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들의 원죄, '현실 합리화'
        2010년 07월 10일 03:4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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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7월 9일) 근대문명 전환기의 개념사 관련 학회를 했는데, 거기에서 한 선생님은 한국적 근대란 성리학이 개신교 등 기독교에 의해서 대체되는 과정이라는 취지의 논문을 발표하셨습니다. 종교적으로 신도나 불교, 각종의 다양한 신흥 종교에 의해서 근대적 ‘국민’을 만들었던 일본, 한 때에 비종교적 국가를 목표를 삼았던 중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개신교와 ‘문명 개화’가 동일시됐으며, 근대화 작업의 전위대인 개신교 집단이 결국 사회 전체의 주도 집단이 됐다는 논리로 제가 이해했습니다.

    성리학이 기독교로 대체되는 과정

    개신교가 성리학을 쉽게 대체할 수 있는 이유로는, 발표자 분께서 양쪽이 우주적 질서와 사회 질서를 연결시키며 사회 질서를 우주론적 차원에서 합리화하는 동시에 엄격한 사회적 규율을 주장하는 등의 유사점을 들었습니다. 

    즉, 예의염치가 바로 우주적 理에 합하는 내재적 덕목이라는 걸 믿어온 사회가 아주 쉽게 근면, 성실, 교회출석, 교회 봉사, 축복을 받은 부자에 대한 존경을 설파하는 교회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회로 이어져나갔다는 논리입니다. 다르게 이야기 하면 왕조의 지배질서를 절대적으로 합리화하는 성리학이 주축이었던 사회가, 자본주의를 절대적으로 합리화하는 개신교가 주축이 된 사회로 갱신됐다는 것이죠.

    북한을 배제해서 남한만을 ‘한국적 근대’라고 본다면 이게 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말씀이죠. 발표자 분께서는 별로 나쁘게 보신 것 같지 않았지만, 제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귀족관료계급의 특권을 철저히 보장해주고 ‘무식한 백성’이나 여성 등을 아예 공공 영역에서 배제시킨 성리학이라는 통치 이데올로기가 자본가들의 특권을 철저히 보장해주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공돌이, 공순이’들의 권리 주장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개신교라는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대체됐다는 것입니다.

    물론 개신교 집단 안에서는 조화순 선생 같으신 분들도 계셨지만, "기도, 기도를 하라! 그래야 너도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부자 될 거야!"라는 기복이 이 집단으로서는 훨씬 더 대표적이라는 건 사실인 듯합니다.

    그러나 비판적으로 본다 해도, ‘성리학 – 개신교 지속성 논리’는 분명 설득력이 있죠. 사우디 아라비아와 함께 간통죄를 계속 폐지시키지 못하는 몇 개 국가 중의 하나인 대한민국의 그 기가 막히는 성담론의 위선을 봐도, 이게 성리학과 개신교의 ‘융합’이란 생각이 들죠.

    섹스를 악마화시키면서

    둘 다 섹스를 가장 악마화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정평이 나 있기에 말씀에요. 성산업에 거의 1백만 명에 가까운 여성들이 휘말려 있는 나라, 속살이 유혹적으로 드러나는 운동복 차림의 방령의 ‘미인’ 스포츠 스타가 주요 재벌의 제품들을 광고로 팔아주는 ‘섹시 코드’ 천국인 나라, 이런 나라에서 간통죄라니요…

    정말 앞에서는 "주색을 멀리하자"라면서 뒤에서는 기생부터 윗방 아가씨까지 성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모든 대상들을 다 이용했던 ‘고귀한 성리학자’의 그 위대한 전통이 소망교회에 다니시는 마사지걸 이야기 전문가 분들에 의해서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러한 고상한 법률들이 법전들을 장식하겠습니까? 교회 출석자 인구가 해마다 15%나 늘어났던 ‘조국 근대화’의 황금기에 퇴계와 율곡이 부국강병화돼가는 조국의 지폐를 장식한 것도 절대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은 있습니다. 성리학과 (주류) 개신교는 좀 심한 경우긴 하지만, 사실 ‘현실 합리화’는 종교마다 다 하죠. "부자에게는 복이 있어서 부자가 된 것이니 부자를 흠집 낼 것 없다"는 말 정도는 불교 집단에서는 얼마든지 다 하죠.

