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신당의 '자폐증'을 우려한다
        2010년 08월 09일 07:5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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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필자.

    변씨 성을 가진 어떤 이에게서 들은 얘깁니다. 자기가 아는 친구 중에 변대홍이라는 친구가 있었대요. 조씨 성을 가진 이만큼이나 변씨 성도 어렸을 적엔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기 쉽습니다만, 큰 대자에 넓을 홍자 정도면 과히 놀림감이 되기 어려운 이름이 아닌가요?

    그러나 ‘집단 지성’은 놀라운 것, 변대홍의 이름을 거꾸로 부릅니다. 홍대변. 그 다음, 순 우리말로 부릅니다. ‘피똥’. 결국 부모님이 크고 넓게 세상을 살라고 지어준 이름이 피똥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글 쓰기가 무섭다

    뜬금없이 무슨 얘기냐고요? 어떤 말을 해도 기어이 꼬투리를 잡아내고야 마는 파파라치들 때문에 사실 요즘엔 글 쓰기가 무섭다는 말씀입니다. 진보신당 당원들은 당원 게시판에 글을 한 번 쓰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저격수들의 조준선을 피해 나갈 수 있는 언어를 어떻게 골라야 하나 신경이 마를 지경입니다.

    저도 요즘엔 거의 글을 쓰지 않습니다. 아니 못씁니다. 언제 ‘피똥’이 될 지 모르거든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뒤통수가 근질거립니다.

    2.

    알린스키의 『급진주의자들을 위한 규칙』에 인용된 자유로운 발언의 신봉자였던 런드 핸드(Learned Hand) 판사는 생전에 "자유로운 인간의 징표는 자신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영원히 고뇌하는 내적 불확실성에 있다"고 했습니다.

    나 역시 그러합니다. 사실 연합정치나, 통합진보정당에 대한 나의 ‘정치적 판단’은 어떤 독단적 교리로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잠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며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예전에 했던 주장을 번복하는 변절의 논리라고 통박합니다. 그러나 예전의 주장 또한 진리의 상대성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주장을 진지하게 검토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이 글은 ‘질문’이다

    하나만 더 인용해 볼까요? 핵 물리학자 닐스 보어(Niels Bohr)는 "내가 말하는 모든 문장은 확언이 아니라 질문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알린스키는 "혁명운동의 모든 순간과 계기마다 우리는 독단적 교리를 경계하고 또 두려워 해야만 한다. 인간의 정신은 과연 우리가 옳은지를 살펴 보는 내적 의심이라는 작은 불빛을 통해서만 빛날 수 있다"고 부연하고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나의 글도 ‘질문’일 뿐입니다. 그것은 때때로 불경스러움으로 가득찬 호기심 어린 질문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떨면서 내는 용기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북극성을 찾기 위해 떨리는 나침반처럼 떨고 있는데 향도가 되어주기는커녕 "넌 맛이 갔어"라며 관계를 단절할 뿐만 아니라 적대적 관계마저 생성하게 된다면 나의 시도는 실패한 것이 되겠지요.

    3.

    개인적 경험입니다. 문수스님 49재 추모 집회에 진보신당 깃발을 펼쳤더니 나이 지긋한 중년의 아저씨들이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더니…" 하며 우리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씀하시더군요. 비슷한 얘기를 함안보 타워 크레인 농성을 응원하는 강변 촛불집회에서도 듣게 되었습니다.

    예전엔 이렇게 노골적이지 않았는데, 사면초가라더니 지방선거 이후에 공공연히 진보신당을 분열주의로 낙인찍는 얘기들이 들립니다.

    진보신당을 향해 퍼붓는 소리

    지방선거 전에는 진보 양당의 분열을 안타까워 하는 운동권들 정도가 "통합 안하냐?"고 물었고, 민주노동당의 패권주의에 대해서도 함께 지적하며 분열의 책임을 진보신당에게 일방적으로 묻지는 않았습니다. 그게 객관적 태도죠.

    그러나 지방선거가 끝난 다음 분위기가 확 바뀌었습니다. 진보신당이 분열주의라는 겁니다. 이른바 ‘일등만 기억하는 드러운 세상’ 아닙니까? 억울하죠. 그러나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게 현실인 걸. 담(膽)처럼 쓰지만 우리는 우리가 희망하는 상황에서 운동하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서 운동할 수 밖에 없다는 걸 받아들여야 합니다.

    4.

    지방선거 직전의 진보신당 지지도는 2% 내외였지만 당 인지도가 40% 밖에 되지 않는 조건에서 2%는 그래도 희망을 걸어 볼만한 것이었습니다. 노회찬 대표는 인지도가 40%밖에 안되는 걸 역설적으로 "그래서 다행이다. 만약 인지도가 80~90%인데 2% 지지라면 얼마나 끔찍한가? 이제 인지도를 높여 나가자. 지방선거를 거치며 인지도를 높이면 지지도는 자동으로 높아질 것"이라고 당원들을 격려하던 좋은 시절이 꿈결같습니다.

