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지금 바르셀로나에 있다"
        2010년 04월 14일 09:5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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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하여 나는 오늘 대학을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시들어버리기 전에.
    쓸모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겐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 탑은 끄떡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대학생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두고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 두고 볼 일이다."
    <고려대학교 김예슬씨의 자보中에서>

    나는 99년 이 학교에 입학하였고, 07년에 졸업하였다. 부모님의 바램대로 대기업에 입사하였고, 결혼을 하고, 서울에 집을 샀다. 대출한도는 5000만 원이었고, 대리 진급을 위해 2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내 인생이 아니었다. 이것은 타인의 바램의 조합이었다.

    그래서 나는 출국하였다. 나는 지금 바르셀로나에 있다. 나는 근 10년간 슈뢰딩거 방정식을 공부했지만, 지금은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려고 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나는 미분방정식과 싸우고 있지 않다. 내가 싸우는 대상은 코카인과 마피아다.

       
      ▲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거리 풍경

    나의 지인과 나의 부모님 그리고 나의 부인은 이런 나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얼마 전 자퇴 선언을 한 고려대학교 김예슬씨는 나를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시대 슬픈 대학교 졸업생의 자격으로, 그리고 사회에 먼저 발을 딛어 본 선배로서, 그리고 한 동시대의 인간으로서 나는 오늘 그녀에게 강력한 지지를 보내려 한다. 나는 김예슬씨와 ‘합당한 이유를 가지고’ 대학을 거부하는 모든 ‘당신’에게 강력한 지지를 보낸다.

    더 이상 미분방정식과 싸우지 않는다

    내가 99년부터 07년까지 싸워왔던 문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진리는 무엇인가’였고, 다른 하나는 이 첫번째 문제를 방해하는 ‘사회란 무엇인가’였다. 진리가 무엇인가를 궁금해 하면서 나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사회가 무엇인가를 궁금해 하자마자, 나는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괴테의 시와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궁금해 하면서,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지만, 삼성의 연봉과 여자들의 결혼 기준을 궁금해 하자마자,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99년도는 이 두 가지 투쟁적인 문제들을 고민하는 데 훌륭한 시간이었다. 내게 사회는 적어도 이 두 가지 문제를 흑백논리로 선택하게 하지는 않았다. 나는 고뇌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라는 특혜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학교를 떠나던 07년도의 사회에서, 이 두 가지 문제를 ‘함께’ 고민하던 나는 ‘이방인’이었다. 그  시절 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이상한 사회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99년도와 07년도의 한국 사회 혹은 적어도 대학 사회는 다른 ‘교의(Dogma)’를 갖고 있었다. 새로운 이 ‘교의’. 그것은 신자유주의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이상의, 마르크시즘 이상의 것이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이 교의는 단지 사회의 정치와 경제만을 손대는 것이 아니라, 인간정신의 마지막 바닥까지 뿌리째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칼폴라니) 이 교의는 ‘진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원천봉쇄하고 있었다.

    내가 떠나던 07년도를 나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내 자리를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책임감 없이 도망치듯 졸업하였다. 그 이후의 신입생들은 그러므로 이 교의 아래 살고 있으리라 예상해왔다. 그리고 그 예상은 많이 틀리지 않은 듯 하다.

    후배들을 남겨두고 도망치다

    하지만, 졸업 후 나는 그 교의가 단지 대학의 울타리 안에서만 존재하는 악몽 같은 우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국회에 인턴보좌관으로 잠시 머물고 있을 때에도, 대기업의 연구원으로 있을 때에도, 중소기업의 영업사원으로 있을 때에도, 그 무서운 저주는 우리 모두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옆에 앉아있는 과장님이 고민하는 문제에도 그 지긋지긋한 교의가 뿌리내리고 있었고, 거래처 사장님이 골몰하는 문제 안에서도 그 교의는 빙긋 웃고 있었다.

    그 교의는 무엇일까? 하지만, 나는 이것에 ‘감히’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늘만의 일이 아니라, 소위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었고, 매우 많은 ‘똑똑한’ 사람들이 자기들만의 권위에 찬 견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쩌면, ‘주눅들어서’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교의에 공격 당하는 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그리고 ‘너’뿐만 아니라, 바로 ‘나’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나’를 둘러싼 모든 보호막이 하나씩 굴복 당하고, 최후의 보호막인 ‘너’마저 돌변해버리고, 이 교의는 내 눈앞까지 돌진해서 칼을 내 앞에 들이댄 것이다.

    바로 이때 나는 선택해야만 했다. ‘나의 삶’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타인이 요구하는 삶’을 선택할 것인가. 나는 전자를 택했다. 그리고 많은 것을 잃었다. (나는 그 상실을 명확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나와 유사한 선택을 한 타인을 한 명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지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바닥까지 내려가 보자고 생각했다. 의도적인 몰락. 나는 그것을 고의로 추구했다. 복수하듯이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렸고, 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많은 사람들이 실망했고, 나는 미쳤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미쳤다, 그래서 평화와 기쁨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 많은 고통들이 지나간 후에는, 예기치 못한 평화가 그리고 기쁨이 찾아왔다. 그러나 나는 이 평화와 기쁨의 경로를 추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돌발적이기 때문이다.(에드문트 훗설) 하지만 많은 지적 실패를 해 본 지성인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이 돌발적인 기쁨과 평화는 주관적인 것은 아닐까?

