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
    2009년 08월 24일 08:5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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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8월 22일) 보쿰(Bochum)대학에서 열린 ’18세기 조선 인식론적 변화’를 다루는 학회의 장에서 재미있는 대화 하나 나눈 일이 있었습니다. 쉬는 시간에 한국 출신의 방청객 한 분과 연암 선생 관련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화제는 점차 고미숙 선생의 ‘연암 재발견’으로 옮겨졌습니다.

연암의 재창조

저는 고미숙 선배의 ‘연암론’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봐서는 이것도 재발견이라기보다는 ‘재창조’에 가깝습니다.(실제적 연암은 출세주의적, 보신주의적 경향이 강한 노론 귀족이었지 그 무슨 ‘소탈한 도사’ 격의 인물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 필자

하지만 결국 대중적 인기가 높은 고미숙 선배님의 연암 관련 저서는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들고 유머 감각이 뛰어난, 자신을 상대화시킬 줄 아는 국제인"을 한국인의 새로운 ‘이상형’으로 제시함으로써 한국적 아이덴티티를 상당히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는 데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이야기지요.

즉, 고미숙 선생님이 상상하시는 연암이 존재했는가 아니었는가를 떠나서, 이와 같은 "유쾌한 코스모폴리탄적 상상"이 대중화돼 상당수 젊은이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는 것쯤은 좋은 일이다, 그러한 논지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상대방은 갑자기 "개인적 질문"이라 하면서 "그러면 한국인의 아이덴티티는 그렇다고 치고, 당신의 개인적 아이덴티티는 도대체 뭐냐"라고 물으시더군요. 저는 좀 당황을 했어요. 제 본인도 별로 생각을 잘 안하는 테마라서요.

질문에 크게 당황해야 걸로 결국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게 선문답의 원칙이라고들 하지요? 저도 당황을 한 뒤에 결국 갑자기 ‘그림’이 떠올라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를 당황케 했던 질문

"한국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제가 ‘벤치마킹’하는 것은 과거 서구의 좌파적인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정체성입니다. 마르크스에게 ‘너는 독일인이냐 영국인이냐’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듯이, 아니면 게오르그 루가치가 유대인도 헝가리인도 독일인도 러시아인도 아니면서도 그 네 가지를 다 겸비했듯이, 저는 어떤 해방 지향적 이념으로 사는 사람이 각종의 언어-문화적 정체성들을 비교적으로 자유롭게 개인적 취향과 상황대로 ‘재조합’시켜 개인화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19세기 이후의 세계적인 근대성의 공간에서는 ‘해방 지향적 이념’이란 언어-문화적 장벽을 어느 정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으로 사료합니다" 

이제는 상대방이 좀 당황했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제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점차 취득해나간다"는 쪽의 답변을 내심 기다리셨던 모양인데, 제가 고의적으로 그러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한국인 노릇’을 하는 것도 개개인 나름이고 각자가 다르게 하는데, 제가 생각하는 한국인 노릇과 질문하신 분이 생각하시는 한국인 노릇이 자못 다를 수 있기에 의도적으로 오해를 피하려 한 것입니다.

대답을 드리자 학회가 속회되고 이 흥미로운 대화가 중단됐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제 답에는 그래도 하자 하나가 있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야 루가치나 마르쿠제와 같은 ‘혁명적인 국제주의’는 가장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이제 구라파의 상황은 좀 달라졌단 것입니다.

혁명적 국제주의자

루가치만 해도 당으로 조직된 노동계급이 집권을 하여 해방을 실천할 수 있는 것처럼 믿었던 것이고, 그건 그 때만큼 현실적으로 보였지요. 마르쿠제는 ‘계급 – 당 – 집권 – 사회주의 건설’ 등식을 더 이상 믿지 않았지만(또는 믿을 수 있는 상황에 넣여 있지 않았지만) "탈권위주의적, 다차원적, 창조적 인간의 출현"을 현실적으로 기다리고, 또 1960년대 후반의 ‘젊은이 혁명’의 분위기 속에서 그게 현실적으로 보였습니다.

저희 세대 같으면 사실 이와 같은 희망은 이제 거의 없습니다. 물론 ‘계급과 당’에 대한 희망은 어느 정도 남아 있지만, 저 같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정당들은 – 노르웨이의 사회주의좌파당이나 독일의 좌파당부터 국내 진보신당까지 – 잘해봐야 (유럽의 경우) ‘공공성/복지’의 ‘인간화된 자본주의’ 질서를 사수하거나. (한국의 경우) 새로이 건설하려는 목표를 현실적으로 정하는 것이지요.

오늘날의 정세에서는 더 이상의 이야기는 곧잘 ‘섹트화’, 대중과의 완전한 괴리를 의미하기에 말입니다. 그리고 권위주의부터의 해방은 어느 정도 돼도 상명하복의 질서는 소비쾌락주의 질서로 교체됐을 뿐, 인간은 해방에 가까워진 일은 없었습니다.

돈을 써야 쾌감을 느끼고 돈과 돈이 가져다주는 쾌감을 철저히 계산해서 인생을 설계하는 오늘날의 ‘문명인’은 사실 자기 상품화를 하지 않고서는 이미 살 수 없는, 물화된 인간입니다. 자본주의가 이미 다 내면화된 세상인지라 ‘해방’의 수사는 공허하게 들릴 때가 많지요.

자본주의가 그 말기적 위기에 밀리면서 극단적인 사회 파편화, 원자화부터 끊임없는 전쟁까지 온갖 병리적 현상들이 다발하는 시대에 ‘어떻게 해서 완전한 야만화라도 방지할 수 있을까’라는 게 요즘의 시대적 과제인 것 같습니다. 너무 비관적으로 보일는지 몰라도 그게 적어도 점차 우경화돼가는 유럽의 정치판 안에서 현실로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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