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스승 박준호 선생님의 별세
    2009년 04월 20일 04:3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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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한국사 연구자’로 만드신 제 스승님 미하일 박 (박준호) 선생님께서 2009년4월 16일 낮에,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셨습니다. 향년 91세, 한국사 교수 경력 60여 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강의를 손수 하시고, 거의 마지막 날까지 손녀딸이 러역하고 있는 <삼국유사>의 원고를 꼼꼼히 봐주시고 계셨습니다. <삼국유사>를 붙드시고 돌아가신 셈입니다.

   
  ▲ 필자

<삼국사기>를 러역하신 바 있는 미하일 박 선생님께서 평소에 <삼국유사>마저 다 번역해놓으면 원한없이 죽을 수 있다는 말씀을 계속 하셨습니다. 이제 저희 제자들은 <삼국유사> 번역 사업을 완료해서 황천에서 계시는 선생님의 마지막 유촉을 맏들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미하일 박 선생님의 별세에 대해서 한국에서 그 무슨 ‘언론’들도 언급한 바 없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그러한 언급을 아직 못본 것입니다. 뭐, 고려인, 그리고 미국과 서구, 일본이 아닌 모든 ‘가난한 나라’들의 연구자들에 대한 무시가 몸에 밴 인간들에게 뭘 기대하겠습니까?

저들과 우리, 서로 모르면서 살면 될 뿐

저는 이런 태도에 하도 익숙해져 벌써 화나지도 않습니다. 하여간 <삼국유사>를 쓰고 읽는 것은 골프 치는 게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무리들이 하는 일이 아니기에 저들이 우리들을 무시하듯이, 우리도 저들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살면 됩니다.

미하일 박 선생님의 學恩을 다 이야기하자면 아예 책을 따로 써야 하기에 여기에다가 가장 중요한 요점만 아주 간추려서 적어놓습시다. 첫째, 미하일 박 선생님께서 고대사회를 무조건 ‘노예소유제’로 보려는 스탈린주의의 주박을 풀어 한국 고대 사회를 ‘초기 봉건 사회’라고 규정하시고, ‘국가 관료제 중심의 귀족적 사회’라고 상세히 정의해놓으셨습니다.

소련의 ‘동아시아적 국가봉건제론’의 원조는 실로 미하일 박 선생님이신데, 이 이론은 관료제 중심으로 발전돼온, 그리고 18세기 이전까지 시장/상품통화경제 영역을 별로 만들어내지 못한 한국 사회의 핵심적 특질을 가장 잘 설명해준 것입니다.

둘째, 1950년대초반부터 <삼국사기> 신라본기 러역을 시작하시어 1990년대 초반까지 연표까지 혼자서 번역하신 게 미하일 박 선생님이셨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와 제자들과 함께 <잡지>, <열전>까지 다 해놓으셨는데, 세계 최초의 <삼국사기> 외국어 완역이 완성됐습니다.

‘시장바닥 논리’의 현실 학문 세계

프로젝트를 해서 1~2년 내에 ‘성과’를 내야 한다는 이 시장 바닥 논리의 시대에 이렇게 필생일업으로 한 중세 문헌을 번역하는 사람들은 과연 몇 명이나 됩니까? 뭐, 사람을 탓할 게 아니고 진정한 학문의 씨를 말리려는 이 미친 체제를 문제시해야겠지요.

미하일 박 선생님께서 한국 고대사 이해의 기본적 체계를 세우신 분이지요. 이제 이 체계를 계속 발전시키는 것은 저희 제자들의 몫이지만, 요즘 같은, 권위주의적 ‘소프트 독재’와 신자유주의가 중첩된, 상당히 야만화된 러시아에서 외국의 고대사, 특히 중, 일에 비해 주목을 훨씬 덜 받는 한국의 고대사를 공부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거의 생존을 포기하게끔 만드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 이명박 정권에 접어들어 다소 적어진 – 한국의 관련 기관으로부터의 지원에만 의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미하일 박의 학파가 생존할는지, 즉 한국 고대사에 대한 非민족주의적이고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을 하는 이들이 러시아에 계속 있을는지 정말 지금으로서 책임있게 예측하기 어려운 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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