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 반공영화 붐…돌아온 '배달의 기수'
        2010년 06월 24일 11:1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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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이 벌어진 지 60년이 되는 해, 사람으로 치면 환갑을 맞은 해, 겪어온 세월을 되돌아보고 후손들에게 그 경험을 통해 지혜롭게 살아갈 길을 가르칠 시기다.

    전쟁을 직접 겪은 사회로서는 그 참혹한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앞으로 다시는 그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이미 겪었던 전쟁을 기억하고, 분석하고, 재해석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한국영화나 드라마에서 6·25를 다루는 작품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 영화 <포화 속으로>포스터와 KBS 특별기획 <전우>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에서는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6·25를 다룬 대표적인 한국영화들을 만나보는 ‘6.25 60주년 특집전’을 열고 있으며, 극장가에서는 전쟁 당시 정규군이 아닌 학도병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포화 속으로>가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있고, TV에서는 냉전논리가 전세계를 지배하던 1975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전우>를 ‘국영방송’ KBS가 리메이크해서 특별기획으로 내놓고 있다.

    6.25 영화 드라마 붐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시작한 전쟁의 총성은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으로 멈추었다. 이 기간에도 영화는 카메라를 놓고 있지 않았다. 1950년 6·25 전쟁 직전 촬영 중이던 영화는 얼마 전 타계한 한형모 감독의 해군 홍보영화 <사나이의 길>(전택이, 박암, 최은희 주연)과 공보처 산하 대한영화사에서 제작한 안진상 감독의 <육탄 십용사> 등 10여 편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전쟁으로 중단되어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그러면서 전쟁 중에 영화인들은 군 촬영대와 미공보원, 대한민국 공보처 등 각 기관이 자리 잡은 진해, 부산, 대구 등의 피난 도시로 분산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진해에 자리 잡은 미공보원에는 <전진대한보>와 <리버티뉴스>를, 1950년 8월 대구에서 발족한 국방부 정훈국 촬영대는 1951년 1·4 후퇴 이후 부산 보수동에 자리를 잡고 <국방 뉴스>를 제작했다. 이렇게 전쟁 기간에 미공보원과 군 촬영대나 공보처에서 활동한 영화인 가운데는 정창화, 홍성기, 정인엽, 신상옥 등 한국영화사에서 기억할만한 이름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군 중심으로 만들어진 뉴스 영화는 극장에서 상영되어, 전시 국민들에게 전황을 전하는 매체였고, 이후 한국 다큐멘터리의 맥으로 이어졌으며, 극영화에서는 전쟁영화의 계보를 만들어냈다.

       
      ▲ <화랑도> 포스터

    그런 상황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전황을 담은 뉴스 영화만이 아니라 극영화 작품도 계속 만들어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전선이 밀고 밀리며 쑥대밭이 된 서울이 아니라 대구, 부산, 마산 등의 피난 도시에서 전쟁으로 촬영이 중단되었던 <화랑도>(1951)나 신상옥 감독의 데뷔작 <악야>(1952) 와 같은 작품이 배우가 모이는 때마다 몇 컷 씩 찍는 어려운 제작환경에서도 완성되었다.

    이런 영화 제작 상황을 일컬어 당시 피난지 대구의 지역 언론은 ‘한국의 홀리우드화’라고까지 표현했다. 대구를 중심으로 <공포의 밤>(1952), <태양의 거리>(1952), <베일부인>(1952), <청춘>(1953) 등이 제작되었고, 부산에서는 <낙동강>(1952)과 <고향의 등불>(1953) 등이 경상남도 공보과의 재정 후원으로 제작되었으며, 제2육군병원의 후원을 받은 <삼천만의 꽃다발>(1951)은 마산에서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영화 중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미 보병부대의 전투를 취재하던 촬영기사 김학성과 이성춘이 박격포탄에 맞아 부상을 입어가면서 만든 <정의의 진격>(1951) 2부작뿐이다.

    전쟁 중에도 멈추지 않았던 영화

    휴전협정으로 총성이 멎은 후 사회전체가 어렵고 혼란스럽던 상황에서도 1954년에 18편, 1955년에 15편, 1956년에 30편, 1957년 37편이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전쟁 중에도 영화인들이 여전히 카메라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쟁은 제작 여건이나 인력뿐 아니라 영화 내용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전쟁의 결과가 ‘통일’이 아니라 ‘분단’이 된 현실에서 한국영화에서 ‘전쟁영화’는 곧 ‘반공영화’였다. 그러면서 한국영화는 오랜 기간 자유보다는 통제에 길들여지게 되었다.

    분단이라는 특수한 정치적 상황과 군사독재라는 억압적 환경에서 비롯된 검열제도로 소재나 표현에 제약이 많다보니 영화를 통해 발언하고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외국 여행조차 자유롭지 않아 민간 차원에서의 다양한 문화적 교류 또한 여의치 않았다.

