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년에 60권 번역 속 감춰진 비밀
    By 나난
        2010년 08월 12일 09:4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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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게는 몇십 권에서부터 많게는 수백만 권씩 팔리는 책.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저자만을 기억할 뿐, 그 책에 들어간 수많은 노동은 알지 못한다. ‘출판.’ 그 중에서도 외주출판 노동자들의 근로실태는 열악하기 그지없다. 편집자, 디자이너, 번역가, 대필가, 글작가, 그림작가 등.

    이에 <출판노동자협의회>는 [외주출판, 노동을 말하다]를 통해 책 뒤에 감춰진 외주출판 노동자들의 노동에 주목하고, 그들 스스로 자신의 노동을 말하고자 한다. 노동시간과 노동강도, 통제방식 등 불연속적 노동환경에 처한 그들이 스스로 ‘권리찾기’에 나선 것이다.

    <출판노동자협의회는>는 이번 기획을 바탕으로 외주출판 노동자와 유사한 형태로 일하는 가내노동자의 노동권 확보를 위한 기틀을 마련하고, 향후 법적․제도적 권리보장을 위한 입법안을 확정한다는 계획이다.

    이번 연재는 상대적 약자일 수밖에 없는 외주출판 노동자들의 처지를 고려해 모든 글은 익명으로 처리될 예정이다. 이번 연재는 <출판노동자협의회>가 기획했으며 <레디앙>이 전한다. <편집자주>

    나는 현재 전업 출판번역가로 살아가고 있다. 출판번역 하면 다들 무엇을 떠올리는가. 유창한 외국어 실력과 한국어 실력을 가져야 할 수 있는 일? 뛰어난 지식과 상식을 가져야 할 수 있는 일?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능력을 너무나 저렴한 가격에 사용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다. 아니,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돈 한 푼 내지 않고, 오히려 돈을 받아가면서 사용하려는 사람도 있다.

    200자 원고지 번역료가 1,500원

       
      

    내가 겪었던 피해 사례를 말해보도록 하겠다. 이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번역회사와 계약을 맺고 책을 번역하게 됐다.

    당시 나는 번역 경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번역회사는 번역료를 200자 원고지 당 1,500원(이게 또 그 회사에서 주는 최하 등급이란다) 밖에 주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나 탐나는 원고라 맡았다. 번역회사에서 원고지 300매 이상으로 구성된 그 책을 번역하는 데 준 시간은 고작 만 8일이었다. 그것도 엄연히 직장에 다니는 나한테.

    아무튼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면서 책을 완성해서 주었다. 그러자 번역회사에서는 또 다른 책을 주었다. 원고지 800매가 넘는, 내용조차 결코 녹록치 않은 그 책을 번역하는 데 준 시간은 꼴랑 3주일이었다. 번역료는 오르지 않았다. 아무튼 온 힘을 다해서 원고를 냈다. 그랬더니… 이 번역회사에서 대체 어떻게 나왔는지 아는가.

    내가 제출한 원고가 ‘너무나 오류가 많아서 출판사 편집자들한테 원성을 듣고 ‘빠꾸’를 먹었다’는 것이었다. 이후 번역회사 과장은 내가 낸 원고에서 문자 그대로 ‘생트집’을 있는 대로 다 잡아가며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된다’며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또 원고를 자기들 마음에 맞게 고칠 것을 지시했다. 잠깐, 그렇게 오류가 많은 걸 알면서 왜 자기들은 원고를 한 번 보지도 않고 그대로 출판사에 보냈단 말인가?

    그리고 이 사람 입에서 더욱 황당한 소리가 나왔는데, ‘당신은 이 따위의 실력밖에 없으니’ 앞으로는 자기네 번역회사 대표(이 사람도 출판번역가였다)가 진행하는 번역 강의를 들어야 일감을 준다는 것이었다. 엄청난 볼륨(나중에 한글판으로 나온 책을 보니, 약 1,000페이지에 달했다)의 원서를 내밀었다.

