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체제론, 자의적 공상의 산물"
        2009년 11월 13일 08:2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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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엊그제서야 <레디앙>에서 뜨겁게 진행되었던 ‘체제논쟁’에 관한 글들을 다 읽었다. 초반에 올라온 손호철과 조희연의 글을 읽은 지는 좀 됐는데, 후반에 올라온 이승원, 이종보, 최원의 글은 이제서야 읽었다. 뒤의 글들은 어지간히 긴 게 아니어서 화면으로 보기 힘들어 이면지에 출력해서 봐야 했다.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몇 가지 정리를 해보려 한다.

    1. ‘대안제시’가 중요하다는 입장에 대해서

    이번 논쟁 자체에서 그렇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다른 중요한 논의를 하는데 필요한 전제로 얘기해야만 할 것 같아 이 얘기부터 해야겠다. 손호철, 조희연 논쟁에 부쳐 글을 기고한 이종보씨는 진보 담론이 항상 반대에만 머무른다고 비판하면서 대안 담론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이다. 그런데 왜 난 이런 주장을 접하면서 우리 동네 주민센터 헬스장에서 매일 ’00일 안에 몸짱되기’ 같은 책을 보며 운동하는 뚱뚱한 남학생이 생각나는 걸까? 내가 볼 땐, 아니 누가 봐도 그 학생은 가만히 서서 아령이나 들고 있을 일이 아니라, 체지방 감량을 위해 러닝머신부터 해야 한다. 그래야 뭐 몸짱이 되는 말든 할 거 아닌가?

    한 마디로 ‘몸짱’이라는 대안은 있으나, 자신의 문제가 뭔지 모르는 거다. 전형적인 몸짱들의 환상적인 복근과 팔뚝 근육에 매료되어 자기 상태가 뭔지 파악이 안 되니 매일 헛짓을 해대는 거다.

    반신자유주의니 반MB니 하는 소리는 반대 담론에만 머무르는 것이니 한계적이며, 대안을 얘기해야 한다는 소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몸의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를 제대로 파악해야 그 체질에 맞는 가장 알맞는 대안도 나오는 거다.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는 서구복지국가의 모습에 매료되어 그걸 가장 이상적인 대안인 양 아무데나 들이대는 습관은 저 안타까운 남학생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이종보씨는 자신의 글에서 우리사회에서 ‘성장’을 얘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말하면서 대안이라고 ‘복지성장’을 꺼내들던데,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가장 모순점인 성장주의를 비판할 여지를 차단해 버리는 셈이다.

    다이어트 하려는 사람이 비대해진 체지방을 문제삼지 않고 무슨 운동을 한단 말인가? ‘성장’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두려는 것은 이종보씨가 사고하는 대안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무엇을 반대하고 비판할지를 제대로 알아야 대안도 나오는 거다.

    2. 08년 체제? 정권 바뀔 때마다 체제가 바뀌나?

    이미 최원씨가 잘 비판한 내용이긴 하지만, 사족을 달자면 난 08년 체제라는 말이야말로 ‘체제’론을 희화화시키는 발언이라 생각한다. 이런 식이라면 5년에 한 번 대통령 바뀔 때마다 체제도 바뀌는 거다. 조희연이 이명박 정부와 이전 정부 사이의 차이점을 드러내는 데에 써먹는 이유라는 것이 고작 통치 스타일 수준의 것들인데, 내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체제’라는 것이 이런 ‘통치 스타일’로 변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사회체제’social system를 논의한다는 것은 사회를 이루는 여러 부문들의 총체적인 상호작용의 작동방식의 결정적인 변화가 어디서 어떻게 벌어졌는지를 따지는 것이다. 이런 얘기가 조희연의 글에서는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별로 의미있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 이 얘기를 먼저 해야 전술이니 전략이니 하는 것이 나오는 건데, 조희연은 오히려 몇 발짝 건너뛰어 ‘헤게모니 전략’부터 얘기하고 있다.

