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텁석부리 사내가 나타났다. 룰라였다"
        2010년 01월 26일 09:3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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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는 최근 노동계급의 시각에서 브라질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와 룰라 정부의 경험을 분석하고 평가한 책 『브라질에서 진보의 길을 묻는다』(후마니타스)를 펴냈다.

    저자는 룰라 정부의 경험이 보여준 것은, 노동계급이 노동계급 정당을 건설하여 정치세력화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노동계급의 이익 실현이 담보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또 노동계급 이익의 두 축을 구성하는, 물질적 이해관계 중심의 당면 계급 이익과 생산체제 변혁을 지향하는 근본 계급 이익이 서로 갈등하는 모순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양자를 동시에 실현하는 것은 어렵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따라서 노동계급의 정치 세력화가 당면 계급 이익을 중심으로 추진된다면, 집권하더라도 근본 계급 이익의 실천이 실종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집권 전략의 덫’이라고 말한다.

    그는 최근 <레디앙>과의 인터뷰에서 "룰라가 집권했다고 열광하고, 변혁적 정책 펴지 않는다고 냉소하고, 쉽게 잊는 냄비 같은 반응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브라질만큼 노동자 정치세력화 하기도 어려운 조건인데,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 집권 이전에 뭘 준비해야 하는지 브라질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라며 이 책 출간의 의미를 설명했다.

    <레디앙>은 저자와 출판사의 동의를 얻어 이 책의 머리말과 4부 ‘평가와 함의’ 부분을 몇 차례에 걸쳐 나눠 싣는다. <편집자 주>

    2003년 1월 나는 처음으로 브라질을 방문했다. 물론 거기에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2000년 전후 나는 스웨덴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동구권 붕괴 이후 스웨덴의 우데발라와 임노동자 기금제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던 것이다.

    스웨덴 자료들을 열심히 보고 있던 무렵, 대우자동차의 해외 매각이 추진되고 있었다. 한동안 대우자동차 노동자들과 열심히 고민하며 우리 나름의 대안을 만들어 싸워 봤지만 우리는 패배했다. 다시 나는 연구자로 돌아왔고, 당시 유럽 통합의 사회적 차원에 대한 논의가 진전되고 있던 유럽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TV에서 본 ‘이상한 장면’

    하지만 2002년 봄 브라질이 심상치 않았다. 1994년과는 달리 온갖 음모와 난관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당의 룰라(Luiz Inácio Lula da Silva)는 선두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도박을 했다. 그해 여름부터 포르투갈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룰라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내 나라에서, 내가 찍은 대통령 후보가 당선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브라질 룰라의 승리는 충분한 보상이 되고도 남았다.

       
      ▲ 군중들에 둘러쌓인 브라질 룰라(오른쪽) 대통령

    룰라는 2003년 1월 1일 대통령에 취임했고, 내가 브라질 상파울루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열흘 뒤였다. 어느 날 호텔 방에서 자료를 정리하고 있던 중 텔레비전에서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화면에는 2층 버스가 있었고, 그 버스에서 끊임없이 사람들이 내리고 있었는데, 주변 풍광은 그 말끔한 버스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헐벗은 지역이었다. 대략 40여 명쯤 내리고 난 다음 연청색 남방을 입은 텁석부리 사내가 나타났다. 룰라였다.

    룰라가 버스에서 내려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주민들이 달려들었다. 경호원들이 잽싸게 몸을 날려 주민들을 차단하려 했지만, 룰라가 경호원들을 제지했다. 룰라를 에워싼 주민들은 남루한 늙은 농민들이었다. 검고 거친 팔뚝들이 룰라를 얼싸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대통령이 아니라, 오랜만에 귀향한 이웃집 총각을 맞고 감격하는 장면 같았다. “내 새끼, 우리 새끼.”

    텔레비전 진행자는 그곳이 브라질에서 가장 소득수준이 낮은 삐아우이(Piauí) 주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룰라에게 그곳은 종착지가 아니라, 배를 타고 삐아우이 주의 가장 깊숙하고 못사는 오지를 방문한다는 것이었다. 룰라는 연신 땀을 닦아 가며 한 차례 연설을 마친 다음 다시 바지선 같은 배를 타고 최종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룰라야, 나는 너를 보러 여기 왔다"

    숨 막히는 순간들이 지나간 뒤에도 나는 한동안 일을 할 수 없었다. 그 감동의 드라마를 연출한 노동자당과 룰라가 향후 4년 동안 어떤 일을 할지를 내가 본 드라마가 모두 투사해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순간들을 가슴에 품고 룰라 정부를 지켜보며 오늘까지 브라질을 연구해 왔다.