    두 달 내로 다 해 오란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자기네 대표의 번역 강의를 들어야 번역할 수 있고, 책에 내 이름 안 나간단다. 출판사에서 나를 너무 안 좋게 보고 있기 때문에 차마 내 이름으로 원고를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일감을 미끼로 번역강의 수강을 강요

    나는 일단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자리를 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쯤에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희미하게나마 알아차렸다. 이 번역회사는 번역 강의를 명목으로 수강생들에게 대리번역을 시켜 그 결과물을 출판사에 엉뚱한 사람 이름으로 납품할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를 거기에 끌어들이려 했던 것이고.

    주변의 친구들에게도 이 일을 말했다. 모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곳에서는 일하지 말라’고 했다. 결국 나는 다음날 더 이상 거래하지 않겠다고 하고 원서를 반납했다.

    문제는 일이 이 정도에서 끝이 나고, 번역료를 제 날짜에 정상적으로 받았다면 내가 지금 이런 글을 쓸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번역회사는 번역료도 제 날짜에 주지 않았다. 책이 발간된 지 2개월 만에 번역료를 주겠다는 내용의 계약서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번역료는 그 날짜가 한참 지나도록 입금되지 않았다.

    번역회사와 출판사에 모두 따졌다. 출판사는 분명히 번역회사에 번역료를 지불했다고 했다. 그런데 번역회사는 자꾸 아무 이유도 없이 지급을 미루기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결국 언제까지 돈을 주지 않으면 내용증명을 보내겠다고 했지만 역시 돈은 오지 않았다.

    번역료 지급을 요구하고, 주지 않으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내용증명을 보내고 나서야 앞서의 과장이 전화를 했다. 나더러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그딴 계약서에 뭐라고 써 있건 그게 뭐가 중요하냐. 너 말고도 다들 계약서 상에 적힌 날짜보다 미뤄서 받는데 왜 난리냐” 하는 것이었다. 방귀뀐 놈이 성내도 유분수지.

    그래도 돈은 준다고 했다. 결국 3~4회에 걸쳐 번역료를 다 분할납부 받고 나서야 일은 마무리 됐다.
    그 번역회사에서는 내 번역을 ‘도저히 못 써먹겠는 오역 투성이’라고 혹평하면서 내게 일감을 미끼삼아 번역 강의 수강을 강요했고, 번역료 지급까지 미뤘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번역 실력 갖고서도 그 번역회사에서 주던 단가의 두 배가 넘는 단가를 받고, 남이 한 번역도 감수해 주면서, 너무 많은 일에 치여 건강이 망가질 지경으로 일하고 있다.

    대한민국 번역시장의 현실

    최근 그 번역회사 대표 이름으로 검색해 보니 지난해에만 무려 24권의 책을 냈다. 책 한 권이 보통 원고지 2,000매 이상으로 이루어지는 걸 감안할 때, 1년에 24권을 하려면 쉬는 날 없이 매일 원고지 130매 이상을 번역해야 한다. 내 경험에 따르면 도저히 평범한 지력이나 체력을 가진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속도다.

    솔직히 의심스럽다. 그 때 번역회사 과장의 윽박지름에 넘어가 번역 강의를 듣는 조건으로 내 이름도 안 들어가는 책을 번역하고 있었더라면 이런 글을 쓰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분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잘난 출판번역을 한다는 내가 왜 이런 같잖은 상황을 당해야 했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외국어 공부 열풍이 불면서(더 정확히는, 영어공부 열풍이라고 해야겠지만) 기존 번역작품의 문제점도 활발하게 지적되고 있고, 번역하려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번역물의 질이 그에 비례해서 올라갔느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여전히 문제가 많은 번역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이유는? 번역가를 체계적으로 양성하고 번역가 및 그의 번역물의 퀄리티(Quality) 및 번역가에게 충분한 경제적 보상을 약속하는 시스템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독일은 고등학교서부터 공교육기관에서 번역을 가르친다. 국가에서 번역기술자격증도 수여한다. 그런데 이 나라에는 그런 과정은 전무하고, 번역을 배울 수 있는 길은 사설교육기관 아니면 대단히 진입장벽이 높은 소수의 통번역대학원 뿐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번역 수요는 이들 통번역대학원 출신자들만으로 다 메울 수 없을 만큼 크다.

    그러니 통번역대학원을 나오지 않은 번역가들도 일을 해야 한다. 문제는 회사 입장에서 볼 때 이들에게 충분한 번역료를 지급해줘야 할 명분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 번역가의 퀄리티를 입증해 줄 객관적인 자료가 우리 시스템에서는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을 시키는 입장에서는 번역가에게 충분한 돈을 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아무 경력이 없는 초보가 출판 번역 시장에 진입하기란 정말 상상을 초월하리만치 어렵다.

