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L을 찾아서
    2010년 04월 20일 10:5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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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를 요상하게 보는 사람들을 대할 때, 전략적 이유로 그들에게 다시 던지는 의문 중 하나가 “너는 어쩌다 이성애자가 되었니?”이다.

많은 사람들은 동성애라는 것을 마치 빨간 자동차와 까만 자동차 중 무엇을 고를지 고민하는 것 같은 ‘선택의 문제’이거나, 성장 과정에 해소되지 못한 프로이트적 욕망에 의한 ‘트라우마의 문제’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너는 어쩌다 이성애자가 되었니. 라는 질문은 대개의 이성애자들이 내가 왜 남자/여자를 좋아하는 지를 고민하지 않는 것처럼 동성애라는 사랑의 방식도 ‘되거나’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에게 동성애에 대한 이미지는 발가벗은 채로 아담과 이브가 에덴의 동산을 뛰어노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쩌면 아담은 남자일 수도 여자일수도 있고, 이브 역시 남자일 수도 여자일 수도 있다. 이 둘에게 ‘사회’ 혹은 ‘관습’이란 없다.

   
  

그냥 내가 사랑하면 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것이다. 따라야하는 롤 모델, 본받아야할 교훈, 정상이라 불리는 몸짓들도 없다. 아담이 눈이 세 개라도, 이브가 팔이 여섯 개라도 이들 모두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그냥 초원에 풀어헤쳐진 염소가 이리저리 뛰어놀듯 내게도 동성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냥 장애물이 쳐져 있지 않은 넓은 들판에 던져진 감정이다.

나는 어쩌다 동성애자가 되었을까

하지만 나 역시 내가 왜 여자를 좋아할까를 고민했던 적이 있다. 사실 무장된 이론을 만나기 전, 소수 정체성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은 ‘있기’ 때문에 이 문장은 재미있게 꼬여있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지?” 하는 의문을 갖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생물학적인 특질이 아닌 경우라면 이유를 찾는 데 더 급급하다. 이유를 찾아야 나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에는 온갖 언어들이 엉겨 붙은 껌처럼 따라붙는다.

“나는 왜 왼손잡이가 된 걸까?”
“여자인 나는 왜 여자를 좋아하는 걸까?”
“나는 왜 이렇게 머리카락이 많이 빠질까”
“왜 나는 몸에 이렇게 털이 많을까”
“내 이는 왜 이렇게 누런 걸까?”
“내 몸은 여자인데 왜 나는 여자라는 내 정체성이 불편한 걸까?”

탈모, 다모, 치아미백 등은 어느 덧 사회가 요구하는 미의 기준으로 검열되고 있고 새롭게 콤플렉스로 자리 잡고 있는 항목들이라 신생 소수자 기준으로 한번 같이 포함시켜보았다.

나 역시 나 자신을 방어할 변명거리에 골몰한 적이 있다. 당시에 나는 어머니에 대한 지나친 애정, 혹은 남성 상(像)의 부재를 내 동성애의 이유로 생각했었다. 흔히 말하길 청소년 시기에 성(性)에 눈을 뜬다는 데 그 시절 부모님의 냉전으로 아버지는 가출을 감행하셨다.

시기에 따라 빈도수에 차이가 있지만 나는 정말 그를 자주 보지 못했다. 정말이지 나의 청소년 시절에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나는 이것을 단서로 내가 남자(의 육체, 이미지, 여성과의 차이)를 ‘모르고(대리 경험조차 전무!)’ 그래서 여자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과정을 유추하자면 이렇다. 나는 여중 여고를 나왔고 나에겐 ‘남성’을 경험해볼 어떠한 사건도 없었다. 나의 온갖 가능성에 남성은 없었고 이성의 존재라곤 슈퍼 아저씨,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청년, 군인 정도랄까. 하지만 그들은 나에게 어떠한 성적 판타지나 므흣한 감정을 유발시키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그냥 가로수 같은 것, 빨간 불로 변한 신호등 같은 것, 겨울이면 불쑥 튀어나오는 크리스마스트리와 같은 무의미한 것들. 그래, 바로 이것이다!

