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즐겁게 싸워도 충분히 이긴다"
        2010년 01월 28일 10:02 오전

    Print Friendly

    동교동 부근 홍대앞에는 ‘걷고 싶은 거리’라는 게 있다. 지금은 사방팔방 고기집 천지라 걷다가도 굽고 싶고, 굽다가도 걷게 되는 거리.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그저 그런 고깃집과 술집들이 늘어서 있을 뿐인데, 적당한 요일 알맞은 시간이 되면 전국에서 몰려온 젊은이들로 거리는 촘촘해진다.

    그 거리 한가운데 엄보컬(엄광현 씨) 일터가 있고, 길 건너엔 그의 집이 있다. 그리고 걷고 싶거나, 굽고 싶은 거리 끄트머리에 벌써 한 달이 넘어간 ‘작은 용산’ 두리반도 있다.

    지난 1년여 간 매주 월요일이면 엄 씨와 그의 부인 김선수(김정은 씨)는 용산으로 향했다. 엄 씨는 일주일에 딱 하루인 금쪽같은 휴일을 용산에서 보냈고, 김 씨 역시 매번 그런 남편과 함께 했다. ‘천지인’의 보컬과 연주자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2006년 결혼을 했고, 천지인을 나와 거리의 딴따라로 변신했다.

    그들은 기타와 아코디언만으로 ‘경무장’하고 기동성 좋게 투쟁 사업장을 쫓아다녔다. 2008년엔 기륭에서 2009년엔 용산에서 그리고 2010년인 올해는 두리반에서 그들을 만날 수 있다.

       
      ▲ 두리반에서 공연 중인 김선수(왼쪽)와 엄보컬 (사진=고세진 기자)

    진보신당 당원들이자 “투쟁현장에 밥 얻어먹으러 다닌다”는 명랑 뻔뻔한 부부를 지난 20일 두리반 공연이 끝난 뒤 만났다. 이 날도 엄 씨 일당은 철거용역들이 죄다 뜯어내 황량하기 그지없는 두리반에서 기세 좋게 ‘갓김치’를 갈취해 갔다. 예의 그 환한 웃음과 함께.

                                                          * * *

    그걸(갓김치) 막 그렇게 받아와도 되나?

    김선수(이하 김) – 기꺼이 주신 거니까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왔다. 지금이 벌써 밤 11시가 다 되어가는데 오늘 용산참사 1주기 문화제부터 아무것도 못 먹고 공연만 했다. 잘 익어서 엄청 맛있다고 하시던데 얼른 집에 가서 먹어보고 싶은 생각뿐이다.(웃음)

    엄광현(이하 엄) – 이게 다 고세진 기자가 현장을 잘 안 오니까 몰라서 그런 거다. 장기투쟁 현장이라는 게 겉으로 보는 거랑은 많이 다르다. 집회에서 보면 늘 유족들께서 상복입고 눈물 보이시고 그러시지만 사람이 어떻게 1년 내내 울면서 살 수 있나. 그 안에도 다 사람 사는 모양이 있어서 웃기도 하고 농담도 하고 그런다.

    어허 대체 무슨 소릴 하시는 거냐. 이랜드 투쟁 때만 해도 내가 아주머니들께서 무릎에 앉혀놓고 쓰다듬어주고 싶은 꽃미남 동지 1위로 꼽히곤 했다(웃음).

    – 남일당 평상에 전재숙 어머니께서 빼짝 말라서 우두커니 앉아 계시곤 했다. 그러다 나랑 눈이 마주치시면 갑자기 눈이 반짝반짝하시면서 “밥 먹어라, 어여 악기 내려놔라” 이러시면서 막 수다를 떨기 시작하신다. 그리고 늘 “저 쪼끄만 사람이 저 큰 악기 메고 다닌다”고 남편한테 잔소리를 늘어놓으신다. 내 튼튼한 하바신을 아직 못 보셔서 그런 거지만.(웃음)

    – 정말 그 역정이 다 나한테 날라왔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악기 달라고 해도 안 준다. 어머니들한테 나 혼나는 거 볼라고.(웃음) 비참한 죽임이 있었던 용산이었지만 남은 사람들은 그렇게 희박하게 웃을지언정 꿋꿋이 살아냈다. 모두들 감사하게 생각한다.

    매주 공연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 개근을 한 건 아니다. 용산은 한 네 번 정도 빠졌었다. 보일러가 얼어터졌을 때랑 아팠을 때 못 갔었다. 그렇게 몇 번 안 빠졌는데도, 빠진 다음 주에는 늘 문정현 신부가 예쁘게 사제복 입고 조용히 오셔서 “어제 왜 안 왔어”라고 하시는데, 그게 생각보다 엄청 무서운 장면이다.(웃음)

       
      ▲ 김선수 엄보컬 부부가 김인국 신부(오른쪽)와 함께 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엄보컬 김선수의 기타와 아코디언)

    – 억지로 간 게 아니다. 이건 겪어봐야 알 수 있는 느낌인데 돌아올 때 뭐랄까 기분이 좋다. “매주 이렇게 봉사하러 와서 고맙다”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셨는데, 봉사는 당치도 않고 그저 내가 일방적으로 힘을 실어주는 그런 연대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에너지를 받아오는 그런 연대라고 생각한다.

    공연하고 돌아올 때면 기분이 정말 뿌듯하고 좋았다. 유족들보다 우리가 더 힘을 얻고 일상을 위로받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늘 우릴 기다리고 계셨고.