    08년 체제가 의미있는 것이라면 나는 93년 체제에 대해서도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93년이 어떤 해인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 정권을 잡은 해 아닌가? 김영삼이 요즘 노무현 보고 빨갱이의 자식이니 뭐니 노망 난 소리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런 식으로 치자면 김영삼은 79년 YH노조의 신민당사 점거 농성에 대한 보복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해 부마항쟁이라는 박정희 정권의 근간을 뒤흔드는 사건을 터지게 한 장본인 아닌가?

    게다가 그는 집권 당시 하나회 해체를 통해 군부독재의 뿌리를 잘라버린 장본인이다. 왜 김영삼의 이 ‘위대하신’ 면은 보지 않고 다 늙어서 헛소리 하는 것만 가지고 트집을 잡나? 조희연은 손호철의 97년체제론을 경제주의로 비판하면서 이 시기에 일어난 형식적 민주주의의 진전이라는 성격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런 이유라면 더더욱 97년이 아니라 93년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것을 부정한다면 난 그의 주장이 ‘김대중 착시효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여하간에 조희연의 08년체제라는 규정은 상당히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만들어낸 공상의 결과물이란 생각이 든다. 그 과정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체제’에 대한 논의는 뒤로 빠져버리고 만다. 이런 문제점은 서영표에게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서영표는 논쟁의 와중에 쌩뚱맞고 황당하게도 사람들의 일상에 주목해야 한다는 소리를 한다. 다음의 글을 보자.

    2009년 한국 사람들은 자본주의적으로 소비하고, 투자하고,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시장과 경쟁의 원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결과가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문제의 고리는 ‘행복하지 않음’을 체제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개인의 능력 또는 정치인과 관료들의 부패로 생각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적 지형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바로 당신들의 생활양식이, 자유, 평등, 정의, 인권의 원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라고” 외치는 것은 정치적으로 무력하다. 21세기 대항헤게모니는 계몽주의적 전략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

    계몽주의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대항헤게모니 전략은 현실 외부에서 주어지는 이상주의적 규범에 기초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들이 처한 일상으로부터 시작해야한다는 것이다. ( "일상의 정치공간에 대한 통찰 부족" 09/09/23)

    최소한 이 체제논쟁에 참여하는, 그리고 이를 관심있게 지켜보는 누구도 사람들의 일상을 변혁해야 하고, 이는 계몽주의로는 안 된다는 점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서영표가 대답해야 할 문제는 대체 그 대항헤게모니를 형성하기 위해서 08년체제라는 규정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이다.

    서영표의 이런 발언 때문에 문제의 앞뒤가 뒤엉켜 버리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의 주장대로라면 08년 이전에는 시민사회에서 사람들의 일상에 개입하는 운동이 필요 없었다는 얘기가 돼버리기 때문이다. 실제 그가 그렇게 주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는 거다.

    그러면서 서영표는 어느새 체제논의를 미시적인 수준의 운동 논의로 전환시킨다. 미시적인 수준의 운동이 중요하다는 것과 체제논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다. 그도 스스로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음’을 체제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문제의 고리라고 했다.

    문제가 체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의 결여에서 시작됐는데 해결을 미시적으로 한다? 이것은 사실상 체제논의에 대한 방기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이번 체제논쟁이 80년대 사구체논쟁보다 한참 후퇴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번에 서강대에서 열리는 토론회에 서영표가 제출한 토론문을 보니 그의 입장을 명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사람들의 일상이라는 것을 정치체제, 경제체제와는 다른 영역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체제’로 설정하려 한다. 그러니 손호철과 서영표는 사실상 동문서답을 한 거다. 손호철의 사회체제는 이 세 가지를 포괄하는 것인데, 서영표는 부분으로서의 사회체제만을 말했으니…

    3. 08년체제 규정은 단순한 현실 묘사일 뿐

    여기서 조희연-서영표가 주장하는 08년체제의 근거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97년 체제에서 대중들이 형식적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 저하되는 데 비해 08년 체제에서는 “이명박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스타일’이라는 정세적 변화를 계기로 신자유주의적인 역사적 블록을 흔들 수 있는 정치투쟁과 이데올로기 투쟁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라 분석한다. (<레디앙> 기사 "손호철 97체제론은 경제주의 편향" 참조)

    즉 경제체제는 변함이 없는데 정치체제에서의 권위주의적 전환이 투쟁의 가능성을 넓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08년 이후 저항의 방식은 어떻게 변화하였는가? 나는 08년 이후 이데올로기적 투쟁이 활성화될 것이라는 조희연-서영표의 주장은 쇠고기 촛불집회 이후 드러난 대중 이데올로기 표출 방식에 대한 오해라고 생각한다.

