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청년과 노인부터
    2010년 01월 25일 10: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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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한국의 경우 – 기본소득제로 나아가기 위한 과도 전략이 필요하다

보편 복지로 나아가는 과도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복지정책의 도입과 유지를 지지하는 계급․계층 연합(복지동맹)을 형성하는 것이다. 기본소득제 역시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거 20세기 복지국가의 여러 제도들과 마찬가지로 제도 도입 초기에는 광범한 복지동맹의 형성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장기적이고 전반적인 관점에서는 다수의 이해당사자들이 모두 승자가 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단기적으로는 기존 체계의 관성, 이행의 불안, 각 이해당사자 집단의 동업조합적 이해(그람시) 때문에 만만치 않은 반대와 저항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기본소득제의 경우에는 특히 중산층이나 정규직 노동자와, 정규직 노동시장 바깥에 있는 광범한 고용 불안정층 사이에 이해 대립과 의견 불일치가 나타날 수 있다. 비교적 크지 않은 규모의 증세와 기존 복지제도 통폐합만으로도 기본소득제를 실현시킬 수 있다는 가장 앞선 복지국가들에서조차 이런 위험에 대한 우려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그 어려움에 대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한국은 여전히 공공 복지가 극히 취약하다. 한국의 정부 사회복지 지출은 GDP의 6.9%에 불과하다. OECD 평균인 GDP 20% 수준에 턱없이 못 미치는 것이다(2005년 OECD 통계). 그나마 한국 사회에 정착된 공적 복지제도로는 전국민의료보험제도(National Health Insurance, NHI)인 국민건강보험을 들 수 있는데, 이마저도 전체 의료비 중에서 57.5%밖에 감당하지 못한다(스웨덴은 82.0%).

한국 복지비, OECD 평균 1/3 수준

조세 부담 수준도 낮다. 한국의 과세율은 GDP의 28.7%로서, OECD 평균인 GDP의 35.9%에 미달한다(2007년 OECD 통계). GDP의 48.2%에 이르는 스웨덴의 과세율과 비교하면, 무려 20%의 차이가 난다. 이와 동시에 조세의 재분배 효과도 미약하다. 스웨덴은 과세 전 지니계수가 0.43이지만 과세 후 지니계수는 0.23이다. 그만큼 조세를 통한 부의 재분배가 상당히 작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과세 전 지니계수가 0.34이고 과세 후 지니계수가 0.31로서 거의 같다. 사실상 조세를 통한 재분배가 거의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단순히 지금 현재 사회복지의 제도적 수준이 낮다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진보 세력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문제는 이러한 낮은 수준의 복지 현실이 공적 복지에 대한 낮은 수요와 기대 수준, 동의 정도를 낳고 이것이 다시 복지 현실을 낮은 수준에 머물게 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진보신당이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2009. 12)에 따르면, 복지 재원 마련을 위한 증세에 동의한다는 의견은 39.1%인 반면 반대한다는 의견은 절반을 넘었다(51.6%). 적어도 현재 한국 사회에는 복지동맹이 거의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극히 취약한 상황이다.

따라서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기본소득제에 대한 관심과 지지를 늘려가기 위해서도 우선 그 전 단계의 복지 기반을 확충하는 데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진보신당을 비롯해서 진보 세력 내 많은 이들은 그 출발점이 사회 서비스를 확대하는 것이라고 본다.

사회서비스 확대로부터 출발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한국 사회에 사회 서비스의 수준이 일천하다는 가장 단순한 사실이다. 이것은 그만큼 이 영역에서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사회 서비스의 확대가 기본소득제의 초기 지지 기반을 형성하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서유럽 수준의 사회 서비스 기반을 확보했을 경우에 기본소득제 논의도 마치 현재 서유럽 국가들에서처럼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사회 서비스 확대가 곧 일자리 확대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복지를 확대하면서 일자리 또한 확대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사회 서비스 확대가 한국 사회에서 복지동맹을 형성하는 효과적인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존재한다(진보정치연구소, 2007). 이 점에서 한국에는 분명, 사회 서비스를 통한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 역시 한계에 봉착한 서유럽과는 달리, 추가적인 고용 창출의 여지가 아직은 풍부히 존재한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현재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감세 정책과 4대 강 개발 사업만 취소해도 사회 서비스 영역에서 거의 100만 규모의 공공부문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 진보신당의 추계에 따르면, 이들 총 예산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24조 여 원만 공공 산후 조리, 보육, 방과후 학교, 고용 상담, 간병, 노인 요양 등에 투입해도 총 84만여 개 이상의 괜찮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진보신당, 2008). 더구나 이것은 각 가계의 기존 지출을 줄여서 간접적인 사회 소득의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오건호, 2009).

