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 흘리지 않는 진보의 가능성
        2009년 06월 08일 09:3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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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사카에서 오슬로에 올 때에 중국에서 최근 8년 동안 특파원으로 있어온 Phil Pan이라는 미국 기자의 『모택동의 그림자를 벗어나면서』이라는 신간을 탐독했습니다. 중국어에 능통하고 학구적 기자인지라 책은 거의 ‘대중화된 학술서’로 읽혀지더랍니다.

       
      

    거기에서 제 머리에 딱 박힌 한 가지 장면이 있었습니다. 교수 집안 출신으로 일찍 공산당에 몸을 담았다가 1957년, 북경대 재학 시절에 비판적인 견해를 밝혔다가 ‘우파분자’로 찍혀 결국 투옥돼 문혁 때에 총살 당한 임조(린짜오)라는 여성 시인이 있었습니다.

    1960년대 초반, 감옥에서 잉크를 주지 않기에 자기 피로 공산당의 독재를 비판하고 "영혼의 자유, 진정한 사회주의 구현"을 요구하는 시문과 산문을 쓴 걸로만 봐도 보통 위인은 아니었습니다.

    피로 쓴 자유, 피로 쓴 사회주의

    그런데 나중에 독재의 희생자가 된 그 여인은, 1951년, 토지 개혁 시절에 20대 초반의 몸으로 작업반 반장이 돼 남부 중국의 한 시골에서 토호 박멸 작업을 맡은 일은 있었습니다. 토지를 안 나누어 주려는 토호를 인민들이 다 모여서 집단 비판을 한 뒤에 작업반이 그 기를 꺾어 그가 자신의 악질성을 자백케 하는 것은 순서였습니다.

    그 뒤로는 인민들이 특별히 봐주지 않는 이상 사법 절차에 들어가서 보통 총살하게끔 돼 있었지요. 그래서 문학 소녀 출신의 그 여성 반장은 한 토호의 기를 꺾어 자백케 하려는 참에 그를 밤새도록 찬 물에 들어가 있게 하고 거기에서 고통을 당하는 토호가 지르는 고함 소리를 "음악처럼 즐겼다"고 합니다.

    밤새도록 ‘인민의 적’이 지르는 고함소리를 즐겁게 듣고 "인민의 해방이 왔다"는 걸 반겼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본인도 감옥에서 이와 같은 쓴 맛을 봤는데, 자신의 토지 개혁 시절의 잔혹 행위를 후회한 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후회 안한 걸 어쩌면 이해할 수도 있는 부분이지요. 중국 공산당의 대약진이나 문혁, 개혁개방을 어떻게 봐도 토지개혁 만큼은 중국 사회로서 엄청난 진보였습니다. 토호, 지주, 회당들의 우두머리 등등에게 옭매였던 백성들이 최초로 ‘공민’이 되는 순간이었고, 최초로 경자유전의 위대한 원칙이 실현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공산당 치하의 사회가 각종 격차와 부패 등으로 홍역을 치른다 해도 아직까지 튼튼하게 남아 있는 것은 토지 개혁, 토지 공유 원칙, 즉 무토지 유랑민이 원칙상 없는 신중국의 특질 덕분이라 봐도 될 정도입니다. 그래서 임조 시인으로서 그 역사적 사업에 참가했다는 건 자랑스러울 수밖에 없었지요.

    공개 고문의 이유?

    문제는, 수천 년 동안 토호들에게 사적 고문을 당해온 농민들이 토호들도 고문 당하는 모습을 보지 않고서는 토호의 시대가 지났다는 걸 실감하고 공산당을 신뢰할 수 있었는지, 토호들이 총살 당하는 걸 보지 않고서 안심하고 저들의 문중의 토지를 나누어 가질 수 있었는지 입니다.

       
      

    원칙상이야 "토호의 피를 흘리지 않는 토지 개혁이 이상적이다"라고 하고 싶지만 그 당시의 중국 농촌의 현실을 아는 사람이면 그게 얼마나 순진한 꿈인지 이야기할 것입니다. 농촌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물리력이었고, 공산당이 물리력을 행사해야 경자유전식 공민 사회를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시적 물리력 행사의 방법 중의 하나는 바로 인민의 적을 물에 담아 놓고 그 고통을 다 같이 보면서 즐기는 것이었지요. 그게 토호 지배 하에 키워진 그 당시 농촌의 민도이었습니다. 그 정글 사회로 진보를 가져다주려는 사람들로서는 선택의 폭은 컸겠어요?

    그래, 그게 여태까지의 상당 부분 인류 진보의 엄청난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진보주의자들이 칼을 들고 사회의 몸에 유혈적 ‘수술’을 하는 것은 하나의 아비투스가 된 것이지요. 우리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지만, 자기 부대 탈영병들을 가차없이 총살하는 체게바라의 모습도 그의 진실된 모습입니다.

    그 탈영병이 아내가 그립고 가족 생계가 걱정돼 부대를 무단 이탈하려는 빈농이라 하더라도 도시 중산층 출신의 의사 게바라는 가차 없이 ‘수술의 칼’을 꺼내곤 했지요. 유격대 생활에 불가피한 부분이라고 얼마든지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이고, 저도 이 말에 뭐라 반대하기 힙듭니다. 맞습니다. 탈영병을 총살하지 않는 군대는 이 지구상에 거의 찾기 힘들지요.

    악인은 악과를 낳는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1950~51년부터 토호나 일관도 신도, 회당 당원들을 박살내면서 키워진 상습적 잔혹성이 나중에 바로 문혁 시절에 자기 학교 교사의 머리에 못을 박으면서 파안대소하는 홍위병의 행동 양식으로 발전됐다는 것입니다. ‘진보의 잔혹성’이 불가피하다 해도 (토지 개혁의 경우, 물리력 행사는 아마도 피하기가 거의 불가능했을 걸요). 아무리 불가피하다 해도 악인은 꼭 악과를 낳게 돼 있지요.

    최소한의 폭력으로 최대한의 진보를 득하는 것이 바로 행복한 사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회가 되려면 "폭력이 본질적으로 좋지 않다, 어떻게든 비폭력적 사회 발전의 경로를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을 진보뿐만 아니라 보수도 공유해야 합니다.

    저는 지금의 ‘경찰주의적 통치’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한국적 보수가 그 정도로 성숙됐는지, 정말 비폭력을 지향할 정도로 인식이 성숙된 사람들이 그 쪽에 있는지 궁금해지기만 합니다. 아무래도 거의 없는 것 같아 ‘피를 흘리지 않는 급진적 개혁의 길’이 어느 정도 현실적일는지 부단히 자기 자신에게 다시 되묻게 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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