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앙, 혁명, 소비 그리고 자본주의
        2009년 03월 02일 08:4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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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몇 년 전인지 기억도 안나지만 한 번 소위 ‘운동권’이라 할 수 있는, 꽤나 강경한 성향의 분들과 같이 식사 자리를 한 일이 있었어요. 제가 그 때에 종교 관련의 대중 강연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야기 주제도 자연히 종교로 넘어갔어요.

       
      ▲ 필자

    제가 자칭 불자다 보니 불교 관련 질문을 받게 됐는데, 그 중의 하나는 "그러면, 정말로 윤회와 같은 정신 불멸론을 믿느냐? 윤회라는 게 어떤 초자연적 힘을 전제로 하는 게 아니냐"라는 거였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일단 초자연적인 힘을 믿을 사람은 아닐 터인데 당신이 그러면 불자냐 마르크스주의자냐, 이런 의미였을 것입니다.

    무정부주의적 불자

    제가 안간 힘을 다 해서 "생각의 흐름, 우리 머리 속에 각인 – 불교적 표현으로는 훈습 – 된 각종의 의식들도 궁극적으로는 특종의 물질이다. 이와 같은 흐름이 육체의 사멸 이후에 어떤 형태로든 계속 변모돼가면서 이어져간다는 것은 오늘날 과학의 수준으로는 입증이 안 돼도 내일의 과학을 어찌 알겠느냐, 물론 우리 불교의 사상이란 무아(無我)인지라 윤회의 주체로서의 영원한 ‘나’는 없지만 무시무종의 식(識)의 흐름까지 과학적으로 부정할 만한 근거가 있느냐"라고 하여 힘써 ‘변명’을 했습니다.

    신이 없는 종교인 불교, 그것도 절간에 잘 안 가고 승단의 권위를 잘 인정하지 않는 저 같은 무정부주의적 불자까지도 이처럼 ‘과학적 유물론’의 입장에서는 ‘이상한 사람’ 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니 신을 인정하는 기독교인이나 이슬람 신도를 과연 포용하기가 쉽겠습니까?

    사실 아쉬운 것은, 성경의 말씀대로 "같은 우리 사람들끼리 서로 알아주지 못하는" 격이기 때문이지요. 불자든 이슬람 신도든 혁명의 신도든 그 신앙이 소비품이 아닌 ‘인생의 좌표’인 이상 이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결국 똑같은 ‘이단자’들입니다.

    후기 자본주의의 유일신이란 소비 하나뿐인데, 그 유일신을 부정하는 그 어떤 신앙을 가져도 이 사회에서 주변으로 밀려나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오늘날 혁명의 가능성을 높이 치지 않아도, 그리고 레닌이 한 때에 쓰던 방법들에 대해서 카우츠키의 비판을 공유한다 해도 차라리 레닌의 신도들을 동류로 여기기가 쉽습니다.

    저는 그들의 신앙 신조를 십분 공유하지 못해도 적어도 그들의 생활적 태도를 존경이라도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소비의 신도들 같으면 ‘존경’이라는 말을 쓸 수도 없는 것입니다.

    후기 자본주의의 소비 신앙을 보시면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이 원칙들은 인류 사회가 기축 시대부터 알고 있는 종교와 상충하기에 소비주의적 세계의 ‘주류’는 – 적어도 유럽에서는 – 다소 탈종교화된 것입니다:

    1. 일회성 원칙

    자본주의 전기는 ‘근검 절약, 헌 물건을 오래 쓰기’ 위주이었는데, 자본주의 후기는 ‘새 물건으로 빨리빨리 갈아치우기’를 선호합니다. 그렇게 해야 계속 떨어져가는 이윤 마진을 높일 수 있지요.

    물론 자동차를 2~3년에 갈아치우는 게 대한민국에서야 더 보편적이지만, 그나마 루터교적 근검절약에 대한 집착이 좀 남은 노르웨이에서도 옷 수선을 거의 안해요. 중국제 옷이 싸다 보니 약간이라도 구멍이 나면 바로 버리고 새 것을 사지요.

    제가 한 와이트셔츠를 10년 이상 써왔다는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할 때에 못믿는 아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제 할아버지가 1944년 교니그스베르그의 어느 독일 민가에서 전리품으로 얻으신(단순화시키면 약탈이겠지요? 하여간 전장에서는 전사가 없어요…) 독일제의 아주 우수한 가위를 그 뒤에 죽을 때까지 쓰고 그 자손들이 1980년대말까지 썼다는 이야기를 누구에게 하면 아예 동화 취급 받을 걸요.

