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적공개는 서민차별 정책이다
        2009년 10월 13일 08: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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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전국 고교별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 순위가 언론에 공개된 것이다. 학교별 순위가 나온 것은 수능 도입 이래 처음이라고 한다. 수능 성적 원자료가 공개되면 당연히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경고했었지만, 교과부는 연구목적에 한해 제한적으로만 공개하겠다는 세월 좋은 방침을 밝혀왔었다.

    고등학교를 성적순으로 줄세웠을 때

    하지만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성적경쟁에 관한 한 정신병자들의 집합소라고 해도 좋을 나라다. 이런 나라에서 어떤 명목으로라도 일단 성적 자료가 열리면 일반인들에게도 퍼질 거라는 건 안 봐도 DVD인 상황이었다. 결국 터질 것이 터지고 말았다.

    이번 성적공개 사태에 대해 이주호 교과부 차관은 각 고교의 성적이 정확한지를 확인해보라며, 정확하지 않다면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정보의 정확성을 따지고 있는 것이다. 마치 학력위조 사태가 터졌을 때 학력정보의 정확성을 제고하는 것을 대책으로 내놨던 이전 정부 시절의 헛발질을 보는 듯하다.

    학력위조 사태에서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학력을 위조해야만 할 만큼 심각한 우리 사회의 학력·학벌 차별의 실태였다. 이번 성적공개 사태에서 문제 삼아야 할 것은 마찬가지로 정확성 따위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사회의 차별을 더 심화시킬 것이라는 데 있다.

    생각해보라. 성적공개로 각 고등학교의 서열이 분명해졌을 때 그것을 누가 가장 반기게 될까? 고교등급제를 원하는 명문대학들과, 1등급 고교임을 인증 받으려는 귀족 고등학교, 그리고 그 학교에 자식들을 보낼 수 있는 부자들이다.

       
      ▲교실 풍경. 

    없는 집 자식들에겐 원천적인 차별

    공개된 성적에 의해 고교서열이 분명해지면 대학들은 내신을 무시하고 고교등급제를 더욱 강력히 주장하게 될 것이다. 상위 등급 학교는 당연히 특목고, 자사고, 비평준화 지역 명문고, 혹은 대도시 부유층 거주지의 고등학교들일 것이다.

    이들이 혜택 받을 때, 그 외 지방 학교나 서민들이 사는 지역의 학생들은 ‘후진 고교 출신’이라는 낙인이 찍혀 대입에서 불이익을 받게 된다. 학생 개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원천적인 차별이다.

    이렇게 하위 학교들이 차별을 받는다면 상위 학교들의 가치는 더욱 상승할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모든 자식 가진 부모는 자기 자식을 상위 학교에 보내 자식이 차별받는 설움을 피하려고 할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자기 자식을 상위 학교에 보내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뻔하다. 귀결은 고입 사교육비 팽창이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부자들이 상위 고등학교를 독식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고교선택제 등에 의해 고입경쟁에 기름이 부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서열이 분명해지고, 상위 학교의 가치가 커질수록, 그리고 선택의 자율성이 커질수록, 경쟁은 강화되고 승패는 학생과 상관없이 집안 배경이 좌우하게 된다. 높은 등급의 학교는 좋은 배경의 아이들을 독식해 더욱 절대적인 명문학교가 되어 마침내 귀족학교로 진화할 것이다.

    고교등급제로 그 귀족학교의 아이들이 명문대학을 독식하게 되면 강북 서민, 지방민, 농민, 영세자영업자, 일반 노동자의 자식들에겐 기회가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평생 동안 차별을 받게 되면 몇몇 아이들은 그 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어코 학력위조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또 다시 학력정보의 정확성을 높이자며 TV토론을 해야 하나?

    성적공개 주장은 헛소리일 뿐

    성적공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경쟁 촉진과 지원의 효율성, 수요자 선택권 등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먼저 경쟁 촉진은 학교 간의 성적격차가 분명히 알려져야 학교들이 경쟁할 것이란 얘기다. 미친 거 아닌가? 성적격차를 고시해서 지금보다 더 고등학교들을 성적경쟁으로 내몰겠다고?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말이 나오나?

    지원의 효율성이란 서열을 분명히 알아야 부진한 학교에 지원을 몰아줄 수 있다는 얘기다. 이건 일제고사 등을 통해 성적부진아를 분명히 알아야 그 학생들을 더 지원해줄 수 있다는 얘기와도 통한다. 헛소리다. 한국적 현실에서 성적부진아는 지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당하고, 능멸당하고, 배제당한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만약 정말로 부진한 학교로 자원이 몰릴 거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부유층의 강북, 지방 전입 바람이 불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자사고, 특목고 열풍에 강남 전학 바람일 뿐이다. 성적 부진 학교에 대한 지원? 꿈나라의 일일뿐.

    수요자 선택권이란 교육 수요자들이 각 학교에 대한 정보를 투명하게 알아야 학교 선택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것도 역시 미친 소리다. 한국의 교육 수요자들은 한때 어느 중학교가 명문 중학교인지 투명하게 알았었다.

    그때 어떤 일이 있었나? 초등학생들이 약을 먹어가면서 입시경쟁을 해야 했다. 중학교 평준화 이후엔 어느 고등학교가 명문고인지 투명하게 알았기 때문에 중학생들이 같은 처지에 처했다. 그래서 국가는 고등학교 서열을 지워버렸다. 수요자 선택권 운운하는 말은 박통 이전 시절로 되돌아가자는 망상에 불과하다.

    너무 투명해서 문제다

    학교서열이 너무나 투명하게 공개된 교육부문이 이미 있다. 바로 대학부문이다. 1등 대학 서울대, 2등 대학 연고대. 대한민국 국민 중에 이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투명하게 공개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졌나?

    살인적인 입시 광풍이다. 그것 외에 어떤 긍정적인 교육적 효과도 없었다. 고교 성적공개는 이미 대학 부문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태를 고교 부문으로 내리자는 것에 불과하다. 이걸 이해하기 위해 그렇게 대단한 지능이 필요한가?

    아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사교육비, 입시광풍, 차별, 교육파탄. 너무나 뻔한 일이다. 파탄으로의 급행열차인 것이다. 그런데도 경쟁이니, 지원이니, 선택이니 하는 허울 좋은 말들로 성적공개가 추진되고 있다. 정말 모르고 하는 걸까, 알면서도 하는 걸까. 의심해야 할 것이 사회 지도층의 지능일까, 양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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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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