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죽음에 묻힌 특별나지 못한 사람들
    2009년 06월 09일 10:1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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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6일 대전 노동자대회를 기점으로 노동계 하투의 핵으로 떠오르는가 싶던 ‘특별하지 않은 사람’ 박종태 열사 투쟁은 ‘특별한 사람’ 노무현 전 대통령 조문정국에 묻혀 대중의 기억 속에서 한 발짝 멀어진 듯하다.

우리에게 필요한건 애도가 아니라 분노였지만, 박종태 동지를 죽음으로 몰았던 금호 자본에 대한 분노를 전직 대통령의 추모 위에 두기엔 역부족이었다. 하긴, 용산 학살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의 치 떨리던 분노를 시간 속에 누그러뜨리지 않고 노동자 전체의 단결된 투쟁을 조직했더라면, 박종태 동지는 지금 열사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대한통운택배분회 동지들은 대전노동자대회 이후로 금호 자본과의 전면전을 위해 서울에 상경해 있다. 농성장을 찾아가 김성룡 분회장(42)을 만났다.

   
  ▲ 인터뷰는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녹음기를 켜고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이런 얘기는 소주 한 잔 하면서 해야 하는데…” 하신다. 그래서 바로 다음날 2차로 음주토크를 가졌다 (사진=오승희 현장기자)

분회장을 인터뷰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대전 촛불집회 때 발언을 듣고 나서부터였다. 발언을 잘 못한다면서 박종태 동지에게 보내는 글을 써와 읽었는데, 집회 사회를 보다 울어버린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 종태야, 그거 아니? 너 가고 나서 우리 택배분회 동지들 핸드폰 벨소리 전부 ‘민들레처럼’으로 바꿨다… 그런데 정작 분회장 자신의 벨소리는 한 번도 울린 적이 없단다.

“아예 핸드폰을 꺼놨어요.”

“3월 달에 광주에서 컨테이너 놓고 투쟁 시작하면서부터 집하고 연락 끊으려고 아예 핸드폰을 꺼놨어요. 아무래도 목소리 들으면 보고 싶고 마음이 약해지니까. 동료들 전화로 가끔 연락이 와요. 그러면 통화하죠. 집사람이 처음에는 그랬어요. 당신이 그런다고 세상 바뀌는 거냐고. 근데 이 투쟁 하고 나서 집에서 인터넷도 찾아보고 했는가 봐요. 지금은 이해하고 격려해줘요. 고맙죠.”

광주에서 대전 거쳐 서울까지 벌써 석 달째 농성 중이다.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는 거 못지않게 조합원들이 힘들어 하는 게 금전적인 문제라고 한다. 2006년 처음 노조를 만들 때 100% 가입했던 조합원들이, 당장 딱히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다가 중간에 조합비도 오르고 갑자기 희생자구제기금이라며 5만 원이 인출되자 많이들 탈퇴를 한 모양이다. 그리고 지금 이 동지들은 그 희생자구제기금이 가장 필요한 조합원들이 되어 있다.

“총각이면 좀 나을지 모르지만, 가정생활을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고정비용이 있잖아요. 지금 전혀 수입이 없으니까. 적금 해약하고 국민연금도 끊고 영업용 차량 넘버도 팔고, 다들 그렇게 버텨요.

투쟁기금 명목으로 이제 좀 나온다고 하니까…. 조합원들이 이제 느끼죠. 집회 때마다 모금함 돌려 십시일반 모금해 주신 돈, 여기저기서 투쟁기금 걷어 주신 돈, 우리 월급에서 공제했던 희생자 구제기금. 그게 투쟁을 준비하는 동력이고 발판이라는 거 이제 다들 깨달았을 거예요.”

동종업계에서 처음으로 화물연대에 가입한 이들이 대한통운 광주지사 택배기사들이다. 당시 수수료가 건당 850원이었는데 50원 더 낮추겠다고 사측이 압박할 때였다. 화물연대 가입하고 나서 그 협상을 뒤집고 920원으로 인상시킨 것. 화물연대본부 차원의 투쟁은 없었지만, 노사갈등이 전혀 없어왔던 회사라 많이 부담스러웠나보다.

“1995년에 대한통운 택배가 생겼어요. 저는 원년 멤버고 또 그때는 정규직이었죠. 그런데 10년차 이상이 되니까 회사 측이 인건비 부담 때문에 비정규직으로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아침에 기름을 몇 리터 넣는지, 하루에 배달을 몇 개 했는지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줬어요. 그렇게 2006년에 비정규직으로 전환된 거예요. 정규직일 때 배달하던 구역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비정규직으로 일해요. 차이는 한 가지 밖에 없어요. 사업자등록증을 냈나, 안냈나.”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처음에 대시민 선전전을 할 때 우리는 ‘30원 때문에 사람이 죽었습니다’라고 호소를 했었다. 시민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사실상 처음 이 투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합원들 입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이게 30원 때문에 싸우는 거냐고. 박종태 동지가 30원 때문에 자결한 거냐고.

   
  ▲ 대한통운 김성룡 분회장 (사진=오승희 현장기자)

“3월16일 처음 투쟁을 시작했을 때는 돈 몇 푼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임금투쟁도 사회적 의미와 결합되어야 하는 거잖아요. 우리는 이런 거 처음 해봐서 잘 몰랐는데 박종태 지회장은 싸움 시작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그걸 안 거예요. 이게 대한통운과의 싸움만이 아니라는 걸요.

