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에서 너무 일찍 이탈했다”
    2009년 08월 10일 11:1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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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유고 ‘노동자 자치 사회주의’에 대한 회고
Ⅱ. 사회주의 본질론
Ⅲ. 사회주의 발전단계론
Ⅳ. 사회주의의 내적 동력문제
Ⅴ. 사회주의 시장경제론
Ⅵ.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비교 

                                                 * * *

Ⅰ. 유고 ‘노동자 자치 사회주의’에 대한 회고
1. 들어가는 말
2. 유고 사회주의 자치이론의 발단과 전개과정
1)유고 사회주의 자치이론의 발단
2)원전학습열풍과 사회주의 본질에 대한 재인식
3)노동자 자치의 사회자치로의 발전
4)자치정치제도 개혁
3. 유고의 사회주의 자치이론
1)자치경제이론
가. 사회소유제이론
나. 자치와 연합노동이론
다. 사회주의 시장경제이론
라. 확대재생산이론
2)자치 정치이론
가. 국가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론
나. 당과 사회정치조직이론
다. 자치 민주정치이론
4. 연방해체 과정중의 유고
1)80년대 전반기의 조정과 개혁
2)최후의 노력과 반성
5. 사회주의 자치제도의 성과와 한계
1)자치제도의 성과
2)자치제도의 한계

5. 사회주의 자치제도의 성과와 한계

1) 자치제도의 성과

지난 세기 40년대 말에 시작된 유고 사회주의 자치제도는 맑스주의 발전사에서 보든 혹은 20세기 사회주의운동사에서 보든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자치제도의 창시자인 티토와 카더얼 등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들은 소련모델과는 다른 사회주의 현대화의 길을 개척하고, 인류의 이상적인 탈 중앙집권식의 사회주의 정치경제제도를 건설할 것을 시도하면서, 여러 가지 곤란과 역경 속에서도 전진을 계속하여 70년대 중반에는 마침내 사회주의 자치제도가 초보적으로 완성을 보게 되었다.

정치면에서 볼 때, 유고에 건립된 사회주의 자치제도는 노동자계급이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더욱 잘 발휘하도록 하는 실험을 진행하였다. "대표단제"를 기초로 하는 세 등급 의회제(구역의회—공화국‧자치성의회—연방의회)를 실시하여 그중 매년 약 100만 명을 각급 "대표단"의 성원으로 선발, 국가와 사회관리의 실천 활동에 직접 참여케 하였는데, 이는 선거연령에 도달한 전체 공민의 1/14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유고 각 민족은 또한 공산당의 지도와 사회주의 단결평등 이념의 기치 아래, 일찍이 ‘발칸의 화약고’라고 불리던 역사상 민족모순이 가장 첨예했던 이 지역에 처음으로 40여 년에 이르는 평화로운 발전을 이룩하였다.

경제면에서 보면, 유고의 연합노동을 기초로 하는 사회주의 자치경제제도는, 전통적인 계획경제모델의 속박을 부수어 국가의 직업적 관리원에 의한 독점과 사회재산 통제를 방지하고, 연합한 노동자들이 공유재산과 사회자본을 장악하고 통제하면서, 사회주의시장경제를 통한 경제발전의 길을 찾는 등의 대담한 사회적 실험을 감행하였다.

통계에 따르면, 1951년부터 1980년까지 유고 GDP는 연평균 6.2% 성장하였는데, 그중에서 공업연평균 성장률은 8.6%, 농업은 3.4%, 일인당 GDP는 1950년 세계평균수준의 64%에서 1980년에는 140%로 상승하였고, 개인당 국민소득도 1947년의 200달러에 못 미치던 것이 1980년에는 2362달러에 달하게 되었다. 50년대부터 70년대 말까지의 약 30년의 기간 중에 유고는 일개 낙후된 농업국가로부터 중등수준의 공업국으로 발전하였다.

국제사업 면에 있어서는, 티토가 주창했던 제3세계운동이 활발하게 발전하여, 유고와 같이 다수의 약소민족으로 구성된 미발달된 사회주의국가로 하여금 성공적으로 동서냉전체계의 곤경을 벗어나게 하였다.

