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부유세가 당연시됐던 이유
    2009년 05월 06일 07:5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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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버는 사람이 많이 내고 적게 버는 사람은 적게 내자"

김대중의 민주당 지지발언에도 불구하고 지난 4.29 재보선에서 전주에서 정동영과 신건이 당선된 것을 보면 김대중의 영향력은 이제 원로로서의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진보진영 입장에서는 김대중 만큼 애증이 있는 인물이 없을 것이다. 보수정치인이면서도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의 목소리를 대변하여 커다란 역할을 하였지만, 그로 인해 진보진영의 정치세력화는 20년 정도 늦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되었든 이 김대중은 1971년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를 맞아 돌풍을 일으킨다. 40대 기수론뿐만 아니라 “4대국 평화보장론”, “중앙정보부 폐지”, “예비군 폐지” 등의 혁신적 주장은 당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큰 쟁점은 되지는 못했지만 김대중의 공약 중에는 “부유세”가 있었다. 김대중이 돌풍을 일으켰던 장충단 공원 유세 중이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 1971년 신민당 대선후보로 출마한 김대중 후보가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유세 중이다

"독일같은 데서 1백만∼2백만 원짜리 비싼 개를 사다가 사람도 못먹는 쇠고기를 먹이는 이런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단단히 세금을 물려야 합니다. 노인은 땅 한 평 없는데 30만 평~40만 평짜리 골프장이 대한민국에 10개 이상 있습니다. 단단히 입장세를 내야 합니다. 3백만 원~5백만 원짜리 보석반지를 끼고 다니는 사람들은 사치세를 내야 합니다.

내가 정권을 잡으면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세금을 많이 내고 적게 버는 사람은 적게 냅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나라나 사회의 형편도 생각지 않고 사치와 낭비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부유세와 특별세를 받는 일대 조세혁명을 단행할 것을 공약합니다."

당시 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공보에도 민주당은 조세 공약으로 다음의 네가지를 천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ㄱ) 세제개혁의 일대단행과 납세가 가능하도록 세율의 전면적 인하, 재조정
(ㄴ) 부유세, 특별행위세 신설로 새로운 세원확보와 소비억제
(ㄷ) 근로자에 대한 부양가족공제, 의료비공제 등 필요경비의 공제제도 실시
(ㄹ) 조세재판제도의 신설“

1971년에는 논란이 안 됐던 부유세

당시 김대중이 주장한 부유세는 2002년도 권영길이 주장한 부유세와 동일한 맥락이었을까? 현재로서는 김대중과 민주당이 주장한 부유세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나와 있는 자료는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추측컨대는 그 내용은 거의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보통 부유세라고 하면 순자산세(Net Wealth Tax)를 의미하는데, 쉽게 말하면 한 개인이나 가족이 보유한 전체 재산에서 부채를 뺀 순 재산의 일정 비율을 세금으로 부과하는 것이다. 이 세금은 사실 소득세보다 오래된 것으로 20세기 초부터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채택하고 있는 제도였고, 한국에서는 순자산세를 초기부터 부유세라고 번역해서 소개하고 있었다.

인도에도 순자산세가 있는데, 당시 1950년대 국회의 입법조사자료에 의하면 인도의 순자산세를 부유세라고 번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2002년 대선 당시 부유세 공약 입안에 참여할 당시 여러 문헌을 검토하였지만 김대중이 부유세를 주장하였다는 사실은 선거 중간에 알게 되었고, 그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당시 부유세에 대한 많은 오해가 있었지만, 부유세가 김대중이 주장한 것이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1971년과 2002년의 대한민국은 정말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대중이 부유세를 주장하였다는 사실은 지금도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71년 대통령 선거 관련해서는 4대국 보장에 의한 평화통일론이나 예비군 폐지론 같은 것들이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나 김대중의 부유세 공약은 크게 논란이 되지는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부유세가 논란이 되지 않았던 것은 필자의 추측으로는 2002년도와는 달리 이에 대해서는 사회적 공감도가 매우 높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원래 논란이 되는 공약은 지지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반대하는 사람의 수와 강도도 강해야 되는 것인데 1971년 당시에는 반대하는 사람의 수와 그 강도도 매우 약했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추측을 해 본다.

대중 불만을 흡수한 보수야당

1971년에는 이미 성장의 눈부신 성과는 대한민국을 압도하고 있었지만 그 과실이 제대로 분배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점점 더 명확해져 갔다. 김대중이, 연설에서도 거명했지만 100만 원짜리 독일산 개를 사다가 쇠고기를 먹인다는 일은 지금 시각으로 보아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당시 100만 원이면 소비자물가지수로 계산해보면 지금 돈으로는 약 1,500만 원 정도 된다.

지금도 재산세와 양도소득세의 중과대상이 되는 고급주택의 개념이 1975년 경에 바뀌게 된다. 당시 지방세법 시행령을 보면 집안에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풀장이 있는 주택을 고급주택의 유형으로 추가가 되는데(아파트가 아니라 단독주택을 말하는 것이다), 집 안에 에스컬레이터가 있다면 당연히 고급주택이겠지만, 이러한 기준이 법령에 들어가게 된 것은 실제로 이러한 주택들이 상당수 생겨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집안에 에스컬레이터가 있고, 시가 1,500만 원짜리 외국개에게 쇠고기를 먹이는 계층과, 전태일에 의하면 1주당 98시간을 일하면서도 하루 일당이 1,000원(71년 당시 70원은 소비자물가지수로 계산해보면 지금의 1,000원 정도 된다)에 불과한 15~16세의 소녀들이 있었던 것이고, 이것이 당시 눈부신 성장의 명백한 결과였다.

그러나, 세제는 여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경제성장을 위한 도구적 성격은 점점 강해졌고, 사회전체의 자원을 재분배하는 역할로서의 조세의 기능은 점점 더 약화되었던 것이다.

김대중과 새로운 리더를 선출한 야당의 강점은 점점 더 이러한 대중의 불만을 흡수해갔다는 데에 있었다. 반독재민주주의에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를 추가시킨 것은 한국의 보수야당이 다른 제3세계와 달리 상당 기간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는지도 모른다.

부정축재 1,100억 원 몰수하던 시절

게다가 1971년의 한국에서 부유세와 같은 관념은 사실 파격적인 것이 아니었다. 불과 10년전 박정희는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후, 2공화국 정부가 통과시킨 부정축재 특별처리법을 승계하여 실제로 1961년부터 1965년까지 35억 원의 부정축재된 재산을 몰수한다.

1965년 당시 35억 원이면 소비자 물가 상승률로 비교해보면 현재가치로 약 1,100억 원 가량 되는 액수이다.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무려 1,000억 원이 넘는 부정축재 재산을 몰수한 것이 불과 6년전인데 1971년에 사실 부유층에게 부유세를 부과하겠다고 하는 주장은 그다지 놀랄만한 일도 아니었다.

지금은 전직 대통령은 건드릴 수 있어도 절대로 건드릴 수 없는 일종의 치외법권으로 법위에 군림하고 있는 모기업의 일가도 그 당시에는 사카린 밀수가 발각되어 비료회사를 국가에 헌납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니 부유세 정도의 이야기야 크게 논란거리도 아니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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