   
  

이렇게 일단은 사회 서비스를 집중적으로 확대해가면서 점차 사회 소득 측면의 대안, 즉 기본소득제에 대한 관심을 높여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진보 세력이 기본소득제의 완성된 형태를 즉각 실시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할지, 아니면 단계적 도입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할지에 대해서는 더 고민이 필요하다. 단계적 도입 방안의 경우에도 전 국민에게 비교적 낮은 수준의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데서 출발할지, 아니면 특정 인구 집단부터 상당한 수준의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데서 출발할지가 쟁점이 된다.

특정 계층 수당에 관심

강남훈․곽노완(2009)은 기본소득제의 완성된 형태를 즉각 실시하자는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 김교성(2009)은 전 국민에게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기본소득제를 제공하자는 입장에 가깝다. 필자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이들과는 달리, 특정 인구 집단에게 상당한 수준의 보편적 수당을 제공하는 데서 출발하자는 입장이다.

두 개의 후보 집단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청년층이고, 다른 하나는 노령층이다. 전자의 한 예로는 Purdy(1994)가 제시한 ‘청년을 위한 뉴딜’(New Deal for Youth)을 들 수 있다. 그는 16세부터 25세까지의 청년층에 대해, 임금 노동, 자원 활동, 보육, 교육․훈련 등 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전제로, 상당한 수준의 보편 수당을 제공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다른 많은 현대 자본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에서도 젊은 세대일수록 실업과 노동 유연화의 고통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우석훈․박권일, 2007). 이들에게는 이미 과거 정규직-완전고용 시대의 관성은 역사책 속 이야기일 뿐이다.

따라서 이들을 기본소득제 실현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충분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게다가 이들 세대의 연령이 높아질수록 기본소득제에 대한 지지도 점차 확대될 것이라는 예측도 해볼 수 있다. 아예 1차 적용 대상인 청년층의 장년화와 연동해서 기본소득제의 적용 대상을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노령층을 출발점으로 삼는 방안으로는 2000년대 초에 영국에서 논의되었던 시민연금(Citizen’s Pension)을 들 수 있다(이명현, 2007). 2002년 10월에 영국의 전국연금기금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Pension Funds, NAPF)는 영국 연금제도의 2층 구조(기초연금과 소득비례형 부가연금)를 1층 구조로 통합한 하나의 공적 연금제도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비록 이 제안은 재정 부담을 우려한 영국 정부의 반대로 사문화되었지만, 상당한 관심을 모으는 데는 성공했다. ‘모든 사람이 정액의 연금을 받는 제도’에 대한 영국 시민들의 지지가 57%에 달한다는 것이 여론조사를 통해 확인되기도 했다.

한국의 연금제도도 현재 2층 구조다. 기초노령연금과 국민연금이 존재한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사각지대도 클 뿐 아니라 국민의 불신의 대상이 되어 있고, 기초노령연금은 보편 연금도 아닐뿐더러 그 급여 수준도 극히 낮다. 공적 연금제도 자체가 극히 취약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이렇기 때문에, 영국과는 달리, 공적 연금제도를 원점에서 다시 논의하면서 시민연금과 같은 방식의 일종의 노인 기본소득제가 관심과 지지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

결론적으로 필자의 제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기본소득제는 앞으로 진보 좌파가 만들어가야 할 대안 사회의 필수 구성 요소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기본소득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주도면밀한 정치 전략에 바탕을 둔 과도적 접근법이 필요하다. 그 첫 출발점은 공적인 사회 서비스의 확대다. 이를 통해 보편 복지의 적극적 지지층, 즉 복지 동맹을 형성해야 한다.

복지 동맹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기본소득제에 대한 관심과 지지를 넓혀갈 수 있다. 기본소득제의 실제 추진 과정에서는 청년 기본소득, 노인 기본소득 등 특정 인구 집단에서부터 실질적 수준의 기본소득을 도입하여 이후 보편화하는 전략을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강남훈․곽노완. 2009. 󰡔국민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김교성. 2009. 「기본소득 도입을 위한 탐색적 연구」, <사회복지정책> Vol. 2, No. 2.
오건호. 2009. 「진보의 눈으로 국가 재정 들여다보기」, 사회공공연구소 연구보고서 2009-08.
우석훈․박권일. 2007. 󰡔88만원 세대: 절망의 세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레디앙.
이명현. 2007. 「유럽에서의 기본소득(Basic Income) 구상의 전개 동향과 과제 – 근로안식년(Free Year)과 시민연금(Citizen’s Pension) 구상을 중심으로」, <사회보장연구> 제23권 제3호. pp.147-169.
진보신당. 2008. 「경제위기 대책 세부안1 – 공공부문 일자리 85만 개 창출」(2008. 12. 23)
진보정치연구소. 2007. 󰡔사회 국가 – 한국 사회 재설계도󰡕, 후마니타스.
Purdy, D. 1994. “Citizenship, Basic Income and the State”, New Left Review no.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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