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베스가 오바마를 만났을 때
        2009년 05월 15일 05:1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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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17일부터 19일까지 남미 베네수엘라 위에 있는 작은 섬나라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34개국 정상이 만나는 제 5차 ‘미주정상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오바마와 차베스는 첫 번째 공식 만남을 환한 미소로 장식했다.

       
      

    차베스의 선물

    가끔 돌출 행동을 잘 하는 차베스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선물로 남미 최고의 지성으로 인정받는 우루과이의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수탈의 대지』(Las venas abiertas de America Latina)―우리나라에서 예전에 번역되었음―를 선물하였다. 일종의 거울을 선물했다는 느낌이다.

    차베스는 유머가 많은 게 특징인데, 오바마가 자기의 친구이길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정상회의가 ‘거의 완벽’했다고 말했다. 회담에서는 아무런 서명된 선언문이 없었다. 하지만 남미에서 이번 회담에 대해 상당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이 전임 부시 정부와는 너무나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곧바로 이 책은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은 1971년에 출판된 40년 가까이 된 책이지만, 아직까지 라틴아메리카 역사에 관한 한 고전으로 평가받는 책이다. 핵심 내용으로 유럽과 미국에 의한 남미의 오랜 자원 수탈 역사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단지 90일 만에 다 썼다고 한다. 출판되고 2년 뒤 우루과이에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그는 조국을 떠나야 했고, 1985년에야 귀국하였다. 지금은 먼 옛날의 이야기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만큼 80년대 중반 이후 신자유주의 체제는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 경제 지형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가 시작되면서 힘과 무지로 인해 라틴 아메리카인들이 당해야만 했던 엄청난 학살과 비극의 현실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콜럼버스가 남미를 발견(?)하기 약 1만 년 전부터 미주 대륙에 살고 있던 원주민 약 9천만 명이 유럽인들에 의해 생명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주목되는 오바마의 중남미 외교

    정상회의에서 미국의 태도는 남미 좌파정부들과 생각이 다르더라도 “서로 다름을 존중하는 분위기였다”고 오바마 자신이 기자들에게 밝혔다. 여러 가지 맥락상 방어적인 자세를 가질 수밖에 없지만 전임 부시 정부와는 격세지감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부시 정부는 자신들과 다른 상대방을 무력을 써서라도 바꾸려고 했었다. 작은 차이가 큰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외교정책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미국 정부는 남미 여러 정상들이 요구한 대쿠바 금수조치 해제에 대해서도, 지금 당장은 풀 수 없지만 미국인들에 대한 쿠바 여행 제한 조치의 해제 등 쉬운 문제부터 해결하려는 긍정적인 조치를 검토하면서 쿠바와의 해빙무드를 조성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오바마 자신이 쿠바와 베네수엘라가 주도하고 있는 ‘미주 볼리바리안 대안협정’(ALBA, 현재 회원국은 7개국으로 베네수엘라, 쿠바, 니카라과, 볼리비아, 도미니카, 온두라스, 산 비센테 그레나디나)에 대해 언급하면서, 미국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했다는 것이다.

    ALBA가 가지는 중요한 의미는 우리같이 상업주의 문화에 찌든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예전에 동네에서 서로 돕고 지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국가 간 무역 거래를 진행하겠다는 것이다. 즉, 비자본주의적 방식이다.

    비자본주의적 교역

    공동으로 비영리 법인을 만들어 쿠바 의사들이 최소한도의 대접 말고는 보수 없이 (이들 의사들은 쿠바정부로부터 봉급을 받는다) 남미 여러 나라 가난한 사람들의 무료진료를 하고 있다. 이들 나라 정부는 정확히 대가를 치르는 방식이 아니라, 예를 들어, 베네수엘라는 볼리비아에 원유 공급을 확대하고 에너지 분야의 기술지원을 하며 볼리비아는 제품으로 보상하는 식의 거래를 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비록 추상적인 수준이지만, 구체적인 점에서 아주 흥미롭다. 이들 지도자들이 쿠바에 대해 이야기할 때, 쿠바의 수천 명의 의사들이 남미 여러 나라에 파견되어 있고 이들 나라들은 이들 쿠바 의사들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우리와 이들 나라들 사이의 상호 관계가 오로지 마약 문제, 군사적인 것밖에 없을 경우, 우리가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해나가고 관심 깊은 정책 변화를 추진하고자 할 때 유리한 결과를 얻어낼 관계를 발전시키지 못할 지도 모른다”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오바마는 많은 전문가들의 평가대로 유연하고 굉장히 현실주의적인 대통령인 것 같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마치 케네디를 연상시키는 이상주의적인 이미지도 보여줄 줄 아는 것 같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미 의회의 청문회에서 8년 동안 미국이 차베스를 고립시키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오바마는 현재 중남미 정치 지형의 변화의 핵심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라틴 아메리카의 변화는 여러 가지 시각에서 분석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라틴 아메리카 각국 사이의 상호의존의 증대’다.

    라틴 아메리카 변화의 핵심 포인트

    차베스 정권에 대한 평가도 포퓰리즘이니 좌파 정부니 하는 평가 또는 ‘혁명적’이냐 ‘개혁적’이냐는 물음은 부차적이다. 차베스는 베네수엘라 자국 내에서도 자본주의적 시스템과 비자본주의적 시스템 사이의 긴장감 있는 상호의존 구도를 진행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기존의 잣대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파격적으로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아주 빠르게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사이에 그물망 같은 상호 의존을 넓혀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ALBA 국가들은 최근 역내 무역 통화로 달러 대신 수크레(Sucre)를 사용하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아직 유럽연합의 유로화같은 전면적인 통화 협정을 맺은 것은 아니고, 역내 국가들 사이의 무역결제 통화 수단을 의미한다. 수크레는 시몬 볼리바르와 같은 남미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이다.

    몇 달 전에 이미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상호 교역 시 달러 대신에 자국 화폐를 사용하기로 협정을 맺은 바 있다. 곧 있을 ‘라틴아메리카 통합 협의회’(ALADI) 수준에서 라틴 아메리카 여러 국가들로 확대할 것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런던에서 있었던 G-20 회담 이후 이 같은 것들을 고려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들 국가들은 런던에서 신자유주의의 기본축인 워싱턴 컨센서스의 효력 소멸을 주장하면서 무제한의 시장 자유주의를 비판했었다.

    조급해하지 않고, 주눅들지 않고

    위의 미주 정상회의 결과에 대한 소식을 접하면서, 미국이나 소위 남미 좌파 국가들은 자신들의 체제나 비전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면서도 자신들과는 정치, 경제의 맥락과 이익 추구의 방향이 다른 국가에 대해 유연하고 설득력 있게 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강대국도 조급해 하지 않고 약한 나라들도 ‘ 선진화’를 못했다고 주눅 들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예술과 같이 정치에서도 어떤 측면에서는 내용보다 형식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배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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