    그러다가 9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냉전 체제가 무너지고 국내에서는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비로소 다른 문화계와 더불어 영화계도 자유로운 여건에서 다양한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모든 지식과 문화에서처럼 ‘자유’는 영화 또한 풍성하게 한다.

       
      

    남북 분단에 대한 예전의 영화들은 대부분 무조건적인 흑백논리를 밀어붙이는 반공영화였다.

    그러나 <쉬리>(1999, 강제규), <공동경비구역 JSA>(2000, 박찬욱) 같은 영화들이 작품성에서나 대중성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 이후,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남과 북의 문제를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고 현재를 돌아보게 하는 <실미도>(2003, 강우석), <태극기 휘날리며>(2004, 강제규), <웰컴 투 동막골>(2005, 박광현)까지 여전히 지속되는 분단의 원인과 후유증을 새롭게 짚어보는 영화가 꾸준히 만들어졌다.

    다시 10년 전으로

    지금 상영하고 있는 영화 <포화 속으로>와 드라마 <전우>가 ‘잃어버린 10년’을 되돌리겠다는 보수 우익에게 정치적 권력이 쥐어진 상황에서 다시금 전쟁영화와 드라마에서 반공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반공영화는 전쟁의 배경과 원인을 짚어보는 것이 아니라 전쟁 상황 자체를 중심에 둔다. 죽고 죽이는 상황 자체를 스펙터클로 만들고, 그 스펙터클을 이끌어가는 인물들을 비극적 희생자로 만들거나 영웅으로 만든다.

    반공영화는 분단과 한국 전쟁, 베트남 참전이라는 한국의 특수한 상황과 전세계적 냉전체제 속에서 5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제작된 한국영화의 중요한 장르 가운데 하나였다. 지금까지도 해마다 6월이 되면 TV 특집극 형식으로, 영화 성수기인 여름과 겨울에는 상업성있는 블록버스터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반공영화는 단순히 정치적 선전물의 수단으로 제작된 것만이 아니라 당대의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 대중들에게 인기있는 상업적 장르의 하나이기도 했다. 또한 반공영화는 물질적 토대나 특수효과가 취약했던 한국영화의 제작 여건 하에서 감독들에게 있어서는 막대한 물량공세와 인력 투입이 가능한 대작을 제작해 볼 수 있는 기회이자 관객들에게 있어서는 외화가 아닌 방화를 통해 스펙타클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전후 도입된 미국영화를 통해 70mm로 제작된 <십계>, <벤허>, <전투> 등의 대작을 보게 된 당시 한국 관객들에게 반공영화는 국산 초대작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특히 한국전쟁 당시의 전투 상황을 다룬 전쟁영화는 정부 차원의 막대한 물적, 인적 지원 아래서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다.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나 신상옥 감독의 <빨간 마후라>는 당시 제작 여건에서 국방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다면 불가능한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군복무 중인 병사들이 엑스트라로 동원되어 전장을 누비고, 진짜 전투기와 현역 공군 조종사가 나서서 창공을 날아오르는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 영화들이 ‘반공’이라는 틀을 지켰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연예사병으로 복무하는 연예인들이 스타 파워로 군홍보 영화에 출연하는 정도가 화제지만 이 시기 반공영화의 제작 주체는 그야말로 ‘국가’ 자체였다.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이 제작된 55년도에 제작된 한국 영화는 모두 15편인데 그 중 ‘반공’으로 분류되어 있는 것이 3편, 1950~55년 사이에 제작된 한국 영화는 55편, 그 중 반공 영화가 10편이니 무려 1/5이다. 특히 이강천 감독은 이 시기에 모두 29편의 영화를 제작했는데 그 가운데 7편, 약 1/4이 반공영화이다. 같은 시기의 대표적인 다작 감독인 임권택 감독이 1/66편, 이만희 감독이 1/44편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강천 감독은 반공 장르 전문 감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적인 전쟁장면의 묘사와 흥행 성공에 힘입어 전쟁 스펙터클영화의 붐을 가져왔던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서 중국군이 인해전술을 펼치며 몰려드는 장면은 최근 방영되고 있는 KBS 드라마 <전우>의 규모와 차원이 다르다. 부대 하나가 총동원되어 산 너머 저 끝에서부터 카메라 바로 앞까지 거적하나 펼쳐들고 총알을 막으며 달려 나오는 중국 군복 병사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요즘에는 CG로나 가능한 스펙터클이다.

