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의 광장이냐, 우리의 광야냐”
        2010년 06월 16일 05:3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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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를 위한 진리인가?”라고 물은 것은 니체였다. “민주당과 한나라당, 노무현과 이명박이 조금도 다르지 않단 말야?”라며 대답을 강요하는 이들을 보면 내게 떠오르는 말이 그거다. 차이가 있는지 없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누구에게 차이가 있는지가 문제의 핵심이므로.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차이를 느끼는 건 누구인가

    미네르바 구속과 김제동의 하차에 위축되어 여론조사 때 민주당을 지지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이들에겐 차이가 크다. 한편 김대중 서거에 대해서 한 마디 하지 않고 이영애 결혼 소식을 두고 “돈을 벌어야 할 이유를 잃었다”고 상심해 하는 최저시급 노동자들에겐 차이가 별로 없다.(한겨레신문, <사천원 인생>에 나오는 에피소드)

    참여정부 시절 정부 광고 수주와 공기업 광고 수주가 가능했던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 <오마이뉴스>에겐 정말이지 하늘과 땅 차이다. 하지만 도대체 왜 저 진보언론들이 선거 때만 되면 진보정당을 외면하는지에 대해 분통을 터트리는 이들에겐 별 차이가 없다. 유시민의 항의에 대한 <한겨레신문>의 조속한 사과에서 드러난 사실은, 우리가 무시당하는 이유는 ‘몰상식’의 문제가 아니라 ‘돈’의 문제라는 거다. 우리는, 광고를 흔들면서 윽박지르는 삼성은 물론 다수의 노무현 지지자들에 비해서도 ‘돈’이 안 되는 존재들인 거다.

    ‘잃어버린 십년’ 동안 정부 보조금을 받았던 일부 시민단체들, 꼭 돈 문제만이 아니더라도 자신들의 발언이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경험했던 원로 민주화 운동 인사들에겐 그 차이가 실로 뜨거운 금성과 싸늘한 명왕성의 차이다.

    하지만 보조금과 별 상관이 없는 영세한 운동단체 활동가들에겐 별다른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5+4 연대라는 곳에서 시민사회단체의 원로들이 군소정당들의 자살을 종용한 이유를 굳이 유물론적으로 분석한다면 그렇다.

    노파심에서 변명한다. 나는 이명박 정부가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일이라 믿는다. 참여정부가 광고를 군소언론에게 분배한 것은 정당했으며, 다만 정권 말기에 한미FTA 광고 폭탄을 투척하여 진보언론들을 길들이려 한 것이 쪼잔했다고 믿는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시민단체에 보조금을 준 것은 타당했으며, 다만 정권 말기 한명숙 총리가 시위에 연루된 단체에 대한 보조금 삭제를 승인한 것이 치졸했다고 믿는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어떤 이에겐 이런 일들이 ‘모르는 일’이거나 ‘딴 세상 얘기’라는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차이라는 것은 ‘관념적인 것’이다. 중간쯤 사는 이들이 보기에 저 절대악 한나라당 앞에서 민주당과 진보정당의 차이라는 게 ‘한낱 관념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너희들 좌파는 민중을 위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민중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반한나라당의 길로 나서야 하지 않겠어?”라는 윽박지름은 십 년이 넘게 들어왔다. 민중이라, 소수의 권력자 제외하고 다수의 노동자/대중이 비슷비슷하게 살던 수십 년 전에는 의미가 있는 개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또다시 그 질문을 해체한다. 민중, 국민, 시민과 같이 ‘보편적인’ 개념들이 ‘특수한’ 정치적 성향이나 계급적 위치를 지닌 사람들을 위해 종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시민이 우리에게 충고한다. 자신과 지지자의 이념에 얽매이지 말고 국민을 위해 정치하라고. 여기서 ‘국민’이란 ‘모든 사람’이 아닌 단일화를 염원하는 특정한 이들에 불과하지 않은가? 세상에, 나는 국민이 아닌갑다. 그래서 물을 수밖에 없다. “네가 말하는 것은 어떤 국민(혹은 민중, 또는 시민)이냐?”