    그것들은 우리에게 하나의 거대한 기준이 되어 줄 수 없는 작은 체험들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확실히 나는 이 기쁨과 평화를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 돌발적 기쁨은 미래의 거대한 계시적 실체의 그림자임이 분명하다는 것은 확신하고 있다.(빌헬름 딜타이)

    나는 대학이 그리고 사회가 바로 이 본질적 돌발성 위에서 다시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갑작스런 계시 같은 돌발성 위에서야말로, 우리는 케케묵은 교의를 규모 있게 무너뜨릴 수 있고, 수 많은 고통들을 저돌적으로 부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서울의 출근 풍경

    자,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이 돌발적 기쁨을 거대한 규모로 유혹해서 끌어들이기 위해. 그리고 그 해묵은 교의를 부수고 새 교의를 건축하기 위해. 신선한 새 역사적 계시를 사회 일반에 뿌리내리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당신의 가방에 들어있는 토익책을 쓰레기통에 ‘화끈하게’ 버려야 할까?
    내일 볼 시험준비를 포기하고, 정당 가입을 하러 여의도에 가야 할까?
    부모님의 바램을 조롱하고, 회사 입사 거부 메일을 써야 할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프리츠 파펜하임) 이것은 일견 내가 우유부단하게 판단을 유보하는 사람으로 비추이게 한다. 왜냐하면, 확실한 ‘해답과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원리적인 정답은 없다 

    하지만, 이런 질문에는 원칙적으로, 그리고 원리적으로 해답은 없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영원히’ 대답은 없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실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구현되는 ‘결과’에 가까운 것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가 고유하게 선택하는 것은, 이 선택들 내부에 있다.(이것은 철학의 문제이기 때문에 더 이상 진전시키지 않으련다.) 거기에는 진정으로 우리가 대답할 수 있는, 그리고 대답해야만 하는 질문들이 산재해 있다.

    그 질문 중에 하나가 바로, 진리는 무엇인가였고, 사회는 무엇인가, 였다. 당신은 누구이기에, 옆에 있는 당신의 친구가 대기업에 입사하지 못하는 것을 은근히 조롱하는가. 혹은 서열화하는가. 하지만, 중요한 것은 대기업 입사도, 그리고 그 조롱도, 그 서열화도 아니다.

    진정으로 우리에게 심각한 고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이 작은 결과들의 집합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당신의 친구에게 가하는 그 ‘작용’이다.(이 ‘작용’에 우리 모두는 가장 엄숙한 집중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적 남용도, 폭력도, 커뮤니티도, 신자유주의도, 자본주의도 이 어마어마한 사태를 감출 수 없다. 타인 앞에 서 있는 당신 자체에 관한 의미, 그리고 타인에게 ‘작용’하는 당신의 의미. 이 두 가지 의미가 서열화와 조롱, 그리고 대기업 입사의 경쟁이라는 추악과 슬픈 현실의 뿌리인 것이다!

    바로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 그리고 타인에게 작용하는 그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 이 두 가지 질문이 철학자의 노트에서 감당함을 얻지 못하고, 대학 강당을 벗어나서 사회일반에 거친 해일을 가져다 주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는 이런 당혹감을 느껴야 하는가. 왜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가 일찍이 고민하지 않던 이 문제를 도대체 우리는 감당해야 하는가. 하지만 이런 문제는 역사가들의 몫이다.

    새로운 교의를 향해

    그렇게 우리가 오늘 생각한 문제는 역사적 문제일 수도 있고, 철학적 문제, 혹은 사회적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것은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우리는 더이상 그 ‘똑똑한’ 사람들의 철창에서 갇혀있을 수 없다. 그들이 보호의 명목으로 우리를 결박하려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더이상 보호가 아님을 깨달아간다.

    노파를 죽인 라스꼴리니꼬프가 소냐의 무릎을 안고 눈물을 흘린 것은 하나의 드라마이다. (죄와 벌. 도스토에브스키) 그것은 교의에 대한 맹목적 신뢰가 아닌, 교의를 대항한 하나의 행동의 결과였다. 행동은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이 시대의 슬픈 통조림문명은 그러므로 이 ‘드라마 없음’으로 명명될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 없는 문명, 행동 없는 문명, 옛 교의에 벌벌 떨고 있는 문명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당신에게 라스꼴리니꼬프적인 살인을 추동하고 있는가? 역시 그럴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추동 하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드라마로의 침투! 바로 행동. 그것이다!

    이 드라마로의 과감한 침투가 우리에게 새로운 교의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것이 여론의 형태로 나타나든, 대학의 지적 분위기로 나타나든, 힘찬 국력으로 나타나든 그것은 저 ‘행동’의 결과이다. (이 ‘행동’의 의미는 정치적 의미가 아님을 이제 여러분은 알 것이다.)

    당신은 지금 교의 앞에 그저 서있는가, 아니면 옛 교의에 대항한 행동을 앞두고 있는가. 그것이 바로 새로운 한국인과 옛 한국인을 구획하는 질문이며, 현대인과 새로운 현대인을 다시 나누는 분수령이다. 당신이 진정한 대학생이라면, 꼭 선택해야 할 길이 여기 있는 것이다! 새 교의를 만들어달라! 그것이 당신이 대학생이라는 그대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지 않을 유일한 사명이다.

    나는 행동을 해왔고, 지금도 매 순간 행동을 앞두고 있다. 새 교의를 쓰기 위해서 말이다. 김예슬양은 처음으로 행동을 기획했고, 또 다른 제2의 김예슬양들이 행동에 동의했다. 그리고 더 많은 제3의 제4의 김예슬양이 생기고 있다. 우리는 같은 빛을 보고 있다. 당신도 그러한가?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당신의 얼굴을 보고 싶다. 나는 우리 옆에, 우리 곁에 당신이 있어주길 강력히 촉구한다. 한국인으로서, 인간으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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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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