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파, 무엇을 할 것인가?
        2009년 08월 11일 10:2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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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은 팻 데바인(Pat Devine)과 데이빗 퍼디(David Purdy)가 영국의 좌파 월간지 <Red Pepper(붉은 고추)>에 지난 6월 발표한 글의 후반부를 번역한 것이다. 데바인은 ‘참여 계획 경제’를 주창한 것으로 유명한 좌파 경제학자이고, 퍼디는 오랫동안 DEMOS, Compass 등의 씽크탱크에서 활동하면서 영국 좌파의 혁신을 주창해온 논객이다.

    본래 이 글은 올해 초에 이 두 사람이 편집해 낸 책 <절망에 빠진 영국: 어떻게 보다 낫게 만들 것인가>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이 책은 신노동당이 만들어놓은 영국 사회 현실을 비판하면서, 대안 좌파 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광범한 선거 연합의 결성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비록 먼 나라 영국의 현실을 전제한 내용들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좌파 정당의 지향과 과제에 대해서도 많은 시사를 던져준다고 판단해 부분 번역, 소개한다. – 역자 주

       
      ▲ <절망에 빠진 영국> 표지

    오늘날 영국 좌파는 과거 자신의 모습의 그림자다. 과거 영국 좌파의 모습이란 분열되고 무정형적인 이견들의 집합체였다. 그래서 주류 정치에 조직적으로 참여하지도 못하고 여론의 쟁점에 별다른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좌파가 고려해야 할 네 가지 시간지평

    어떻게 해야 이러한 영국 좌파가 유의미한 정치 세력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자면, 어떠한 시간 지평을 다루는지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정책과 프로젝트를 면밀히 구분해야 한다.

    사회 경제 체제의 문제가 다름 아닌 우리 혹성의 미래와 충돌하는 우리 현실에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시간 지평을 구분하는 게 적절하다.

    첫째, 단기. 간단히 말하면, 12달 앞까지의 일들.

    둘째, 중기. 4년 앞까지의 일들. ‘정상적’ 의회 임기 동안.

    셋째, 장기. 몇 차례의 의회 임기, 말하자면 한 세대 혹은 25~30년간.

    그리고 마지막으로, 먼 미래. 오늘날 서구에서 태어난 아동의 기대 수명에 따른 생애주기를 단위로 하는 시간 지평. 더 나아가서는, 생물권에 대한 인간 활동의 영향이나 생태계에 대해 사고하기에 적합한 수 세기나 천 년 단위를 단위로 하는 시간 지평.

    좌파 재건 프로젝트는 이 모든 시간 지평에 걸쳐 있다. 틀에 박힌 정치는 단기와 중기만을 다룬다. 정치인 집단과 언론을 지배하는 것은 이러한 단기와 중기의 시간지평이며, 이들의 관심은 차기 선거에만 쏠려 있다.

    만약 이게 당신의 시간지평이라면, 당신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의 지속 발전과 정당 정치의 급박한 현안과 관련된 쟁점들을 다루는 데만 관심을 집중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현존 사회 질서를 관리하는 것이 우선적인 관심사인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 당연한 시간 지평이다.

    물론 현 체제를 관리하는 것만도 충분히 어려운 일이며, 그것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 이후로 좌파는 사회를 바꾸길 열망해왔고, 이것은 훨씬 더 어려운 과제다. 그리고 사회주의자(한때 좌파의 중핵을 이뤘지만 지금 서방에서는 거의 정치적인 멸종 위기종인)에게 이것은 탈자본주의 문명을 지향하는 것을 뜻했다.

    중․ 단기에 대응하되 장기와 먼 미래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우리 중 일부는 이것이 여전히 우리의 목표여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이것은 조만간 성취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탈자본주의 이상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단기 ․ 중기 지평을 넘어 전망하고 자본주의 이후의 삶을 사고해야 하는 이유는,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기존 질서의 폭풍과 파도에 휩쓸려 침몰해버리기만 할 것이라는 데 있다. 우리 스스로 선택한 목표를 향해 항해하지 못하고 말이다. 달리 말하면, 좌파에게는 중 ․ 단기 지평을 위한 정책들뿐만 아니라 장기와 먼 미래를 향한 프로젝트 또한 필요하다.