    단, ‘하나님’ 대신에는 ‘숙생의 선업’이 거론되는 건 다를 뿐입니다. 저항하느니 개인으로서의 당신의 문제를 종교적으로 해결해보란 말을, 스님에게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단, 신과 기도 대신 ‘업장 소멸’, ‘공덕 쌓기’가 나오는 것만 다를 뿐이죠.

    "모든 중생들을 부처로 보라"… 물론 형이상학적 의미에서는 맞는 말인데, 모든 중생들이 부처가 될 잠재성이 내재돼 있다는 일체중생실유불성과, 모든 중생들의 모든 행위가 다 부처다운 행위라는 말은 엄격히 서로 다릅니다.

    사회적 실천을 의미없게 만드는 불교

    반대로, 청소하시는 분들에게 한달에 평균 70만원을 주는 대학교 관리자들과 투쟁을 해야 그 중생들이 돈에 대한 탐심으로부터 벗어나서 깨달음으로 한 발 나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들의 탐심이 타자들을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걸 저들에게 보여주면서 저들의 악업적 행위를 비판해야 저들이 적어도 여태까지의 악업을 반성하여 개과천선할 기회를 얻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악을 짓는 이들을 상대로 하는 투쟁은, 제가 보기에는 얼마든지 제악막작 제선봉행(諸惡莫作 諸善奉行. 악을 짓지 말고 선을 받들어 행하라-편집자)이라는 불조 혜명에 잘 부응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한국 주류 불교 집단의 현실 이해는, 현실의 모든 문제들을 개인적 종교적 행위로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대사회적 실천을 무의미화시키는 차원에서 주류 개신교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성리학이 했던 역할을 꼭 개신교만이 이어받은 게 아닌 것 같아요. 뭐, 월남전 특수로 횡재하여 재벌이 된 정상배들이 사찰에 안다니나요? 사실, 강남족들의 종교적 현황을 보면 고급 경영자들 중에는 개신교가 많지만 재벌 가문들 중에서는 자칭 불자들은 꽤 많다는 것입니다.

    현실을 합리화하는 건, 모든 주류 종교들의 원죄라면 원죄죠. 그게 해당 종교의 개교 정신에 대한 배반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원시 불교는, 기복 행위에 의한 ‘업장소멸’이 아니고 사바세계가 고통의 바다임을 강조했죠.

    존재의 긍정적 의미를 상실한 종교

    그 고통의 바다에 빠진 사회에서는 불가피하게 탐진치가 판치는 것이고, 이 사회를 정화시키기 위해서는 일단 정의로운 재분배로 탐진치의 사회적 외면화를 억제해야 한다는 건 초기 불교가 배태시킬 수 있었던 사회적 논리이었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란, 사실 또 다른 고통일 수도 있어요. 위대한 공산주의적 작가 안드레이 플라토노프가 이야기했듯이, 인간이란 우주에서 제일 불행한 존재고, 이 불행을 벗어나는 길도 온갖 불행으로 가득찬, 어찌보면 불행의 정점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혁명을 직접 경험한, 내전 시절에 붉은 군대에서 복무한 적이 있는 사람이니까 잘 알고서 이야기한 거죠.

    이와 같은 철학은 별로 ‘위안’이 되지 못하겠지만, 일단 사람에게는 굴복하지 않고 이 지옥을 살 용기라도 줄 수 있는 것 같아요. 맘몬, 즉 재신을 이 세상의 통치자로 지목한 예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지옥을 지옥이라고 바로 부르고, 지옥적 길이라 해도 이 지옥을 같이 벗어날 길을 모색하자는 말 대신에,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하는 종교는, 그 존재의 어떤 긍정적 의미도 다 상실한 게 아닌가 싶어요. 어찌면 조선 말기의 보수화, 반동화된 성리학과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해도 될는지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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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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