    물론 ‘민중’이 죽어나간다. 4대강 사업이란 놈 때문에, 낙동강에서 골재 파먹고 살던 이가 자살하고, 팔당에서 친환경농업하던 이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거리로 내몰렸다. 스님이 죽고 신부가 삭발해도 꿈쩍도 안 한다. 재작년 용산에서는 다섯 명의 철거민과 한 명의 경찰이 죽었다.

    하지만 지역민 중에선 4대강 사업이란 것에 찬성하는 사람도 있다. 무엇보다 참여정부 시절에도 사람은 죽었다. 노동자 농민이 분신했다. 지금의 분신은 권력에 항거하는 마지막 실존적 외침이고, 그때의 분신은 대통령이 만만해 보여서 정권을 흔들려고 한 거라고 얘기하지는 못할 거다. 근데 그땐 그런 식의 조소도 들렸던 것 같다. 예전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자.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위치, 그리고 진보정당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얘기는 통계적 근거가 부족해서 뇌내망상으로 치부될 수도 있는 얘기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고 다만 구체적인 수치는 달라질 수 있는 가설이라 생각하고 싶다. 하려는 얘기는 한국의 유권자를 100으로 볼 때 민주당과 한나라당, 그리고 진보정당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다.

    민주당의 지지층을 20~30으로 본다. 한나라당의 지지층을 30 정도로 본다. 경험적으로 볼 때 민주당 지지층이 실망했을 때 이탈의 폭이 크다. 그렇다면 무당파를 50~60으로 계산해야 할까. 안이한 분석이다. 전혀 다른 성격의 두 개의 무당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당파 중에는 가장 정보가 많고 의식화된 시민이 있는가 하면, 가장 정보가 적고 관심이 없는 시민도 있다. 전자를 유동투표층이라 이름짓고, 10~20이라 가정해 보자.

    이제 선거에 참여하는 이들을 합산해 보면 70이 된다. 이는 2002년 대선 당시의 투표율이었다. 투표율은 1987년 89%로부터 시작해서 꾸준히 낮아졌는데, 내 생각엔 지금의 양당체제로 동원해낼 수 있는 최대치가 70에 들어맞는 것 같다.

    누군가를 민주당 지지자나 한나라당 지지자로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역, 세대, 이념, 계급이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지역이다. 콕 집어 말하면 영호남 지역주의다. 영호남 인구 비율을 말할 때는 원적지 인구를 따지는데, 해방 직후 인구를 통해 그것을 추산한다. 영남이 30% 정도로, 호남이 20~30%로 알려져 있다. 이것만으로도 절대값으론 떨어지지만 물론 그렇게 단순하진 않을 거다.

    다른 요소가 보강해 주기 때문이다. 그 보강의 양상은 크게 두 가지로, 영남 사람이 이탈한 자리를 다른 요소를 통해 채운다거나, 영남 사람이 김대중/노무현/민주당을 여전히 미워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이유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세대로 말하자면 한나라당 지지자는 60대 이상에, 민주당 지지자는 30~40대에 집중된다. 세대는 흔히 이념과 결부된다. 여기서 말하는 이념은 ‘북한 문제’다. 한국 사회에서 시민권을 획득한 이념 문제라는 게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냉전이념과 탈냉전이념의 대립, 좀 더 단순화시켜 말하면 북한체제를 타도의 대상으로 보느냐 대화와 협력의 대상으로 보느냐다. 60대 이상은 햇볕정책을 경멸하고, 30~40대는 햇볕정책에 안도한다. 마지막으로, 계급. 부르주아 계급은 반드시 한나라당을 지지한다. 반면 중간쯤 사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다.

    이제 한나라당 지지자와 민주당 지지자의 ‘전형’을 호출해보자. 한나라당 지지자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60대 이상의, 햇볕정책에 반대하는, 집값이 많이 오른 지역에 거주하며 대출을 끼고 집을 사 고금리와 부동산 가격 하락에 민감한 사람이다. 민주당 지지자는 호남 출신이지만 말쑥한 서울말을 쓰는, 30~40대의, 햇볕정책에 찬성하는, 집 한 채 가지고 있거나 전세에 살면서 자녀를 서울대 보낼 생각에 골몰하는 교육정책에 민감한 사람이다.