이는 유고로 하여금 주변국가 및 세계 각국과의 국제적 왕래와 경제교류를 촉진시켜 이를 통해 자국의 경제발전을 유리하게 촉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또한 역사상 처음으로 유고로 하여금 세계약소국가를 대표하여 국제정치무대에서 세계평화와 발전에 큰 공헌을 할 수 있게 하였다.

국제공산주의운동 가운데서도, 유고의 자주 독립적인 사회주의 건설과 본국상황에 기초해 창조한 사회주의 자치정치경제체제는, 사회주의 각국의 개혁에 귀중한 경험과 교훈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발달한 선진자본주의국가 공산당과 노동자계급이 본국 조건에 적합한 사회주의혁명에의 길을 찾도록 고무 격려하였다.

2) 자치제도의 한계

그러나 우리는 유고 사회주의 자치이론 내부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점과, 자치제도의 실천에 있어서도 많은 오류가 있었던 사실도 마땅히 함께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결국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까지 유고연맹(주: 유고공산당)과 유고연방 해체의 원인이 되었다.

티토 등 사회주의 자치이론의 창시자들은 만년에 가서 그중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 인식이 미치면서, 이들 문제의 해결을 위한 얼마간의 시도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생전에 자치제도의 기초를 완성하여 소련모델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주의체제 건립이라는 숙원을 실현하고픈 마음이 앞선 나머지, 자치이론과 실천 중에 존재하는 중대한 실책에 대해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는데 실패했다. 이러한 중대한 오류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정치면에선, 너무 일찍이 국가소멸사상을 제기하고 연방정부의 국가경제생활에 대한 통제권을 서둘러 취소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독재하의 국가권력체계에서 연방정부가 갖는 최고권위의 지위를 약화시켰다.

이러한 사상은 맑스주의 국가이론을 벗어나는 것이다. 유고는 소련의 고도로 중앙집권화 된 정치체제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40년대 말 전국적으로 정권을 획득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탈 중앙집권화"의 구호 하에 "국가통제를 없앤다"는 정치개혁목표를 제출하였다.

“마음이 앞섰다”

구체적 실천에서 볼 때, 연방정부의 중요한 집중통일 기능을 과도하게 분산‧하방 시키는 일련의 정치경제개혁을 통해 연방권력의 약화와 무기력을 조장했으며, 각 공화국과 지방정부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는 상황을 자초했다.

특히 1974년 헌법은 법률적 형식으로 연방과 공화국‧자치성 양자 간의 권력관계를 확정지었는데, 이에 따라 전국의 중대한 정치‧경제문제는 연방정부가 필시 각 공화국‧자치성과의 협상을 통해 의견이 일치한 후에라야 비로소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하였다.

따라서 연방정부는 각종 거시조정정책과 종합적인 균형계획을 제정함에 있어, 단지 각 공화국과 자치성이 만장일치 동의하는 상황 하에서만 비로소 집행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최고위 정책결정기구로 하여금 각종 긴급한 중대문제에 대해 적절한 시기에 결정을 내놓기 어렵게 만들거나, 비록 결정을 내리더라도 순조롭게 집행하기 어렵게 함으로서, 국가의 최고 권력기구가 응당 가져야할 정치조정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하였다.

둘째, 잘못된 방식으로 "탈집권당"이론을 제기하여 당의 국가권력중의 지도적 지위를 손상시킴으로서, 민주집중제 원칙과 맑스주의의 집권당이론을 위반했다.

유고공산당은 스탈린의 "집권당"과 구별하고 당이 "관료지배계급"으로 변질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공산당’이라는 명칭을 당명에서 없애버렸다. 또한 유고연맹은 "정당이 아니"라 "정치단체"라는 관점을 제기하고, "당정분리"의 구호 하에 각급 권력기구 중의 유고연맹의 지도적 지위를 약화시키는 일련의 개혁을 진행하는 한편, "권력요소"를 감소시키고 "권력기구와 사회자치기구중의 독점적 지위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등의 일련의 비맑스주의적 이론관점을 통하여 조직 내적인 사상혼란을 야기시켰다.