    ‘반공영화’여서 가능했던 스텍터클… 그리고 상업성

    이렇게 ‘전쟁영화는 곧 반공영화’이던 시절에는 이런 영화들을 단체로 관람하는 것이 학생들의 의무였다. 초등학생(당시는 국민학생) 반공 만화영화 <똘이 장군> 시리즈(1978~79)는 지금까지도 <로보트 태권V> 버금가는 김청기 감독의 대표 흥행작이다.

       
      

    이렇게 관객과 물량을 전 국가 차원에서 동원하던 반공영화는 5공 시절까지 계속되었다.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유인촌, 이영하, 장미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종군수첩>(1981년, 최하원 감독)의 제작사는 바로 ‘국군영화제작소’다.

    설악산 암벽 등반을 나선 대학 산악반 학생들이 한 대원의 실수로 자일이 엉키면서 전 대원이 위기에 맞닥뜨리게 된다. 결국 한 명을 희생시켜 나머지 대원들을 구출한 리더(이영하)가 심한 자책과 죄의식에 방황하자 교수(박근형)가 다독인다. 자신이 6.25때 종군기자로 있을 때 사랑하는 애인을 두고 전선으로 갔다가 전사한 김소위(유인촌)의 종군 수첩을 통해서.

    진호는 김소위의 숭고한 조국애와 희생정신에 감동해서 또래의 젊은 세대가 갖는 가치관이 왜곡된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투철한 국가관으로 조국수호에 헌신하기로 다짐하며 입영열차에 오른다는 내용의 그야말로 ‘국책영화’다.

    광주를 짓밟고 정권을 거머쥔 군사 정권에 맞서 대학생들이 문무대와 전방입소를 거부하던 시기에 <종군수첩>은 대학생의 본분이 ‘반공’ 정신에 있다며, 독재의 정당성을 6·25 전쟁 당시 상황에서 찾는 이 영화는 1981년 6월 20일에 개봉해서 학생단체관람이라는 관객 동원 방식으로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이런 식의 반공영화로는 더 이상 순수한 일반 관객을 불러 모을 수 없다는 한계도 드러냈다.

    그러면서 전쟁영화는 국책영화가 아니라 자본의 논리를 따르는 상업영화와 국가 차원에서 지워버린 개인들을 돌아보는 독립영화로 이어지면서 분단의 현실을 다각도로 다루어 왔다. 뿔난 빨갱이 괴물과 맞서 싸우는 ‘똘이장군’ 식의 단순한 흑백논리가 사라진 자리에, 분단과 전쟁을 여러 시선으로 짚어보는 영화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태극기 휘날리며>나 <웰컴 투 동막골>이 상업영화의 계보에서 전쟁영화를 반공영화의 틀에서 끄집어내면서 전쟁영화의 스펙터클을 발전시키는 동안, 김동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송환>이나 이상무 감독의 독립 극영화 <작은 연못>은 전쟁의 이면에서 짓밟힌 개인의 삶을 돌아본다.

    ‘반공영화’도 영화일까?

    그러나 반공은 국시 논쟁으로 국회의원을 감옥에 몰아넣을 만큼 막강한 위력으로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족쇄다. 반공 영화를 ‘영화’로 보아야하는가의 문제는 <배달의 기수>를 작품으로 보아야하는가, 5공 시대의 소위 ‘땡전 뉴스’를 언론보도로 보아야 하는가와 같은 류의 자괴감을 불러일으킨다.

    영상적 표현이나 연기의 세련됨이 일부 두드러진다고 해도 그것이 영화이기 이전에 선전수단으로서의 존재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반공영화’에 대해 개별적 작품으로서의 언급을 하기에 앞서 한국 근현대사와 지금의 정치적 상황을 돌아보게 한다.

    한 쪽에서는 북한 축구팀의 월드컵 경기를 지켜보며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동안, 다른 한 쪽에서는 천안함 사건에 대한 진실을 밝히려는 시도조차 ‘좌빨’로 모는 극우 세력이 가스통을 설치는 이때, 드라마 <전우>나 영화 <포화 속으로>가 전쟁의 배경이나 역사적 맥락을 지우고 다짜고짜 <라이언 일병 구하기> 식의 ‘웰 메이드 스펙터클’로 재현되는 전쟁 장면으로 시작하는 것은 그 장면의 영상적 기교가 어떻고, 볼거리로서의 현란함이 어떻든 간에 반공영화의 귀환을 시사하는 것이다.

    ‘대북응징’이나 ‘전쟁불사’를 외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귀환을 통해 누리게 될 권력이 스펙터클보다 더 짜릿하겠지만, 그런 영상들에서 생생하게 재현하는 전쟁 장면들은 전쟁에서 희생당하고 죽어나가는 사람들은 권력자가 아니라 전쟁에 동원되는 일반인들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반공 영화는 귀환하더라도 그 낡은 이데올로기가 다시 세상을 공포로 지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 영화 <포화 속으로>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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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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