    물론 이 ‘전형’은 확률적 전형은 아니다. 한나라당이 존속하려면 이보다 훨씬 못 사는 사람의 지지도 받아야 하고, 민주당이 대변하는 계층도 지역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아까 말한 10~20의 유동투표층은 어디에 위치하느냐다. 눈치챘겠지만 나는 민주당 지지층이 이탈을 할 때 이 유동투표층에 흡수된다고 보고 있다. 유동투표층은 따로 계산해 내야 할 필요가 없다. 민주당 지지자의 전형에서 ‘호남’이란 값을 지우고 ‘수도권 거주’라는 값을 입력하면 이들의 모습이 나온다.

    진보정당의 지지층은 어디에 있는가

    도대체 진보정당 얘기는 언제 나올 건가 궁금할 텐데, 이 얘기의 결론은 진보정당의 지지층이란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보정당의 지지층은 이 유동투표층에 속해 있다. 민주노동당이 2004년에 거둔 놀라운 성과인 15% 정당지지율을 살펴보자. 당시 투표율이 60% 정도였으므로 이 값을 우리의 백분율로 번역하면 9가 된다. 참여정부가 민주당 이탈층을 모두 흡수한 가운데 나머지 유동투표층을 독식하면 그 값이 나온다.

       
      

    물론 2002년 대선 권영길의 3.9%와 2010년 서울시장 선거 노회찬의 3.3%처럼 어지간해선 흔들리지 않는 열혈 지지층도 있다. 이 값을 번역하면 2 정도다. 그러나 이 값조차도 계층적으로 볼 때는 유동투표층과 비슷하다.

    “어떻게 증명할 거냐?”라고 물을 거다. 지금 한 얘기들은 강준만, 우석훈, 손낙구, 김광수 경제연구소의 논의들을 내 멋대로 짜깁기한 것인데, (손낙구가 없으면 좌파들 쪽팔릴 뻔 했다.) 논의에 무리가 있을 테고 그 책임은 내게 있다.

    하지만 한국 정치학자들이 게을러서인지, 내가 생계형 글쓰기에 급급하느라 공부를 못해서인지, 민주당 지지자와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더 정교한 얘기를 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일단 가설을 던져놓고 정황증거들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2002년 유시민이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에서 한 분석을 인용한다.

    “’노무현 바람’은 기성 정치의 사각지대에서 시작되었다. 지난 연말 이후 봄까지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노무현은 연령별로는 20대와 30대, 학력별로는 대학 재학 이상의 고학력층, 소득 계층으로는 월수입 2백만 원 이상, 성별로는 남자, 직업별로는 화이트컬러와 전문직 유권자들에게서 처음부터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를 받으며 출발했다.

    이들은 정치에 냉소적이거나 무관심하며 투표율이 낮은 집단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 정치 거부는 ‘더 많은 민주주의와 보다 효율적인 개혁’에 대한 그들의 열망의 표현이었다. 그들은 이 열망을 지속적으로 배신한 낡은 정치를 거부했을 뿐이다.

    이들이 노무현에게 높은 지지를 보낸 것은 그에게서 새로운 대안을 조직할 수 있는 새로운 리더의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반면 ‘저학력, 저소득, 고령층, 생산직과 서비스직’의 서민들은 국민통합과 민족화해, 권력문화의 혁신과 새로운 동북아 질서 구축 등 그가 내세운 정치적 가치와 목표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서민 후보를 자처하는 노무현이 아니라 귀족 이미지를 가진 이회창이 서민층의 지지를 받는 역설은 이렇게 해서 발생한 것이다.”

    세대와 소득을 살필 때 8년 전 이야기임을 유의하라. 유시민은 그들 지지층을 ‘신주류’나 ‘여론주도층’으로 지칭하는 등 참으로 난감한 자뻑을 보여주긴 했으나, 현상은 제대로 짚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만나본 노무현 지지자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자. 상이 잡힐 것이다.