택배노동자 상황이 워낙 열악해서 노조 가입 움직임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을 때였어요. 택배노동자들이 숫자가 많잖아요. 대한통운 입장에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광주지사 한 곳에 노조가 있는 거니까 어떻게든 이번에 꺾어야 했던 거죠.

택배업 90% 이상이 특수고용노동자를 통해 유지되는데, 이 사람들이 대들 수 있는 권한이 생기면 이익을 뽑아내기가 어려워지잖아요. 노조가 있으면 함부로 할 수 없지만 우리들한테는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노조를 갖게 되면 택배시장 자체가 흔들린다고 본 거죠.”

화물연대는 조합원 전체가 특수고용 노동자이지만, 택배기사들은 이 집단에서 소수파에 속한다. 그래서일까, 이 투쟁에는 본부에 대한 원망이 너무 많다. 처음부터 본부가 움직였다면 박종태 지회장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겠느냐는 거다.

그래서 나는 이 투쟁이 아프다. 자신들이 해고되기 전에도 무수하게 많았던 해고투쟁과 열사투쟁에 철저히 타인으로 살아왔음을…, 그런 무관심이 결국 또 다른 집단해고를 만들고 열사를 만들어 왔음을…, 그래서 지도부를 원망하기 전에 그러했던 우리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다면 이 아픈 역사가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음을, 이제 우리가 혀를 깨무는 심정으로 깨달아야 하리라.

“경찰 대응이 정말 살벌했어요. 200~300명 규모의 집회를 해도 2,000~3,000명이 물대포에 중무장을 해서 왔어요. 정보과에서도 상급에서 내려온 지시라고 했으니까요. 박종태 지회장은 이게 화물연대를 깨려는 입김이라고 판단한 거예요.

그런데 화물연대 내에서 택배라는 건 아무래도 생소했던 것 같아요. 거기다 지금 화물노동자들이 경제적으로 다들 어려운 조건이잖아요. 투쟁 거점을 광주에서 대전으로 옮기고 나서 20~30명 모여 집회를 하는데 인도에서 발만 떼면 잡아가버리고…. 사실 연대가 많이 없었어요. 그런 부분에 대한 조합원들의 불만이 있었죠. 이 투쟁에 연대가 제대로 될는지, 제대로 파업이 될 수 있을는지, 장기화되지는 않을지 다들 불안하니까요.

경찰의 물리력에 아무 손도 못쓰고 민주주의가 뒷걸음질치고 있다는 느낌, 그런데도 노동진영이 단결이 안 되는 지금의 모습이 불안하지만, 그 속에 우리가 있는 거잖아요. 누구 탓도 아닙니다. 우리가 단결해서 싸워야죠.”

살벌한 경찰과 자본

이유는 모르지만 지금 농성하고 있는 대한통운택배분회에는 소위 말하는 ‘학교짱’ 출신들이 많다. 속된 말로 일대일로는 누구랑 붙어도 쫄지 않는다는 것. 개별적 싸움에서는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던 사람들, 그러나 이 투쟁을 통해서 정부와 결탁한 자본과의 싸움이 얼마나 무서운지 처음 알았다고 한다.

“저도 싸움 잘합니다. 살면서 누구랑 싸우든 겁 안냈어요. 근데 이건 그게 아니더라고요. 뭉치고 연대하지 않으면 이길 방법이 없어요. 자본은 똘똘 뭉쳐 우리를 공격하잖아요.

우리가 그 전에는 그랬어요. 택배일할 때 워낙 힘들고 하니까, 옆 동료 일에 빵구가 나도 나 몰라라 했어요. 생각해보세요. 물건 하나 배달할 때 5분씩 잡는다고 하도 건당 수수료가 920원이면, 9시부터 6시까지 점심 안 먹고 일한다 치고 9시간 동안 휴일 없이 한 달 일해야 300만 원이에요. 여기서 세금 10% 떼고 기름 값이 적게 들어도 50~60만원이에요.

다 빼면 얼마 남습니까. 거기에 차량 유지에 들어가는 고정 지출금까지. 근데 사람이 이렇게 일할 수 있어요? 점심도 먹어야 하고 휴일에는 쉬기도 해야죠. 그러다 보니 시간이 돈이고 옆 동료랑 경쟁관계에요. 동료일 신경 쓰면 당장 내 일당이 줄어요. 대한통운이, 금호자본이 알려 준 겁니다. 이렇게 살아왔던 우리가 동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몇 년씩을 같이 일하고도 남남이었던 사람들이 석 달간의 농성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동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말을 잘 못해서…”, “아는 게 없어서…” 라며 인터뷰 내내 스스로를 낮췄지만, 두드려 맞으며 되레 단단해지는 강철을 보는 듯했다.

인터뷰 날이 마침 농성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조합원들이 단체로 한방치료를 받기로 되어 있는 날이었다. 밤낮 정신없이 일할 때는 차라리 몰랐는데 농성기간이 길어지면서 그간 잠복해 있던 골병인지 온 몸이 결리고 아픈 조합원들이 많다고 한다. 대부분이 종합검진 한 번을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단다. 이번 농성기간 중에 그 동지들 단체로 종합검진 받을 기회라도 만들어 졌으면 좋겠다.

* 이 글은 공공운수현장조직(준)에서 펴내는 <공공현장> 준비 6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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