    정지영 사건은 빙산의 일각

    물론, 훌륭한 번역을 선보여 많은 번역료를 받는 번역가들도 있기는 있다. 그러나 그런 경지에 오를 때까지 버티기는 너무나 힘들다. 대우가 박하니 실력 있는 인재가 번역을 할 리가 없고, 외국어 실력도, 우리글 실력도,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성도 부족한 빈재들만 번역을 하겠다고 몰려든다. 그리고 이들 빈재들에게 사용자들이 많은 돈을 줄 리 만무하므로 빈곤의 악순환이 생기는 것이다.

    시장에 진입하기도 힘들고, 실력을 인정받아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기가 너무나도 힘든 이러한 번역계의 그늘 속에서 초보자들을 상대로 한, 번역교육을 빙자한 대리번역과 번역료 착취라는 독버섯이 자라나게 되었다. 정지영 대리번역 사건은 그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설령 출판사에서 해당 분야에서 그 실력을 검증받은 ‘실력 있는 인재’에게 번역을 맡긴다고 쳐도, 출판사에서 제시하는 번역료는 그 인재가 생각하는 자신의 몸값과는 너무 차이가 난다. 그러니 ‘밑에 애들한테’ 돈 안주고 대리번역을 맡기는 것이다.

    이상한 점은 또 있다. 우리보다 훨씬 번역문화가 발달한 서구의 경우조차도 한 번역가가 일생동안 50~60권 이상의 책을 번역하면 엄청난 다작 번역가로 인정받는다. 그런데 우리는 불과 10~20년의 활동기간 동안 200~300권 이상의 책을 번역한 번역가가 여러 명 있다. 이 중 어떤 사람은 1년에 약 60권 가까이를 번역한 적도 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은 나 혼자 뿐일까?

    번역과 번역가를 제대로 대우하라

    그리고 아무리 번역가의 퀄리티를 검증하는 시스템이 없다고는 하나, 번역가에 대한 출판사의 대우도 상당히 인색한 경우가 많다. 원고지 2,000매 짜리 책 한 권을 제대로 번역하려면 보통 3개월 정도가 소요된다. 월 최저임금을 90만원으로 잡았을 때 책 한 권을 번역하는데 따르는 경제적 대가는 최소 270만원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너무나 어이없게도 이 최저임금조차도 안 되는 경제적 대가만이 번역가에게 돌아가는 경우도 흔하다. 책을 인세로 계약할 경우 특히 그렇다. 물론 외국, 특히 유럽의 출판계에서도 번역서를 인세 계약하는 경우는 흔하다. 그러나 그들은 최소 10,000권 분량에 달하는 선인세를 주기 때문에 인세로 해도 아무런 경제적 문제가 없다.

    그에 비해 우리의 출판 환경은 어떤가. 초판 3,000권 고지가 무너진 것은 오래전이고, 심지어 초판 1,000권, 500권을 찍어내고 끝나는 책도 있지 않은가. 그런 책을 인세로 한다면, 그리고 그 책의 내용이 상당히 어렵고 전문적이라면, 도대체 어떤 번역가가 그런 책을 정성들여 번역하고 싶어 할까?

    21세기는 문화와 지식, 정보의 세기라고 한다. 신성장동력은 문화예술산업에 있다고도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같이 그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번역가에게 턱없이 싸게 일을 맡겨가지고서는, 번역가 지망생들의 돈과 노동력을 착취하는 악덕기업이 있고서는, 대리번역과 토막 번역이 판을 쳐서는 신성장동력에 필요한 기초지식과 정보를 제대로 다질 수 없다.

    아직 선진국에 비해 문화가 일천한 우리나라는 지식과 정보의 수입국일 수밖에 없는데, 그 수입은 바로 번역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훌륭한 번역이 없으면 외국의 지식과 정보를 제대로 수입해 올 수도 없고, 결국 문화와 지식, 정보의 세기에 뒤처지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 세기에 발전을 원한다면, 번역과 번역가를 제대로 대우하라. ‘워킹푸어’들만이 번역을 하는 한국에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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