    문제는 진보정당 지지자들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거다. 노회찬은 식당에 갔을 때,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은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나중에 온 식당주인이 알아보더라는 얘기를 한다. 일하는 아주머니들은 TV에서 본 박근혜밖에 모르더라는 것이다. (꾸리에, 『진보의 재탄생-노회찬과의 대화』에 나오는 에피소드) 우리는 역시 경험적으로, 이런 일화가 어떤 경향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임을 알고 있다.

    서두에서 나는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차이를 느끼는 건 누구인가?”라고 되물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우리에겐 잘 떠오르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실은 우리도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차이에 엄청난 영향을 받는 계층이라서가 아닐까.

    민주당과 진보정당의 저 엄청난 정체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의 지지자들은 심정적으로 ‘우리’를 ‘저들’의 편으로 단정짓고 후보 단일화를 강요한다. 어째서일까. 실은 ‘우리’가 ‘저들’과 크게 다른 종자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누구는 말한다. 변화된 환경에 맞춰 진보도 변화해야 하고, 좀 더 ‘큰 물’로 나아가야 한다고. 좋은 얘기고, 옳은 얘기다. 그런데 이 얘기 뒤에 따라와야 할 문제의식은 이런 거다. 도대체 뭐가 변했고, 진보가 어떻게 변해야 하며, 그래서 우리가 나가야 할 ‘큰 물’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진보를 비판하는 사람은 ‘이념의 교조성’에서 그 답을 찾는 것 같다.

    물론 이념이 지나치게 교조적이라면 현상분석에 장애가 될 수 있다. 근데 이념을 유연하게 한다고 해서 한미FTA에 동의해야 하느냐를 묻는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다. 이념을 유연하게 하면 영세 자영업자도 노동자와 비슷한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걸 바득바득 아니라하고 더 이상 노동자가 없다고 하는 관절이 굳은 교조주의자들이 바로 신자유주의자다.

    남들더러 계급을 배반하는 투표를 한다고 비판하지만, 어찌보면 진보정당 지지자야말로 ‘계급을 배반하는 존재’다. 가령 글줄이나 팔아먹고 사는 나를 생각해보자. 내 글 독자성향을 생각해 볼 때, 참여정부의 ‘상대적 진보성’이나 노무현이란 캐릭터의 매력에 대해 조금만 더 파스텔풍으로 그려도 먹고 살기가 더 편할 거다. 미욱한 나조차 그럴진대 노회찬이나 심상정 같은 훌륭한 정치인들이 받는 압박이 어떨지는 차마 상상이 안 간다.

    노회찬의 진보대연합론이나 심상정의 제3정당론 등은 앞서 내가 말한 유동투표층을 염두에 두고 있다. 2에서 벗어나 과거 민주노동당이 성취했던 9로 가자는 논의(진보대연합론), 더 나아가 민주당 이탈층까지 흡수해 20까지 만들어 역시 20이 된 민주당과 쇼부를 보면 승산이 있다는 논의다(제3정당론).

    주대환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3당의 지지층이 같으니 합당하는 게 옳다고 거든다. 지지층이 같다는 건 지금 내 얘기기도 하다. 심상정은 진보신당의 정체성이 ‘반 노무현, 반 민주노동당’밖에 없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내 생각도 그렇다.

    그들의 광장이냐, 우리의 광야냐

    먼저 현실론의 관점에서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은 구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민주당은 지방선거에서 승리했다. 국민참여당은 그런 민주당과의 지지층 경쟁에 더 관심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당과의 연합에서 대성공을 거두었으니, 진보신당에 관심가질 이유가 없다. 특히 분당 과정에 민주노동당이 받은 ‘상처’는 진보신당을 정상적인 경쟁자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민주노동당은 진보신당과의 통합을 바라지 않는다. 멸절시킨 후 흡수하는 쪽을 선호할 것이다. ‘분당 5적’은 척살하고, 나머지 인원은 반성문을 써서 오면 받아준다는 것이 그들의 심리일 거다.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래서 정말로 반성문을 쓰고 들어가겠다는 것인가?

    본질적인 부분도 있다. 진보정당이 대변해야 할 것은 적어도 사회적 약자다. 한국 사회의 부르주아들은 악착같이 한나라당을 찍는다. 중간계급들은 민주당을 찍거나, 진보정당들을 찍거나, 정치에 관심을 가진 채로 주변에서 관망한다. 그들의 20대 자녀들은 투표를 안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언제나 그랬고 한국 사회가 ‘모범’으로 보는 미국 사회도 그렇다.

