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비폭력운동은 '불교도의 길'
    2010년 04월 25일 01:5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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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불교 월간지 <불광>에서 "좋아하는 불경에 대해 써달라"는 의뢰를 받고 고심 끝에 붓다와 한 군인의 대화를 그린 ‘전투활경’에 대한 일종의 ‘법문’을 작성했습니다. 혹시나 독자 분들 중에서 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불광>지 관계자의 양해 하에서 이 기고문을 여기 밑에다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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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인간이란 참 모순에 찬 종류입니다. 일면으로는 세계 어느 종교를 봐도 ‘이웃사랑’, ‘살해하지 말라’부터 ‘불살생계’까지, 다 나름대로 생명의 고귀함을 인정하고 ‘죽임’을 최악의 죄악으로 인정합니다.

서로 관련이나 영향 관계, 연락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담(노자)이나 묵자부터 야소기독까지 이렇게 일제히 "죽임"을 원칙적으로 반대하고 많은 추종자들을 득한 걸로 봐서는, "죽이지 말라"고 외치고 싶은 건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모양입니다.

국가에 의해 독점된 폭력

   
  ▲박노자 교수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담이나 야소기독의 소위 ‘기축시대'(칼 야스퍼스)부터 지금까지, 인간 사회가 과연 비폭력화된 바 있는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적 영역에서의 폭력이 줄어든 건 사실이지만, 공적 영역에서의 폭력은 국가에 의해 독점돼 대단히 강화된 데다 만인의 주목과 ‘이해’, 즉 일종의 심적 동의를 이끌게 이르렀습니다.

예컨대 지금 진행중인 아프간 침략을 보시지요. 캐나다나 라트비아부터 대한민국까지 미 제국의 모든 후국들이 일제히 황상의 부름에 응해 현대판 ‘회회교 반란의 토벌’에 군을 보낸 것은 일종의 ‘세계화된 제국주의 침략’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니면 천안함 비극에 북한이 관련됐다고 주장할 만한 확증도 없는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극우들이 ‘보복’을 외치면서 꽤나 수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는 상황을 보시기를.

‘보복’이란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 최신의 무기로, 북의 군에 끌려간 몇 명의 무고한 젊은이들을 국가의 이름으로 살해하잔 이야기를 뜻합니다. ‘국민 단결’의 제단에 그들의 목숨을 바쳐 우리 위대한 대한민국이 동아시아 최빈국 북한보다 우위에 있다는 걸 만방에 고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은 걸 보니 우리의 정신적인 현주소가 알 만합니다. 참 통탄스러운 이야기죠.

개인의 심성상 비폭력이 선호돼도 현실적인 폭력은 그 판도가 바뀔지언정 인류 역사 속에서 절대 줄어들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 폭력이란 ‘체제’ 차원에서 이미 제도화돼 있으며, 대다수 개인들에게 하나의 ‘기존 사실’로 보여지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개인들은 일종의 인격 분열을 겪게 됩니다.

평균적 한국인에게 "당신이 죽임을 당할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를 자기 손으로 죽일 것이냐"와 같은 선택을 안겨준다면 확신컨대 수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하면 당하지, 자기 손으로 특별한 적대관계가 없는 사람을 결코 죽이지 못할 것입니다.

사회화된 개인과 본래적 인성의 차이

살해는 인간에게 쉽게 하기 어려운 일이다 보니 각국의 군에서 조건반사적 상명하달을 반복훈련을 통해 익히잖아요.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죽이지 않으려는 개인의 본성을 꺾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예컨대 – 비밀리에 진행되고 정치적 영향을 쉽게 받는 – 군의 조사에 의해서 "북의 어뢰다"라는 잠정적 판단이, 확증이 없이라도 나온다면 ‘보복’ 여론이 꽤 상당하지 않을까 정말 두렵습니다. 개인으로서 자기 손으로 남을 죽이기가 어려워도, 국가가 타자를 죽이는데에 대해서는 토를 잘 달지 않죠. 그게 당연하고 일상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회화된 개인과 본래적 인성의 차이의 반영이라고나 할까요?

국가의 살인주의적 사회화를 거부하려는 이들에게 초기불교와 같은 평화주의적 종교들은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었을 터인데, 지금의 불교는 붓다의 원래 가르침과 별다른 관련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국가의 살인 훈육, 살인의 당연화/일상화를 거부하려는 이들에게 매우 제한적으로만 도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 불교에 대해 느끼는 아쉬움들 중에서는 이 부분이 제일 큽니다.