   
  ▲ 영화 <달과 꼭지> 포스터

나는 이것과 더불어 아버지의 자리까지 넘쳐 흘러 나를 에워싼 어머니의 존재를 생각했다. 아주 어릴 때 ‘달과 꼭지’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등장하는 모유수유 장면을 보고 나는 엄청난 패닉에 빠졌었다. 떼떼라는 남자아이에게 에스트렐리타라는 여성이 자신의 젖을 공중 분사하는 장면인데 당시 내가 초등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생이 되어 그 영화를 다시 볼 때까지 그 장면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나는 그 장면이 이토록 강렬하게 내 머릿속에 각인된 것과 나와 나의 어머니의 관계를 연결 지었다. 여성과 여성의 육체에 대한 나의 욕망의 언저리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같은, 유년기가 지나면서 떨쳐버렸어야 했을 애매한 습관 같은 것이 해소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런 추측은 나를 지배했다. 분명 내 인생의 한 시점에서는 그 추측이 사실이라고 정말 믿기도 했었다.

지금도 가끔씩 아무렇지 않게 여자인 내가, 다른 여자와 섹스를 하는 것이 스스로 놀랍게 느껴지기도 한다. “왜 난 아무런 거부감도 없는 거지?” 하는 놀라운 발견이랄까. 동성애가 이상한 것이라던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나는 이 행위에 죄책감이나 불편함, 어색함을 느껴야 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정말로, 내가 여자와 연애를 해왔던 모든 시간을 통틀어 그런 어색함은 느껴본 적이 없다.

아직도 나는 레즈비언이다

몇 년 전 어떤 소설책을 읽었다. 그 책의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배경은 조선시대 나 그쯤 이었던 것 같다. 결혼을 하고 첫 날 밤을 맞이하기 전 엄청 마마보이 같은 남자가 부모님께 묻는다. “아버님 어머님 전 오늘 밤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러자 엄마였나, 아빠였나. 둘 중 누군가가 그의 옷고름을 단단히 여며주며 말한다. “그냥 네 몸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알려줄 거다”

야동으로 성교육을 마친 나로서는 이 말이 무척 이상하다고 생각됐다. 정말 그냥 아는 걸까? 누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어떤 체위나 애무를 단 한번 본 적 없이 수행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소설 속 부모님의 말은 꽤 정답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어쩌면 ‘가장 적절한 것을 골라라’는 질문이었다면 정답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다.

내가 레즈비언 야동에서 본 것은 하나 같이 말도 안 되는 섹스였는데 그러한 배경 지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없이도 나는 내 몸이 이끄는 데로 파트너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정말로 말하자면 마치 기름이 키친타월에 스며들듯이, 기분이 좋으면 콧노래를 흥얼거리듯이 자연스럽게 모든 것은 이루어졌다. 그리고 나는 행복감과 충족감을 느꼈다. 마치 내가 ‘정상적인 행위’를 한 것처럼 말이다.

나는 나를 선천적 절름발이, 균형감을 잃은 애꾸눈이라고 생각진 않는다. 내가 나를 방어하기 위하여, 나를 이상하지 않은 사람으로 만들어 보고자 자연스럽게 꾸며댔던 여러 이야깃거리들은 이미 오래전에 뽑혀 나온 젖니와 같다. 그래서 지킥(지붕뚫고 하이킥)의 해리처럼 작은 함에 그것을 넣어놓고 그냥 가끔씩 꺼내보는 것이다. 참 재미있는 애였어,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사실 여러 경험을 놓고 봤을 때, 나조차도 가끔은 레즈비언인 내가 낯설다. 왠지 어색해야 할 것만 같은 여성과의 연애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내가 신기하다. 그러니 “넌 어쩌다 동성애자가 되었니?”라는 질문에 불쾌감을 느끼거나 뜨악하진 않는다. 그도 그럴 만 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자기변명의 시간들을 뚫고 나온 지금을 나 스스로 대견해한다. 정체성이란 언제든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니 내가 나에게 무겁게 레즈비언을 덧씌울 생각은 없다. 하지만 오랜 시간동안 내가 가져왔던 나의 ‘무엇’으로 그것이 쪼그라들진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같이 어깨동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이제 나의 이야기는 두 발을 갖고 자유롭게 평지를 뛰어 다닌다.

                                                       * * *

필자소개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는) (지금은)레즈비언. 백수로 지낸지 석 달 만에 실없는 소리로 하루의 반을 채우는 무척 의미 있는 사람이 되었다. 실업을 궁극의 놀이로 발전시킬 방법을 고심하지만 동시에 심연이 아득하다. 4월 한 달 간 세 번의 글로 근래의 사소한 단상들을 풀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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