    그 아래 계층들은, 영호남 지역주의에, 냉전이념이나 그것에 대한 과잉된 공포에, “너희들이 투표 안 해서 나라가 망한다”는 386세대의 20대들에 대한 ‘투표 안 하면 정박아’론에 포박되지 않는 이상 투표를 하지 않는다. 투표를 할 겨를이 없거나 정치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다. 무당파 층의 다른 버전이다. 이들은 투표소외층이라 불려야 한다. 정치가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여러 종류의 이데올로기에 포박된 ‘서민’에 비해 차라리 더 우월하다.

    유시민은 87년 이전의 통합으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개인적인 소망에 따라 20년 30년을 거슬러 갈 수는 없다. 그건 그 시절의 진보, 박제된 진보, 교조적인 진보다. 주대환 논리를 좀 더 나아간다면, 결국 유동투표층은 민주당 지지층과 계층이 같으니 민주당과도 합당하는 것이 옳다. 그걸 이 시대의 진보라고 볼 수는 없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당이 필요하다는 신념을 지닌 2를 제외하면, 우리에게 표를 던졌던 나머지 유동투표층은 민주당을 견제하기 위한 용도로 우리를 활용한다. 민주당이 ‘중산층, 서민을 위한 정당’이란 자신들의 모토에서도 이탈하자, 민주당이 지키기로 했던 그 약속을 우리에게 지켜내라고 하는 것이다.

    2005~2006년의 민주노동당이 별도의 의제를 설정하지 못하고 4대개혁입법의 조속한 처리를 요구하는 ‘급진적 열린우리당’이 된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지지층은 후보 단일화의 압력을 넣는 그 지지층이지, 우리 시대에 맞는 탄탄한 진보정당을 위한 지지층은 될 수 없다.

    나는 이 섹터는 민주당 이탈층을 노리고 나온 국민참여당과, 학력에만 차이가 있지 소득은 중간계급화한 민주노총을 기반으로 한 민주노동당이 책임지는 것이 맞다고 믿는다. 그 섹터를 두고 아웅다웅할 거라면 진보정당이 따로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해산하고 민주노동당에 가든, 국민참여당에 가든 그건 자신의 선택이다.

    글줄이나 팔아먹고 사는 쁘띠 리버럴 주제에, 지가 몸 던져 운동할 것도 아닌 주제에, 인생을 운동에 바친 선배들에게 더 힘든 운동을 권유하는 지금 내 마음은 편하지 않다. 다만 나같은 놈도 돈이 되는 글과 안 되는 글을 동시에 쓰고 살며, 이 글은 후자의 범주에 속한다는 사실을 변명으로 붙일 뿐이다.

    가슴 아픈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여, 설령 내가 사랑하는 정치인들이 민주당으로 간다고 해도 나는 그들을 축복할 것이다. 나는 그들이 출중한 능력이 있음을 알고, 그들이 가장 훌륭한 보수 정치인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이 ‘새로운 진보’라는 이름을 쓰는 것만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진짜로 새로운 진보정당 운동을 할 사람들을 막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유시민에게 당했던 그것을, 또 누군가에게 물려준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심상정은 진보에게 산에서 내려와 광장으로 나가자고 말했다. 그런데 그녀가 나가고자 하는 광장은 내가 민주노동당을 떠날 때 동의했던 그 사람들이 있는 광장이 아닌 것 같다. 남들이 닦아 놓은 그 광장에 우리도 들어가 아웅다웅 경쟁해보자는 것 같다.

    가설정당인 진보신당이 2년 동안 제 정체성을 만들지 못했다는 건 사실이다. 거기엔 내 책임도 있고, 그녀 책임도 있을 거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를 대변해야 하는가?”라고 물어야 할 문제를 정치자영업자들의 정체성과 이합집산의 문제로 그릇되게 환원할 수는 없다. 차라리 아무도 돌보지 않았던 광야로 나가자고 했으면 좋겠다.