이것은 유고 공산주의자들의 이론과 실천에 있어 당 지도와 대중자치의 관계를 올바로 해결하지 못한 미숙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각급 당 조직은 "국가권력기구와 형식상‧법률상 분리되면서도, 지도적 작용을 발휘하는 문제"를 변증법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장악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당원과 당 조직은 사상적 혼란에 빠져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게 됨으로써 기본적인 지도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조직 제도건설측면에 있어서, 밑으로부터 위로의 상향식 최고결정기제와 연방제 원리 등을 적절치 못한 방식으로 당내에 도입하였다. 이러한 잘못된 관점에 입각하여 당의 전국중앙위원회를 폐지하고, 각 공화국‧자치성 공산연맹중앙위원회 통제하의 유고연맹주석단 및 그 집행국을 설립하였는데, 이로 인해 당 중앙의 집중통일적 지도력의 급속한 약화가 초래되었다.

이같은 조직구조로 말미암아, 당이 일단 집권당 지위를 잃고 국가권력기구 내의 최고 권위를 상실하고 나면, 공산주의 연맹조직은 매우 급속도로 해체되게 되는 조건이 창출되었다.

“‘민주화’ 옳지 않다”

셋째, 적절치 않은 방식으로 "민주화"와 사회생활의 "탈정치화"를 정치개혁의 목표로 설정함으로써, 제국주의 및 적대세력의 "평화적 전복"에 대한 경계심을 상실하였다.

이같은 정치개혁으로 인해 국내외 반혁명분열주의세력에 대한 타격력이 약화되어, 각종 비사회주의‧비맑스주의 내지 국가통일과 민족단결을 파괴하는 협애한 민족주의사조가 범람하도록 용인하였다. 이것은 나중에 사회동란이 쉽게 일어나고, 반대당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게 만들어 연방해체의 사회정치적인 중요한 원인이 된다.

넷째, 기업경영에 있어 노동자의 자주관리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어떠한 형식의 독점도 반대한다." 라는 식으로 국가의 경제적 기능을 약화시켰다.

이같은 과도한 노동자 자주관리가 가져온 부정적 영향을 보면, 거시적 측면에서 연방정부는 국민경제의 조절능력을 사실상 상실하였다. 연방정부의 거시 조절능력이 약화되자, 공화국과 자치성 권력이 과도하게 팽창하여 지역분할적인 배타적 경제체계가 형성되고, 전국의 통일적인 시장형성은 방해받게 되었다.

다음 미시적 측면에서 볼 때, 현대 기업관리에 있어 전문지식과 기능을 갖춘 기업경영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전문적인 기업경영자의 결정권을 약화하거나 박탈함으로써 현대기업관리 법칙을 위반하였다. 이는 기업경영 효율성 측면에서 중대한 손실이다.

노동자 자주관리와 긴밀히 관련된 또 다른 문제로, 밑으로부터 위로 제정되는 상향식의 자치계획제도는 국민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전국의 통일적 계획체계를 사실상 어렵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6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말까지 유고의 국민경제 비례관계는 장기간 균형을 잃어, 무역에서의 대량 수입초과와 외채의 급증, 시간이 갈수록 엄중해지는 인플레이션, 국민경제 성장속도의 완만화 등의 문제를 발생시켰다.

다섯째, 민족관계를 처리하는 데에 있어서도 대량의 과오가 존재한다. 60년대 중반 이전에 자치개혁이 아직 전면적으로 깊숙이 전개되기 전에는 민족모순 또한 아직 돌출되지 않은 상태여서, 유고연맹은 당시에 민족모순이 이미 해결된 것으로 잘못 해석하고 민족문제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하였다.

그러나 60년대 중반 이후 자치와 분권이 심화되면서 사회정치경제구조는 분화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부터 각 공화국‧자치성 간의 경제이익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 있어 상호 비협조적인 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론에 있어 부적절하게 "자치 다원주의"를 강조하여 다원화와 분산화를 정치경제개혁의 목표로 삼음으로써, 각 공화국‧자치성의 지도자들이 여러 차례 "자치"와 "국가통제 철폐"라는 구호의 개혁 하에 실제 분열적인 행동을 취하도록 조장하였다.