    즉 그것은 대중 이데올로기의 표출 방식인 것이지, 투쟁이 아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투쟁이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이해하는 선에서 투쟁은 정치체제든 경제체제든 그것을 전복할 것을 요구하는 대중의 흐름을 지칭한다. 그러나 08년을 기점으로 해서 그런 ‘투쟁’은 나타나지 않았다.

    조희연-서영표는 대중 저항 이데올로기를 정치레짐에 의해 결정적으로 영향받는 것으로 표현하면서, 노무현의 탈권위주의와 이명박의 신보수주의를 특권화시킨다. 그러나 이는 노무현과 이명박 시대를 관통하여 나타나는 대중의 ‘정치’에 대한 태도의 일관성을 놓치는 것이다.

    노무현 시대에 가장 유명한 정치 유행어는 단연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였다. 그는 단연 최고의 국민 코미디의 소재였다. 노무현에 대한 실망은 박정희 신드롬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이명박 시대에는 어떤가? 촛불집회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듯이 이 때도 최고의 유행어는 "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다"였다. 국민들에게 대통령은 한낱 설치류 동물과 동급 취급을 받았다. 이런 대중적 정서는 ‘허경영’이라는 새로운 개그 스타를 탄생시켰다.

    이 두 시기 대중 이데올로기 상의 차이가 있다면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이런 ‘정치의 코미디화’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에 대한 조롱이지 투쟁이 아니다. 물론 대중 저항이 이전보다 진일보한 측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최소한 어떤 체제상의 변화라고 할 정도가 되려면 전국적인 정치-경제적 쟁점에 이 대중 저항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영향력을 발휘했는지를 평가해야 한다. 용산과 평택이 가장 좋은 리트머스 시험지일 것이다. 그러나 어떠했는가?

    그렇기 때문에 괜스레 08년체제를 강조하는 것은 이 때를 기점으로 굉장한 양적 증가를 보였던 대중적 불만 표출의 현상을 기술한 것이지 그 심층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체제규정으로 볼 수는 없다.

    서영표 자신은 "실재에 대한 분석은 표층에서 드러나는 경험적 사실로부터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자신도 추상 수준의 이론적 고찰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그의 글 어디에서도 그런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사실 내가 가장 의아스러웠던 것은 바로 이들이 주장하는 ‘국민적 정치전선’이라는 개념이다. 아래 인용글을 통해서 그 의미에 대해 대강 유추해 볼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손호철) 선생님께서 87년 체제론을 비판하고 97년 체제론을 제시하는 이유는 소위 맹목적인 반MB론자들의 이론적 토대를 잘라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조희연 선생님이 소위 87년 체제의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는 이유는 ‘운동권’이 아닌, 그리고 ‘이론가’가 아닌 보통 사람들의 의식 안에서는, 그들의 주체성 안에서는 87년의 ‘민주주의와 인권’, 97년의 ‘신자유주의적 주체성’, 08년의 ‘권위주의주의적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감’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진보진영이 대화해야 할 상대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채 굳어진 운동진영의 논리가 아니라, 지배적 논리에 순응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동시에 저항의 계기가 주어지면 (비록 단속적이지만) 폭발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대중이어야 합니다.

    촛불시위에 참여하고 이명박을 욕하지만 부동산 가격과 주식시장에 민감한 사람들, 이념으로서의 민주주의와 인권에는 민감하지만 용산참사에 대해서는 둔감한 사람들의 사람들을 상대로 한 담론을 생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강대 토론회 서영표 토론문 中)

    그러나 나는 이런 생각이 더 전형적인 운동진영의 논리라고 생각한다. 가끔 보면 어떤 운동권 지식인이나 활동가들은 반대자를 비판하면서 ‘대중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이유를 대곤 한다. 마치 자신이 대중의 대변인이라도 되는 것인양 말이다.