    노회찬은 노조가 대변하지 않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을 위한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멋있었다. 내가 아는 것쯤은 그도 다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층적으로 민주당 지지층과 유동투표층의 이하에 있는, 저 30에 해당하는 투표배제층을 만날 기회를 못 찾는다.

    민주노총 뒷다리를 붙들고 “민주노동당만 사랑하지 말고 나도 사랑해 주세요!” 외치는 동안 비정규직 연대기금은 쓸 곳을 찾지 못하고 쌓여간다. 민주노총이 한국 사회에서 그나마 비정규직 투쟁을 열심히 하는 단체라는 건 나도 안다. 문제는 진보신당이 민주노총에 일말의 기대를 가지는 한, 스스로 투표배제층을 만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진보정당들의 배후에 있는 유일한 대중조직이 ‘귀족노조’라 불리는 민주노총뿐이란 것은 우리에게 절망감을 안겨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보정당을 접을 수는 없다.

    진보정당다운 진보정당을 위해

    진보신당의 당원과 지지자들은 나름의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혹자는 이들이 노회찬 심상정보다 유시민을 좋아하는 현실을 투덜거린다. 2008년 촛불 이후 들어온 당원들의 성향이 그랬다.

    하지만 그 후 2년이다. 빠져나갈 사람은 다 빠져나갔고, 남은 사람은 또 조금은 변했다. 한편으로 이 새로운 당원들은 민주노동당과 통합해야 할 이유를 모르고 ‘도로 민주노동당’이 된다면 안 따라갈 거라고 말하는 당원이기도 하다. 유시민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당내 명망가들이 당원들의 숫자를 자신들 정치협상의 지분 취급하는 것을 유쾌해 하지도 않을 거다. 만일 그런 짓을 한다면 유시민이 개혁당을 팔아먹은 것을 욕할 수가 없다.

    당의 지지자와 대변하려는 사람이 다르다는 그 ‘계급 배반’의 상황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가설정당의 틀을 벗고, 당원들과의 합의를 통해,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정당을 만드는 데 동의하는 모든 사람을 그러모아 새로운 진보정당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정체성이 분명해야 오히려 당원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당원들의 자부심이 분명하면 지인에게 설득할 수 있고 당원은 늘어나고 당비수입도 많아진다.

    생활환경이 비슷한 민주당-국참당 지인들이 단일화를 종용해도 “우린 대변하려는 사람들이 달라. 그리고 너희 표를 뺏으려는 것도 아냐.”고 말할 수 있다. “설령 너희 표를 빼앗는다 해도 장기적으로는 한국 사회에 도움이 될 거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것이 정체성을 세우는 길이지, 인위적인 정치협상이 정체성을 세우지는 않는다.

    지지층을 점검하되 실제로 투표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만나고 배려하고 대변하는 구체적인 활동들을 시작해야 한다. 부부가 매일 10시간 넘게 일해서 월 150 정도를 버는, 사실상 최저노동시급에도 못 미치는 벌이를 하는 자영업자들, 가사노동과 비정규 노동을 병행해야 하는 여성들, 사용자가 누구인지 도통 알 수 없는 파견/도급 노동자들, 최저시급 알바를 전전하면서도 본인이 문화생산자나 사장님이 될 수 있다고 꿈꾸는 청년들 등을 구체적으로 호출하고 접근해야 한다.

    노동조합 조직에 비해 훨씬 지난한 일이다. 하지만 척박한 땅이라고 씨앗도 뿌리지 않으면 어떻게 추수를 꿈꿀 수 있겠는가.

    이 시대, 변화된 환경과 변화된 자본주의에 적응하는, 앞으로 살 날이 많이 남은 사람들을 위한 진보정당은 그런 모습이 되어야 할 거다. 당이 그런 모습이 될 수 있다면 야권 단일화론자들의 욕을 감수하는 것쯤이야 별 일이랴.

    각자 가진 능력을 동원하여 진보정당을 위해 일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 선거연합 전술 따위의 문제는 그에 비하면 훨씬 부차적이다. 이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기는 한데, 글이 너무 길어졌으니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자.

    * 한윤형의 글은 노선, 선거전술, 선거 후 실천 등의 주제로 세 차례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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