    물론 정책들과 프로젝트는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문제들에 대한 해법으로 장기 목표만 떠들어대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 현 상황에 개입할 여지가 없을 것이고, 따라서 다른 정치 세력들이 상황을 주도하면서 현실에서 벌어질 일들을 결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장기 과제를 무시하고 오늘날의 문제들에 대해 순전히 실용적인 방향에서만 대응(요즘 유행어로 말하면, ‘되는 일 하기’)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럴 경우 현존 사회 제도, 문화 패턴 그리고 권력 관계에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기와 먼 미래 사이의 구별은 자본주의의 변형과 그 지양을 구별하게 해준다. 미국의 전 지구적 지배권이 종말을 향해 다가가고 신자유주의의 제단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비록 파괴된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이때에 자본주의의 변형이란,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를 새로운 조절된 ‘사회적 시장’ 정책 체제로 대체하려는 공동의 노력을 뜻한다. 반면 자본주의의 지양은, 문자 그대로, 탈자본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뜻한다.

    자본주의를 종식시킨다는 과제를 준비하는 것보다는 정책 체제의 변화를 지지하는 쪽에 현재 더 광범한 세력들을 동원할 수 있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전체 좌파는 단지 중 ․ 단기를 넘어서는 전망을 갖추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에 대한 진지한 반대 세력은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의 동맹군들에게, 만약 괴물을 죽이지 않고 가둬놓기만 한다면 괴물의 힘이 점점 더 세져서 결국에는 쇠창살을 부수게 될 것이고 그래서 위기, 조절 그리고 탈조절의 순환이 반복되기만 할 뿐이라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선거 기계도, 레닌주의적 전위도 아닌 당, ‘현대의 군주’

    남는 것은 흔히 주체의 문제로 알려져 있는 것을 고려하는 일이다. 여기에는 실제로 세 개의 물음이 존재한다.

    신자유주의를 폐위시키거나 자본주의를 지양하는 데 이해관계를 지닌 사회 세력들은 누구인가? 이러한 세력들을 안정적인 역사적 블록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조직이 필요한가? 그리고 그람시의 표현에 따르면 ‘현대의 군주’라고 할 이런 조직들이 출현할 출발점들은 무엇인가?

    진보적인 역사적 블록의 잠재적 구성 요소들을 확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노동조합, 빈민과 철거민, 환경 그룹과 운동가들, 세속적인 입장에서든 종교적인 입장에서든 소비주의를 비판하면서 보다 의미 있는 사회 관계와 더 나은 삶의 질을 추구하는 사람들, 성별이나 인종 혹은 성적 정체성에 따른 사회적 차별에 도전하여 인권을 지키려는 운동들 그리고 보다 공정하면서 덜 분열된 전 지구적 질서를 추구하는 운동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사회 세력들은 항상 저항의 기반을 제공하면서 다른 세상을 추구해왔다. 1649년 영국 청교도 혁명 당시의 제러드 윈스턴리와 디거스(Diggers, 역주 – 청교도 혁명 때 등장한, 토지 공유를 주장한 기독교 공산주의자들. 윈스턴리는 이들의 지도자였다)로부터 1970년대의 루카스 항공기사(社) 현장위원들(역주 – 1970년대에 루카스 항공기사가 경영난에 처하자 이 회사 노조 현장위원들은 정리 해고 대신 대안 상품 생산을 추진해서 인원 정리 중심의 구조조정이 아닌 대안적 구조조정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현존 경제 ․ 사회 조직 형태에 대한 급진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대안들을 제공하곤 했다. 비록 일시적이고 지역적인 토대에 국한되었을지라도 말이다.

       
      ▲ 디거스를 표현한 당시의 그림

    문제는 어떻게 해야 이들 서로 다른 집단들이 자신들의 특수한 분파적 입장을 넘어 성장하도록 설득할 수 있는가 이다. 어떻게 해야 이들을, 우선은 신자유주의를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탈자본주의 문명을 건설하는 것을 지향하는 공동의 전국적 (그리고 국제적) 투쟁으로 결집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 지적 도덕적 지도력이 필요하다. 이 지도력은, 민중 운동에 직접 뿌리를 두면서 선거 경합과 승리가 아니라 사회 전체를 포괄하는 헤게모니 프로젝트를 다지는 데, 광범한 동맹의 중핵 역할을 할 프로그램(강령)을 발전시키는 데 우선적인 목표를 두는 사람들의 헌신적 조직에서 배출될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선거 기계나 레닌주의적 전위가 아닌 그런 정당 말이다.