    이 ‘일회성 원칙’은 불교의 무소유에 정면적으로 부딪칩니다. 부처님을 제대로 믿자면 자동차를 몰고 다니면서 지구를 버리는 것부터 문제지만 자동차를 3년에 한 번 가는 것은 ‘배교 행위’지요. 물론 스님들부터 그렇게 하니 말세라고 봐야지요…

    2. 이국성 원칙

       
      

    새롭고 참신한, 보다 자극적인 소비재를 찾을 때에 이국적으로 보이는 것들은 최선이지요. 터키에서 보내는 여름휴가부터 일본 만화, 태국 출생의 부인, 아니면 티베트 불교의 수련회까지요.

    그걸 ‘개방성’이나 ‘세계성’으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시지만, 그것보다는 무제한적으로 새롭게 소비할 것을 찾으러 다니는 잡식성 소비자의 근성입니다.

    그리고 티베트 라마가 주도하는 법회에 가서 ‘나도 이제 그 샹그리라의 종교에 입교했군! 이국적 동양으로의 신나는 여행 시작’이라는 생각에 아무리 뿌듯해도 삿된 섹스를 즐기거나 술마시지 말라는 계율에는 무관심할 것입니다. 계율이란 ‘심각한’ 것이지만 소비는 오로지 유쾌하기만 해야 돼요.

    3. 부단성 원칙

    소비는 끝이 없어야 돼요. 잘 때는 안하겠지만 그 기간만 빼고 나머지 시간은 노동 아니면 소비일 것입니다. 출퇴근길에는 아이포드로 음악이 아닌 음악을 소비하고, 하루에 4시간씩이나 텔레비전의 이미지들을 소비하고, 거의 1년 내내 여름에 한 달동안이나 그리스나 터키를 소비할 수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살고…

    그렇습니다. 소비하거나 소비를 생각하는 시간이 평균 노르웨이인의 낮시간 거의 대부분을 차지할 걸요. 참, 노르웨이인이야 그나마 스키를 타서 숲을 거닐 때나마 소비를 안하지만 대한민국의 김대리는 그 대신에 소주와 삼겹살을 소비하면서 자신의 관계자본(인적 망)을 열심히 증식할 것입니다…

    소비사회의 이단자들

    하여간 이런 곳에서는 메카를 향해 하루에 5번 기도하거나, 하루에 30분 정도 <자본론>을 소화하거나, 숲속을 거닐면서 모든 중생을 다 부처로 보는 연습을 하는 이는 똑같이 ‘기린’처럼 이색적 존재입니다. 

    <법구경>에 빠지든 <자본론>에 빠지든 내가 소유할 수 없는, 소유할 필요도 없는 것에 집착한다는 것 자체는 이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반역입니다. 평생 동안 맛이 있고 멋지고 유쾌한 것들만 즐기려는 곳에서는 나는 나의 인생을 소유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나’와 ‘너’는 없다는 생각은 최대의 이단에요.

    그래서 제가 예컨대 폭력을 거부한다 해도 아프간에서 지금 제국주의 군대들을 상대로 자살 공격을 하시는 분들을 깊이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분들의 방법론에 문제가 커도 ‘나’의 목숨을 신의 뜻에 맡긴다는 생각만큼은 진정한 종교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분들이 그렇게 해서 제국주의를 이기기 어렵겠지만 어쨌든 순교는 순교입니다. 같은 종교인으로서는 일말의 존경심을 떨쳐내기가 힘들지요. 물론 광신이란 바람직한 종교 형태가 아님은 두말 할 것도 없지만요.

    그리고 대한민국의 소위 ‘종교인’들을 보면 놀라운 것은 ‘종교’와 자본주의가 너무나 궁합이 잘 맞는 것이지요. "부자는 축복 받은 사람"이라고 교회에서 말하고 사찰에서 대입기도를 하는 것은 종교 행위가 아니고 종교의 부정입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종교’를 매개로 해서 사업하는 ‘종교기업체’, 즉 교회, 사찰 등이 수없이 많지만 함석헌 선생과 같은 종교인 만나기는 불가능에 가까워요. 그것이야말로 저를 국내에서 가장 슬프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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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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