“스스로 분열 조장”

유고연맹 지도부는 이러한 민족분열주의 경향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주저주저 하며 방관하였다. 특히 크로아티아족과 세르비아족 간의 민족관계를 처리하는 데에 있어 심각한 잘못을 범함으로써 90년대 초 민족 간 무장충돌의 도화선이 되었다.

여섯째, 전인민방위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전국무장역량의 통일적인 지도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였다. 지방방위부대와 민방위대는 일찍이 연방인민군을 도와, 유고가 자치개혁을 수행하는 과정 중에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하고 외국의 침략과 간섭을 막는 한편, 국가주권의 수호와 국방의 공고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바 있다.

그러나 체제상의 근본적인 결함 때문에 25만 명의 연방인민군은, 국내 민족위기가 가열화 되고 내전으로 치닫는 상황 속에서, 사회주의 체제수호의 견고한 기둥으로서의 역할을 발휘하지 못하였으며, 500만 명의 지방방위부대와 민방위대가 신속하게 연방해체와 민족무장충돌 가운데서의 중요역량이 되어 버렸다.

일곱째, 중요 이론방면에서의 이상과 같은 일련의 엄중한 오류뿐만 아니라, 또한 사상방법론상에도 여러 가지 단편성과 교조주의가 존재한다.

먼저, 스탈린과 소련의 경험에 대해 변증법적 비판이 아닌 전면적 부정법을 취하여, 맑스 레닌주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론/국가이론/집권당이론 및 민주집중제이론/소유제이론/계획이론 등 전반에 걸쳐 인식론상의 일련의 이론적 혼란을 조장하고, 이로부터 자치개혁의 실천에 있어서도 필연적으로 엄중한 실책이 출현케 되었다.

다음으로 자치분권과 중앙 통제, 개혁추진과 사회 안정 등 개혁 과정에 출현하는 일련의 모순에 대해 변증법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자치‧분권‧민주의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중앙의 권위와 집중적 지도 그리고 거시적 통제를 소홀히 하여 사회 안정을 해쳤다.

개혁의 속도에 있어서, 주객관적 조건을 돌아보지 않고 성과에만 급급한 경향이 존재하였다. 예를 들면, 사회가 동요하고 경제위기가 진행되는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권력의 분산과 하방을 목표로 한 개혁을 대폭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사태해결에 역행하였다. 특히 국가 최고 권력인 유고연맹중앙과 유고연방정부의 개혁을 서둘러, 이들의 권위를 스스로 약화시킴으로써 원래 불안한 사회국면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단초에서 출발하여…”

마지막으로, 사상방법론상 교조주의와 주관유심론을 철저하게 탈피하지 못하였는데, "소외의 극복"‧"국가소멸"‧"사회소유제" 그리고 "자유인 연합체" 등에 관한 맑스의 일련의 이론적 관점에 대해, 이를 사회발전의 기본법칙의 각도에서 과학적으로 연구 분석하지 못하고, 역사적 조건과 물질적 전제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 하에서 원전내용을 그대로 베껴 맹목적으로 실천함으로써 결국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레닌은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 한적 있다. "하나의 새로운 계급이 사회의 지도자로 역사무대에 등장할 때는, 극도로 ‘요동치고’ 진동하며 투쟁과 폭풍의 시기를 겪지 않은 적은 여지껏 한 번도 없었다는 점, 이것이 문제의 한 측면이다. 또 다른 한 측면은, 새로운 객관적 환경에 적합한 새로운 방법을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자신 없는 발걸음과 실험, 동요, 그리고 주저의 시기를 경과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유고 사회주의 자치제도가 전례 없던 역사적 과업이었기에, 그것의 창시자들이 이 같이 대단히 복잡하기 그지없는 실천을 지도하는 과정 중에 여러 가지 결함이 드러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또한 기존 전통 사회주의모델을 깨트리는 첫 번째 실험가운데서의 이러한 오류조차도, 앞으로 사회주의의 새로운 전진을 위한 귀중한 경험적 교훈을 제공한다. 다만 유고의 값진 역사적 경험을 살리기 위해서도, 한국 진보진영이 유고 자치사회주의의 교훈을 올바로 섭취하고 그 잘못을 다시 반복해선 안 된다는 점은 명확히 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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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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