    노회찬이나 심상정과 같은 대중 정치인을 갖지 못한 민주노동당으로서는 지방선거에서 진보신당에게 정당 지지율이 역전되는 끔찍한 상황도 충분히 상상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민주노동당으로서는 07년 대선 패배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진보양당의 대표선수 자격을 가리는 진검 승부에서 패배함으로써 2차 빅뱅이 일어날 수도 있었고, 그 결과는 진보신당이 주도하는 진보의 재구성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진보신당에게 재앙이었습니다. 울산 북구 재선거에서 예방주사를 확실히 맞은 민주노동당은 진보신당과의 선거연대를 철저히 부정하고 반MB연대에만 집착하며 기초단체를 비롯한 풀뿌리에서 근거지를 구축하려 했고, 풀뿌리가 허약한 진보신당은 정당 지지율에 과도하게 집착한 나머지 광역단체장 선거에 올인하다시피 했습니다.

    그 결과 지방선거가 가지는 분권적 선거가 가질 수 있는 전술적 유연성을 살리지도 못하고, 소중한 지도력만 망가지는 참담한 결과를 받아든 것입니다.

    결과론일지 모르지만 16개 광역단체장 전원 출마라는 진보신당의 선거 전술은 선거연대라는 구도가 압도하는 선거판에서 명분과 실리의 교환이라는 연합공천을 염두에 둔 전술이어야 했습니다. 물론 이런 유연한 전술을 구사하려면 그만한 당내 동의를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하는데 민주당과의 선거연대를 했다고 당의 부대표가 후보를 사퇴하는 지경이니 한계가 있었겠지요.

    ‘자주파’ 숙원사업 한방에 이루다

    그러다 보니 심상정 전대표의 막판 사퇴를 두고 지금까지 당이 내홍에 휩싸여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이렇게 비싼 수업료를 지불했으니 앞으로가 중요하겠지요?

    지방선거를 거치며 진보신당의 인지도가 얼마나 높아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선거 전보다야 높아졌겠지요. 그러나 기대했던 지지도의 상승은? 별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진보신당 내부에서의 평가는 다르겠지만 노회찬 대표의 완주는 일종의 진보신당 노이즈 마케팅 같은 것이었습니다.

    한명숙의 낙선이 왜 진보신당 노회찬 탓이냐고 항변하지만 진보신당에서 한걸음만 바깥 세상으로 발을 디디면 사면에서 초가가 들려 옵니다. 진보신당에 대한 가장 부정적인 브랜드 네이밍으로 ‘한나라당 2중대’가 하나 붙었었고요. 진보신당을 분열주의세력으로 낙인찍고 싶어 했던 자주파들의 숙원사업이 한방에 해결된 것이지요.

    지금 진보신당 내에서 징계의 도마에 올라 있지만 그나마 심상정 후보가 막판에 ‘눈물의 사퇴’를 함으로써 진보신당이 정치적으로 고립무원의 상태로 빠지는 걸 막아냈다고 봐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심상정을 마귀와 상피붙었다며 화형대에 올려놓고 막 불을 붙이려고 하는 중입니다. 과연 그 진보의 장엄한 불꽃이 심상정만 태울까요?

    정치에서는 고결한 의도가 반드시 선한 결과를 불러오지는 않습니다. 진보의 가치를 막판까지 고수한 노회찬과 그렇지 않은 심상정이라는 이분법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 가치’라는 추상화를 지켜내기 위해 완주한 결과 우리는 오세훈의 재선을 방조했다는 누명을 뒤집어 썼고, 어렵사리 키워낸 대중 정치인의 3% 추락을 댓가로 지불해야 했습니다. 베버식으로 말하자면 ‘신념의 윤리가 ‘책임의 윤리’를 압도한 결과처럼 보입니다.

    5.

    나는 지금까지 민주노동당에서 분당한 걸 별로 후회한 적이 없는 ‘선도 탈당파’입니다. 그러나 최근 민주노동당의 모습과 진보신당의 모습을 본면 민노당은 국민과 유연하게 소통하고 있고, 상대적으로 소통하는 진보를 표방한 진보신당은 폐쇄회로에서 맴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 일심회를 끝까지 옹호하며 혁신을 거부하던 민주노동당의 자폐증을 지금은 진보신당의 고립주의 노선에서 보는 것 같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바깥에서 보기에 심상정을 중징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만 높게 들리는 진보신당의 현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폐쇄회로를 맴도는 진보신당

    얼마 전 진보신당 지방의원 워크샵에서 한 분이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와 박근혜 의원이 나란히 비교되고 있는 기사를 보고 "그 자리에 심상정이 있어야 하는데"라며 부러웠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민주노동당은 잘 나가는데 진보신당은 존재감이 없고, 기껏 그 존재감을 발휘하는 방식이 ‘심상정 징계’로 나타나니 갑갑하다는 것이지요.