    – 보람이라고 하면 좀 그렇고 뭔가 짜릿한 느낌이 있다. 중독성 있는. 힘들고 피곤할텐데 매주 어떻게 그렇게 가냐고들 묻는데 잘못된 질문이다. 피곤이 풀린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아내 말대로 용산에 계신 유족들, 철거민들, 신부님, 사제님 그리고 수많은 활동가들과 시민들로부터 삶을 힘차게 살아낼 에너지를 받아왔다.

    – 이런 얘긴 좀 없어 보일 수 있는데 난 용산에 밥 먹으러 간 부분도 있다.(웃음)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용산밥이 진짜 맛있었다. 철거되기 전 식당 하시던 분들이 많이 계셔서 된장찌개 하나를 끓여도 예사로 안 끓이셨다. 밥도 맛있었고 용산만 가면 이 분도 밥 먹으라고 하고 저 분도 밥 먹으라고 해서 집에 온 것처럼 편안했다. 그러다 보니 억지로 가거나 그런 적이 없었다.

    오늘 용산참사 1주년 기념문화제를 끝으로 많은 부분이 일단락될 분위기다

    – 그나마 잘된 거지 하다가도 기분이 묘해지고 그게 계속 반복된다. 뭐라 기분을 표현하기 어렵다.

    – 1월 6일 마지막 미사 때 문정현 신부님이 “우리 이제 언제 또 봐”라고 하셨을 때 가슴이 짠했다. 김인국 신부님은 “왜 못 봐. 우리 용산‘계’ 만들건데”라며 웃으셨지만 정이 많이 들어서 서운하기도 했다. 우리 부부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다. 믿는 종교가 없다.

    그런데 용산투쟁을 통해 신부님들은 정말 사랑하게 되었다. 신부님들을 통해 길바닥에서 깽판치고 멱살 잡는 분노가 아닌 나 같은 사람도 거룩한 분노로 불의에 맞설 수 있음을 배웠다. 용산을 통해 우리 부부도 성장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건 용산투쟁이 절대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모두가 용산참사가 해결된 것처럼 얘기하는데 해결된 건 채 반도 안 된다. 수사기록 2000쪽이 공개됐지만, 진상규명은 반드시 이뤄져야 하고, 책임자 처벌도 마땅히 돼야 하고, 구속된 분들도 하루빨리 석방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도 다 하는 얘기지만, 용산이 결코 끝난 문제가 아님을 우리가 끊임없이 얘기해야 하고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천지인’ 활동하던 때와 비교하면 어떤가?

    – 천지인 때는 그 틀로 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대중가요 시스템과 실력으로 맞짱을 뜨고 싶었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지금은 아내와 함께 연주하고 노래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찾은 듯한 느낌이 든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가난하지만 지금이 더 즐겁고 자유롭다.

    – 당시에는 ‘천지인’이라는 이름만으로도 환영을 받았지만 지금처럼 자유롭지는 못했다. 지금은 남편과 기타 하나, 아코디언 하나만 메고 나서면 그걸로 끝이다. 천지인이었다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지금은 둘이서 결정하고 공연하면 되니깐 늘 내일 공연은 뭐할까 이런 고민을 하면서 설레고 즐겁다.

       
      ▲ 사진=엄보컬 김선수의 기타와 아코디언

    – 다음주부터 두리반 공연할 때 탬버린과 캐스터네츠를 준비해 갈 생각이다. 보기만 하는 공연이 아니라 같이 연주하고 같이 노래하며 즐기는 공연을 만들 생각이다. 나도 학생운동도 했었고, 이런 저런 일들을 많이 겪으며 살아왔지만 투쟁도 좀 따뜻하고 즐겁게 갈 필요가 있다. 그래야 쉬이 지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렇게 가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진보신당 이전에 정당 활동을 한 적이 있나?

    – 진보신당 이전에 당적은 없었다. 민주노동당에 늘 관심을 두고 있었고, 투표 때마다 찍기도 했다. 하지만 입당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 같이 하지 못할 이유보다는 같이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얘기할 수 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에는 이 사람도 나도 당비 만원 낼 돈도 없었다.(웃음) 지금은 한 달에 만원씩은 낼 수 있는 형편이고 그래서 진보신당 출범하는 걸 보면서 여긴 좀 잘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입당했다.

    당당하게 만원 내는 당원으로서 진보신당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 당대의 사회 약자들과 연대하지 않는 진보는 진보가 아니다. 연대는 하되 근엄하게 팔뚝질하지 않고, 구호 외치지 않고, 판에 박힌 운동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진보신당에 발 담그고 있을 뿐 우리가 진보신당을 어떻게 만들겠다는 생각 따윈 안한다. 우린 딴따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며 살 뿐이다. 당이나 당원들에게 뭘 기대하고 변화를 촉구하고 이런 건 우리 몫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 간혹 용산에서 “용산 싸움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나요”라고 묻는 분들이 있었다. 그럴 때면 “그걸 저한테 물으신 거에요?”라고 되묻는다.(웃음)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 한다. 두리반 유채림 작가 부부가 농성 20일 만에 처음으로 우리 공연 덕분에 웃어보셨다고 하셨다. 이런 작은 것들이 우리가 투쟁현장에서 공연하는 이유다.

    – 딴따라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누군가 기쁘게 해주고 싶기 때문에 연주를 한다. 그런데 뼈가 빨간색이라 그런 투쟁현장을 찾는 것 뿐이다.(웃음).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