    이런 정당은 지적 문화적 과제에 진지하게 임해야 할 것이다. 또한 당 내 절차가 철저히 민주적이어야 하며 다른 조직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분명히 비종파적이어야 할 것이다. 높은 수준의 성실성과 일관성을 견지하면서, 한편으로는 지속적인 반대 세력으로 존재하면서도 반대를 위한 반대로 전락하지 않는 길을 찾아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론의 신뢰를 얻으면서 공동의 입장과 정책들에 대한 합의에 도달해야 할 것이다.

    현재 존재하는 정당들 중에는 이러한 요건에 들어맞는 당을 찾아볼 수 없다. 최선책은 궁극적으로 ‘현대의 군주’를 출현시킬 일련의 과정에 착수하는 것이다.

    선거 개혁과 부자 증세, 녹색 뉴딜을 중심으로 선거연합을 구성하자

    우리 앞에 놓인 한 가지 길은 노동당 좌파의 남은 세력, 과거 공산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 녹색당원, 스코틀랜드와 웨일즈 민족주의자(역주 – 스코틀랜드와 웨일즈 민족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는 중도좌파적인 입장을 보인다), 자유민주당 내 불만 세력 그리고 무당파 활동가들로 이뤄진 느슨한 선거 연합을 만드는 것이다. 이 연합의 중심 축은 신자유주의적 주류 정치에 대한 반대이고, 그 중심 실천 과제는 선거 개혁과 녹색 뉴딜의 캠페인을 벌이는 일일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선거 연합이 총선에서 상당한 성과를 내길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녹색당이 거둔 일정한 성과에서도 드러나듯이, 지방선거는 좀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해준다. 게다가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에는 진보 연합의 여지가 존재하며, 이것은 잉글랜드 정치의 재편을 촉진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이것이 연방 전체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든 말이다.

    게다가 총선에 뛰어들어 경합을 벌이는 것이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는 곳에서도 선거 연합을 구성하기 전에 우선 그 잠재 구성원들 사이에서 토론을 시작할 수 있다. 단지 목표와 전략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야 좌파가 기후 변화 대책을 경제 회복 프로그램의 중심에 놓는 강령을 기반으로 선거에 개입할 수 있을지가 토론 주제가 될 것이다.

    불황기에는 민간 지출 감소를 대신해서 공공 지출과 차입[적자 재정]을 늘려야 한다. 기후 변화와 여타 생태적 도전에 직면한 상황에서 이러한 공공 지출 증가분은 생태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프로그램에 집중 투입돼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 머물지 않고, 현 위기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전혀 다른 사회, 사회적으로 정의롭고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사회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될 토대 또한 구축해야 한다.

    우리는 GDP 성장의 회복을 추구하거나 현재 대부분의 논평가들이 예견하는 것처럼 과거의 관행을 그대로 반복할 게 아니라 보다 완만한 실질 성장률을 지향해야 하며 장기적으로는 안정적인 정태적 경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삶의 질에, 우리 동료 시민들의 웰빙에, 또한 세계의 나머지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는, 보다 평등한 사회일수록 보다 행복하고 건강한 사회라는 증거가 풍부히 존재한다.

    최근 폴리 토인비(역주 – 영국의 중도좌파 일간지 <가디언>의 저명한 여성 칼럼니스트)가 지적한 것처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보건, 교육 그리고 사회 서비스 수준은 이 나라들의 공공 지출 및 과세 수준에 의존한다. 그리고 공공 채무 수준이 실제로 문제적 상황에 이른 경우에라도 이것은 지출 삭감이 아니라(물론 트라이던트 핵 미사일, 항공모함 그리고 최근의 대형 교도소 신축 계획 같은 위험하고 쓸데없는 항목들은 삭감 대상이지만) 적절한 누진 과세 제도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사상과 비전이 모자란 것이 아니다. 일단 이들 사상과 비전이 추진되기만 한다면 잘 작동할 것이라는 증거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차라리 정치적인 것이다. 유일한 이유는 현재 녹색 뉴딜의 주창자들이 소수여서 주류 정치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대중적 논쟁의 용어들을 바꾸고 정치적 세력 균형을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 한다. 분명 어려운 과업이지만, 이것 말고 다른 어떤 길이 있겠는가?

    구좌파에게는 새로운 전국적 헤게모니 프로젝트가 없고, 신노동당의 프로젝트는 전혀 좌파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노동당 바깥의 좌파는 광야에서 헤매고 있다.

    지금은 우리의 과거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미래를 탈환해야 할 때다.

    * <주간 진보신당>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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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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