    심상정 징계 기사가 올라오면 국민들이 "오! 진보신당 대단한데? 진보적 가치를 굳세게 지키기 위해 가장 유력한 대중 정치인 중의 한사람조차 초개처럼 버릴 줄 아는 당이로군, 정말 민주적이고 훌륭한 당이야!" 이렇게 이해해 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노회찬처럼 심상정이 김문수를 안 도왔다고 저 난리냐?"라고 비틀어 볼 것만 같아 사실 걱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심상정 징계 문제가 심상정의 ‘정치적 판단’에 관한 심판으로까지 확대되는 것을 경계합니다. 당규의 자의적 해석을 줄이고 그냥 의결기관의 동의 없는 후보 사퇴가 당규 위반이라면 그것을 담담하게 적용하는 정도여야 한다고 봅니다.

    6.

    진보신당에 ‘진보적 가치’가 부족해서, 혹은 그놈의 가치가 중심을 제대로 잡고 있지 못해서 문제일까요? 오히려 너무 과잉이라서 문제일까요? 어떤 이는 현실 선거 과정에서 가치나 이념 문제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은 자칫 전략, 전술의 선택을 협소하게 막아버리는 일이 될 것이라고 충고합니다.

    선거 과정에서 이념과 가치만 가지고 유권자의 선택을 바라는 이도 있겠지만 당선을 두고 다투는 후보의 경우 이것뿐만 아니라 지연, 학연, 혈연과 같이 이념, 가치와 아무런 인연도 없는 수단도 동원하지 않습니까? 이념과 가치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당선권에서 멀수록 이념과 가치 외에 달리 동원할 게 없다는 현실을 냉정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보신당이 ‘수권정당’의 지향을 갖지 않고 문제 제기나 의제설정만 하는 ‘등대 정당’에 머물겠다는 합의가 있다면 얘기는 더 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나 집권을 목표로 하는 이상 우리는 ‘신념의 윤리’ 못지 않게 결과에 책임지는 ‘책임의 윤리’에 대해서도 같은 비중으로 다루고 그 상보성을 깊이 있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 결과는 진보신당은 ‘진보적 대중정당’의 길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등대정당과 수권정당 사이

    연합정치와 통합진보정당의 담론은 현재 민주노동당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진보정치의 성장을 통해 평등과 복지 의제가 보다 힘있게 대두되기를 기대하는 진보개혁적 유권자들로서는 진보개혁정당들의 향후 행보에 깊은 관심을 보일 것입니다.

    여기서 민주노동당은 자신들이 통합진보정당 건설을 주도하겠다고 발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진보신당은? "우리는 통합진보정당 건설에 관심없다. 우리는 우리의 길이 있고 그 길을 묵묵히 가겠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진보신당은 애초에 ‘진보신당 (건설을 위한) 연대회의’로서 진보의 재구성을 표방하고 나오지 않았습니까? 이른바 지난 10년간의 민주정부와 진보정당의 실험 모두가 ‘밥 먹여주는 정치’에 실패한 것에 대한 반성으로 부터 시작했습니다.

    진보의 재구성에서 ‘진보신당 (건설을 위한) 연대회의’의 조직노선으로 통합진보정당 건설이 논의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오히려 통합진보정당 건설 논의를 주도하는 것은 진보신당의 몫인데 민주노동당이 이것마저 가로채고 있는 형국이 아닐까요?

    민주노동당은 2011년 말까지 통합진보정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합니다. 주요한 파트너는 진보신당입니다. 진보신당 당원들 중 민주노동당에서 탈당한 당원들은 민주노동당과 통합에 대해 정서적 거부감이 있습니다. 당내 거대 정파 패권의 쓰라린 기억들이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특정 시기를 못박고 통합을 추진하겠다고 하는 것은 패권주의의 다른 얼굴로 비쳐질 따름입니다. ‘통합진보정당 건설’은 그런 방향을 지향한다는 조직노선의 표현입니다. 주체들의 준비 정도나 주변 조건 등에 의해 그 시기가 앞당겨질수도 혹은 늦추어질 수도 있으며, 그 구체적인 모습도 이탈리아의 ‘올리브선거동맹’ 수준에서 단일한 정당까지 다양할 수 있습니다.

    다만 단순한 네가티브식 반MB연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복지, 일자리, 생태, 선거제도 개혁, 통상정책 등 대안적 정책을 매개로 한 연대와 통합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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