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정치 가능성 조심스레 낙관한다
    2009년 03월 13일 08:5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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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을 바깥에서 가르치다 보면 느끼는 점이지만 같은 사회, 정치적 기관 내지 절차는 서로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름은 똑같아도 서로 체제의 형태가 다른 사회들이 그 이름에 부여하는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지요.

   
  ▲ 필자

아주 대표적으로는, ‘대학’의 의미는 북구와 일본/한국 모델의 사회에서는 서로 거의 같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일본/한국 자본주의 모델에서 ‘대학’이란 일차적으로 ’20대 초반 청년 대다수의 최종 사회화 기관이고, 사회의 위계서열적 분류 작업을 담당하는 신분 결정적 기관’입니다.

대한민국의 신분 결정 기관 ‘대학’ 

예컨대 지방사립대를 졸업한 사람들 중에서는 (영남대 등 일부의 ‘명문’을 제외하고서는) 대한민국 역사상 장관이 몇 명이나 배출됐는가요? 굳이 묻지 않아도 뻔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이제 ‘명문대’라는 말을 한 번 스웨덴어나 노르웨이어로 번역해보시지요. 해보면 아시겠지만 딱 맞는 번역어 자체가 없어요. 동질의 사회 현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보통 "prestisjetungt universitet"(사회적 高권위를 부여하는 대학)이라고 번역하지만, 어쨌든 직역어는 아닙니다. 그리고 일본/한국에서 고교 졸업생의 90% 가까이 대학에 진학하는 ‘진짜 이유’를 북구 학생들에게 설명하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노동자라는 이름의 저주’는 여기에서 대체로 1950년대 이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투표’도 그런 것 같습니다. 북구의 ‘투표’란 개인의 계급적-연령적-신분적 정체성의 표현이고, 정치/사회에서 ‘50% 대 50%’에 가까운 좌우파의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일시적으로 좌파 내지 우파에게 기회를 주는 절차이기도 합니다.

즉, 노르웨이에서는 ‘이민자 출신의 20대의 하급 공무원’이 노동당 아니면 사회주의좌파당을 찍을 확률은 90% 이상이고, ‘노르웨이 토박이 출신의 30대의 자동차 공장 노동자’라면 노동당 아니면 극우적인 ‘진보당’을 찍을 확률은 70~80% 이상입니다. 그러니까 사회적 계층별로 지지 정당이 거의 고정돼 있고 지지율 변경의 폭은 좁습니다.

노르웨이, 계층별 지지 정당 뚜렷

예컨대 노동당의 지지율은 1980년대초 이후로는 28~33% 사이에서 그저 끝없이 왔다갔다합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포괄적 의미의 ‘좌파’와 ‘우파’에 대한 지지의 폭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니 양쪽 중에서 누가 집권을 해도 아주 ‘급진’ (내지 ‘과격’)해질 수도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다른 쪽’도 배려하는 합의 정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일본에서의 투표는 계급과는 (아직도) 거의 무관하고, 연령대와는 매우 부분적 관계만 있습니다(투표권 있는 이민자 출신들이 1% 이하이기에 고려 대상도 아닙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투표’의 의미는 크게는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을 듯합니다:

첫째 지역적 정체성의 표현. 해당 지역의 ‘건설 경기’가 살아야 다수의 영세사업가들과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총체적 ‘활황’의 덕을 보니 해당 지역에다가 ‘대형 공공 토목 공사 예산’을 잘 가져올 ‘지역 인재’를 모색해 뽑는 것은 투표의 의미입니다.

여기에서는 ‘정치적 신념’도 ‘도덕적 자질’도 전혀 고려 대상은 아니지요. 오로지 키워드는 ‘건설’, ‘경기’, ‘예산 따기’입니다.

‘지역-건설-경기-예산’을 위한 투표 

   
 

그러기에 ‘계급 정치’가 (매우 제한적으로) 가능한 곳은 ‘건설 경기’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 공공 부문 및 대기업 노동자들이 많은 일부 지역 (경기도, 울산, 창원 등등)입니다. 이 부분은, 일본에서 이미 1950년대에 공고화된 ‘토건 정치’ 모델과는 거의 그대로 일치됩니다.

둘쨰 ‘화풀이’. 이건 일본보다 한국에서 훨씬 강한 현상인데 일단 어떤 정권의 임기 중반 (약 2년)쯤 되면 그 정권에 대한 유권자의 ‘피로 현상’이 일어납니다. ‘예산’을 따봐야 어차피 ‘경기’가 바라는 만큼 좋지 못하고, ‘코드 인사’ 때문에 배제를 당한 지역적/종교적 등등의 파벌들의 불만이 쌓이고 거기에다가 부패 스캔들 등이 계속 터지고… 임기 3년째 대통령은 한국에서는 이미 ‘레임덕’에 가깝게 됩니다.

결국 ‘정권 심판’한다는 유권자들은 A라는 보수적 정권을 쫓아내고 B라는 보수적 정권을 대신 창출시킵니다. 그렇다고는 바뀌는 것은 있는가요? 글쎄, 부자 감세의 폭이나 대북 정책, 새로운 건설 예산의 (지역적) 내역, 그리고 새로운 장관들의 출신 학교와 출석 교회/사찰 정도는 조끔씩 바뀌긴 하지요.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뀔 수 없는 이유는, 한국을 ‘선출되는 권력’이 좌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체 부동산의 절반 넘게 소유하는 5%의 땅부자나 삼성의 회장을 누가 투표로 뽑나요? 한국에서 ‘지역/건설’ 정치 모드에서 ‘계급/연령 정치’ 모드로의 전환은 가능할까요? 글쎄, 저는 ‘조심스러운 낙관론’을 표명하고 싶습니다.

계급 투표로의 전환 가능성과 진보의 역할

그 이유는, 첫째, 아무리 ‘부양’을 해도 건설 경기는 결국 큰 폭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고 ‘최고의 저축 형태’로서의 부동산의 의미는 좀 달라질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20대 백수’와 ‘불안한 20대 노동자’의 급상장해가는 과정에서는 ‘계급적 불만의 정치’의 가능성들이 조금씩 열리는 것 같기 때문이지요.

새로운 대졸들의 다수는 이제 ‘백수’ (‘취업 준비생’ 등등등)가 되거나 ‘인턴’이라는 기만적 이름의 ‘비정규직 이하의 비정규직’ 되거나 그냥 비정규직이 되는, 20대들이 더 이상 절망감 이외에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사회에서는 ‘본질적으로 다 갈아보자!’ 분위기의 조성은 가능할 것 같기도 합니다.

결국 문제는, ‘진보’가 생산하는 담론들이 20대의 ‘절망감에 빠진 유권자’들에게 어디까지나 ‘현실적 실행 가능한 대안’으로 인식되는가 라는 부분이지요. 어렵긴 매우 어렵지만 한국 자본주의가 잘나가던 1997년 이전까지의 시대나, ‘개혁 사기꾼’ (노무현/유시민 류들)들에 대한 기대들이 아직 살았던 2006~07년 이전까지의 시대보다 지금은 기회의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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