    가슴이 벅찼던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해 1월 세상의 모든 열기는 남반구의 한 지점으로 흡인되고 있었다. 1월 23일부터 일주일 동안 브라질 남쪽 뽀르뚜알레그레(Porto Alegre)에서 세계사회포럼이 개최되었다. 세계 각지에서 20여만 명이 모여들었고, 전 세계 좌파들도 축제의 장에 함께했다.

    동구권 붕괴 이후 국가사회주의의 파산은 사회주의 모델 자체에 대한 불신을 가져왔고, 좌파들에게는 억울한 누명이었지만 그것은 현실이었다. 유럽에서는 스웨덴의 우데발라와 임노동자 기금제 이후 더 이상 새로운 실험은 없었다.

    브라질 노동자당의 집권은 새로운 사회주의 모델의 실험에 대한 기대를 부풀게 했고, 전 세계 좌파들이 대거 브라질로 모인 것은 그러한 기대감 속에서 룰라 정부의 출범을 축하하고자 한 것이었다. 거리는 환희의 구호들로 가득 찼고, 나 또한 여느 참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무리들 속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룰라야, 어디 있니? 나는 너를 보러 여기 왔다!”(Lula Cadê Você? Eu vim aqui sô para te ver!)

    왜 변혁적 실험을 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룰라 정부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변혁의 실험은 없었다. 룰라가 배신자라고 규탄을 받는 가운데서도 나는 실험의 뉴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실에서 검증된 대안, 그것을 찾을 곳은 다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노동자당과 룰라 정부에 거는 기대를 포기할 수 없었다.

    어느덧 나의 물음은 ‘룰라 정부가 어떤 변혁적 실험을 실시했고, 어떤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는가?’에서 ‘왜 룰라 정부가 변혁적 실험을 하지 않았는가?’로 바뀌게 되었다. 연구 결과는 노동자당과 룰라를 위한 ‘과학적(?) 변명’의 모습을 띠기도 했다. 변혁적 실험 자체를 현실화할 수 없게 하는 제약들에 대한 연구는 결코 유쾌한 작업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유의미한 작업이었다. 나는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값진 실천적 교훈도 얻을 수 있었다.

       
      

    노동계급에 관한 한 브라질은 한국과 공통점이 많았다. 군사독재 시기 어용 노조 패권하에서 민주 노조 운동이 시작되어 대안적 조직체를 형성하면서 노동운동은 이중 구조(dual structure)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노동계급은 민주 노조 운동을 구심점으로 계급 형성을 진전시킬 수 있었다.

    경제 위기 이후 민주 정부에 의해 신자유주의 공세가 전개되면서 민주 노조 운동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고, 노동계급의 계급 형성은 정체 혹은 후퇴하는 상황을 맞았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시기를 마감하며 브라질 노동계급은 집권에 성공했지만, 한국에서는 온건 신자유주의 세력이 강경 신자유주의 세력으로 교체되었을 뿐 노동계급의 정치 세력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브라질 통해 성찰해야 하는 것들

    지금 한국의 노동계급 정치 세력화는 참담한 수준이다. 첫발을 제대로 내딛기도 전에 분당 사태를 맞았고, 아직도 패권주의와 엘리트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념적 실천보다 파워 게임에 익숙하고, 변혁적 전망보다 정치 방정식에 목숨을 거는 행태는 보수정당에 뒤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우려스러운 것은 권력을 위해서라면 동지도, 당원도, 시민도 모두 수단으로 삼는 천박한 도구주의적 행태다. 파벌 중심주의와 결합해 유능한 인재들조차 완장 부대로 만들거나 조직에서 몰아내는 폐해는 너무도 많이 보아 왔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들이 합류하면서 새로운 조직 문화를 지향하는 변화의 시도들이 눈에 띄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브라질 노동자당과 룰라 정부의 경험이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자기 성찰의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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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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