불경들에 대해서는 감로(甘露), 즉 마음을 적시는 단 이슬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이는 어느 불경에도 다 해당되겠지만, 나 같으면 무엇보다도 <아함부>에 포함돼 있는 초기 불경들이야말로 ‘단 이슬’로 느껴진다. 화려하고 신화적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 후기 대승 경전보다는 중생들의 절실한 물음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 형식으로 돼 있는 초기 경전들은 훨씬 더 마음에 쉽게 와닿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초기 경전 중에서도 무엇보다 <법구경>과 <수타니파다>, 그리고 여러 <아함경>들을 선호하며, <아함경>들의 방대한 내용 중에서도 특히 <잡아함경> 권32, ‘전투활경(戰鬪活經)’을 자주 보고 또 본다. 파리어 텍스트로 보자면 <상윳따 니카야>의 ‘요타지바 수트라’가 될 것인데, 그 영역도 구미 불자 속에서는 불교적 비폭력 논리의 주된 근거라고 자못 잘 알려져 있다.

부처의 반전평화 사상

이 짧은 경전의 내용은 부처님과 전사들이 사는 마을의 촌장 사이의 문답으로 이루어진다. 고금동서의 직업 군인들이 다 그렇듯이, 이 전사들 마을의 촌장도 ‘적을 무찌른다’ 것이 종교적으로도 정당한 행위라고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다.

그러기에 ‘확인 차원’에서 전투에서 적을 잘 죽이면 아수라들과 싸우다 죽은 하늘신들이 살고 있는 하늘과 같은 좋은 곳에서 정말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냐고 묻는 것이다. 적군 살해는 악업이 아니라 선업이라고 순진하게 믿는 이 군인에게 부처님이 바로 설법하기를:

“[전사가] 수단과 방편을 다하여 원수인 적을 잘 무찌르고자 한다면, 그 사람이 어찌 상해(傷害)하려는 마음을 먼저 일으켜, 저들을 결박하고 칼을 씌워 찔러 죽이려는 마음을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촌장이 – 아마도 자신의 경험까지 회상하면서 – 이 말씀에 수긍을 표하자 부처님이 “살인의 악업을 지은 자가 좋은 데에서 태어날 리가 없다”고 못박고, 이와 같은 터무니 없는 종교적 전쟁 옹호론을 퍼뜨린 이들이야말로 지옥이나 축생도에서 윤회했으리라고 덧붙였다.

결국, 이 경전에 의하면 전사들의 마을의 촌장이 바로 발심을 하여 부처님께 귀의하고 그 악업짓는 일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악인 참회’의 모티브는 어쩌면 종교적인 윤색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인연을 잘못타서 세습적 군인이라는 악한 직역을 갖게 돼 평생을 악업 속에서 보낸 한 중생의 진정한 개안(開眼)에 대한 기억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설한 내용은 사실 지극히 상식적이고 근기가 덜 성숙된 중생까지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다.

체 게바라의 ‘규율을 위한 폭력’

명분이 무엇이든간에 살인이란 중생을 해치려는 악한 마음을 낸다는 걸 의미한다. 물론 명분이 아주 좋은 경우에는 이 악한 마음을 어느 정도 순화시킬 수 있겠다. 저 유명한 체 게바라가 유격대 전쟁하면서 전투가 완료되자마자 의사의 본업으로 당장 돌아가 부상 당한 관군 병사들을 치료하지 않았던가?

이 정도면 부득불 폭력에 호소하게 된 의사(義士), 인인(仁人)의 최상급에 속하겠지만, 그도 탈영병들을 총살하는 등 ‘규율을 위한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체 게바라 같은 ‘행동하는 양심’까지도 폭력의 악업을 완전히 멀리하지 못했다면 국가의 벌을 두려워하거나 그 상을 탐하거나 그냥 타성적으로 복종하는 일반 군인의 임전(臨戰)의 마음가짐은 과연 어떻겠는가?

부처님의 묘법을 실천하자면 반전, 비폭력 운동이야말로 독경이나 참선만큼이나 절실하다는 것은, 이 경전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기계처럼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면서 짓는 악업만큼은 그 과(果)가 안좋은 악업도 없다. 불법을 듣고 행할 수 있는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났음에도 그 인간성을 포기하고 동물만도 못한 기계로 스스로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말씀이 진실이라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폭력에 대한 거부를 실천할 만큼 무외(無畏)의 마음을 낼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불자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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