로 우리는 저작권을 일괄적으로 양도하는 ‘저작권 양도계약서’가 아닌 출판에서 있어서는 ‘출판권’에 한정하여 사용권을 설정하는 ‘출판권 설정계약서’를 쓰기 원한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의 이러한 바람과는 멀기만 하다.

    얼마 전 대형출판사인 ○○출판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범적이었던 기존의 ‘출판권설정계약서’에서 ‘저작권양도계약서’로 슬며시 돌아섰다. 더불어 몇몇 출판사들은 ‘출판권 존속기한’을 저작권법에서 정하고 있는 3년에서 5년으로, 이제는 10년으로까지 슬며시 늘리고 있다.

    이는 저작자의 저작권을 보호하는 전 세계적인 추세에도 역행하는 일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불행한 예감이라면 본격적인 전자출판 시장의 개막을 눈앞에 둔 지금 클라이언트(사용자)들의 이러한 역주행이 앞으로 더더욱 늘어날 거라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하에서 자본가가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 바탕에는 공정한 룰을 기반으로 하는 상호간의 동반자적인 인식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힘의 논리를 앞세워 일방적으로 착취하며 희생을 강요하는 구조는 당장은 어느 한쪽에 이익이 될지언정 서로 공멸하는 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억울하면 계약하지 말라고?

    배를 채우거나 배가 고프거나…….
    혹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부당하고 불공정한 계약이라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불공정한 조건에 대하여 수정을 요구할 수도 있지 않는가?”
    “그러한 불공정한 계약서라도 서명을 한 이상 당신들의 책임이지 않느냐?”

    모두 맞는 말씀이다. 사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이유로 이러한 계약서를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들 스스로에게도 분명 책임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러스트레이터가 프리랜서로 일을 하는 입장에서 한 개인이 거대 조직에 맞서 개인의 주장을 관철시킨다는 것은 지극히도 어려운 일이다.(그렇기에 연대가 필요하다.)

    극단적으로 이러한 계약서를 받을 경우 우리의 선택은 단 두 가지뿐이다.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배를 채우거나, 서명을 하지 않고 배가 고프거나 말이다. 과연 법과 계약 중 어느 것이 우선일까? 쌍방 간의 계약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불공정한 계약이 과연 어디까지 용납될 수 있는 것인가? ‘신체포기각서’ 또한 쌍방간의 계약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법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흔히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중에서도 인간의 감성과 지성을 집약한 출판은 한 나라의 문화 발달 정도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지표일 것이다. 그러나 저작자의 당연한 권리인 저작권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보호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문화 선진국이라는 말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며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 할 것이다.

    필자소개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