    서영표의 위 발언도 그러한데, 그는 자기 이론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자신이 현상적으로 ‘본’ 대중들의 행동을 겹쳐서 말한 것뿐이다. (손호철이 비판하는 사회학적 서술주의가 바로 이런 것이겠지?) 그가 이론가라면 현상을 말할 것이 아니라, 그 심층에 있는 의미를 캐내야 한다.

    그럼 이와 관련해서 내가 본 ‘현상’에 대해 말해볼까? 나는 최소한 대중들에게 87년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생각은 사라졌다고 본다. 지난 2007년 87항쟁 20주년을 맞아 모 언론사가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60% 이상이 87항쟁을 모른다고 했다. 87항쟁 자체를 아는 사람이 40%도 안 되는데 무슨 87년의 민주주의와 인권인가?

    물론 이들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서는 비율이 다르겠지만, 사회의 주축이 되는 세대가 이동한다는 사실만 생각해 봐도 국민 전체에서 ‘모른다’의 비율은 더 많아질 것이다. 물론 87년이 갖는 상징성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 상징성이라는 것이 영구불변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볼 때, 87년이라는 쇠락한 상징성에 기대어 08년 이명박에 대한 대중적 반감을 통해 조희연-서영표가 부각하고자 하는 ‘국민적 정치전선’이라는 것의 성격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이미 대중들에게 민주-반민주 전선이라는 개념은 없다. 그런 것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재야인사’들의 머릿속에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연한 헤게모니 전략을 통해 구성되는 ‘국민적 정치전선’이라는 것이 화폐적 관계에 종속된 삶을 살아가는 대중들의 일상에서부터 재구성하자는 말이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지만, 87년에 대한 대중들의 상징성으로부터 추출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너무나 공허해서 논의할 가치도 없는 것이 된다.

    4. 急 결론

    간단한 메모 정도만으로 글을 마치려고 했는데, 처음 생각에 비해 글이 너무 길어졌다. 게다가 논쟁에 뛰어든 그 긴 글들을 하나하나 읽기에는 시간도 부족해 오독한 것도 적잖이 있을 것이다.

    어쩌다보니 글의 핵심 내용이 조희연-서영표 비판이 되어버렸는데, 그렇다고 손호철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사실 그가 말하는 97~08복합체제도 불필요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08년이 강조되어야 할 이유를 난 도대체 납득을 할 수가 없다. 선생님들께서 너무 시기구분에 강박당하신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오히려 예전 한미FTA투쟁 당시 심광현 교수가 말한 FTA체제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FTA체제가 초래할 사회문화적 파국", <한미FTA를 계기로 본 한국사회 성격변화>, FTA교수학술공대위 토론문, 07.10.12)

    90년대 이후 변화 양상 전반을 포괄하기 위해 IMF-FTA체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현재 FTA가 한미 양국 모두에서 국회 비준이 안 된 상황이지만, 미국 이외의 나라들과도 수많은 FTA가 이미 체결되었고 체결이 추진되고 있으며, 한미FTA를 전후해 Pre/Post – FTA적 조치들이 착수되고 있다는 점에서 FTA체제라는 규정은 전혀 흠이 없다.

    게다가 조희연-서영표 그리고 손호철의 논의가 오직 국내 정치경제적 상황에만 천착해 전개되고 있는데 반해 FTA체제는 세계체계적 전환의 문제까지 함께 고려하는 장점이 있다. 한편 FTA가 자유’무역’협정이다 보니까 이로서 체제를 규정하면 경제주의라는 혐의를 뒤집어 쓸 우려도 있지만, 모두가 잘 알다시피 FTA는 그 자체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사건이다. FTA를 경제문제로만 보는 것이야말로 경제주의일 것이다.

    어쨌든 이번 논의가 현장 토론회까지 여는 걸 보면 작심하고 제대로 된 논쟁을 벌이고자 하는 것 같은데, 지금의 논의보다 더 풍성한 이야기들의 나왔으면 좋겠다. 사실 조희연, 손호철 선생님은…. 너무 옛날 사람이잖아… ㅠ.ㅠ 좀 ‘신인’들이 적극 가담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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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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