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도 백성 상대 이자놀이했다
    2009년 02월 15일 10:5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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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 정조가 노론벽파의 영수였던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되면서 정조독살설이 근거가 없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다. 정조 개혁정치의 좌절을 다룬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은 영화화되기까지 하였고, MBC에서는 정조를 주인공으로 <이산>이라는 드라마까지 만들어지게 되었다.

필자 또한 드라마 <이산>을 평소에 즐겨보았는데 노론 벽파와 목숨을 건 권력투쟁을 벌이는 현명한 청년군주의 정조와 자애로운 절대군주 영조의 모습은 많은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드라마 <이산> 포스터 

영정조 시기가 여러 장르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것은 이 시기의 개혁정치의 좌초가 조선왕조의 몰락과 식민지로 이어진다는 역사적 평가에 따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정조와 그를 지지하는 남인은 사회개혁과 백성을 생각하는 선한 세력으로, 이에 반대하는 노론벽파는 기득권과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악한 세력으로 그려지기 일쑤이다.

정조가 오래 살았다면?

그러나, 한편으로 정조가 오래 살았다면 조선왕조는 몰락하지 않았고 식민지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설은 너무나 주관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체제의 몰락이 왕 개인에게만 달려 있다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이고, 일본과 태국을 제외한 모든 아시아 국가가 식민지 내지 반식민지 상태에 빠져들었다는 역사적 사실 또한 정조라는 개인에게 과도한 집착을 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인식은 아닐 것이다.

소위 조선왕조는 삼정의 문란 때문에 망했다고 한다. 삼정은 전정, 군정, 환곡을 의미하는데 전정은 토지에 매기는 전세, 군정은 군역의 부과, 환곡은 애초에 구휼미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가 변질된 환곡을 의미하는데 크게 보아서 세금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왜 환곡이 세금인지는 나중에 자세히 보겠다.)

그렇다면 영정조 시대에는 이런 문제가 전혀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사회문제라고 하는 것이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세금문제는 더더군다나 그렇다. 영정조가 죽고 나서 갑자기 삼정이 문란해졌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영정조 시대의 세제와 재정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건이 있으니 그것은 ‘창곡(倉穀)의 환롱(幻弄. 교묘하고 못된 꾀로 남을 속여 마음대로 놀리거나 이용함)’ 사건이다.

2.

이 사건은 조선시대 형법서인 <추관지>에 기재되어 있는데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갑자기 많은 백성들이 형조에 대거 민원을 제기하였다. 그 내용은 자신들은 환곡을 빌려 쓴 일도 없는데 총융청(서울 인근 경기 일대를 방위하는 5군영 가운데 하나) 군사들이 와서 환곡을 갚으라고 하면서 백성들을 구금하는가 하면 친척에게까지 환곡을 징수한다는 것이다. 형조에서 조사하여 왕에게 보고한 내용을 보면 그야말로 엽기적인 내용이다.

원래 환곡을 내어줄 때는 보증인을 세우게 되어있는데 서울 안의 무뢰배들이 도박으로 사람을 유인한 후 도박자금을 빌려준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이 보증인이 되어 관청으로부터 환곡을 받아 낸다는 것이다. 심한 경우에는 증서에 허위의 성명을 써 넣은 경우가 있어 환곡을 갚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버지와 형이 구금되고 친척에게까지 그 피해가 갔다는 것이다.

엽기적인 조선시대 환곡제도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조폭들이 도박 빚을 받기 위해서 보증인이 되어 국가로부터 나오는 자금을 가로챈 것이다. 이 보증인 중에는 가로챈 액수가 5백석이나 되는 자도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뇌물을 바친 자도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정조는 엄격한 처벌과 조사를 지시한다. 환곡 관리자는 물론이거니와 보증인, 심지어 환곡의 관리청인 총융청의 수장에 대해서 엄중히 조사할 것을 지시한다. 그러나, 실제로 도박장을 운영하거나 그 액수가 큰 보증인 5명만 처벌되고 나머지 32인은 속전(돈을 대신 내고 처벌을 면하는 것. 조선시대에는 벌금형이 없었기 때문에 속전제도가 있었다)을 받고 석방되었다.

뿐만 아니라 창고를 관리하는 관리의 경우에는 “그들이 환곡을 나눠줄 때는 하나 같이 보증인들이 받아갈 사람의 이름을 거두어 모아가지고 책을 만들어 바친 것에 쫓아 거기에 적힌 수량대로 나눠주는 것이므로 서리는 문서를 처리할 뿐이고, 고자(창고지기)는 창고를 열고 내줄 뿐이어서 받아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허위인지 실지인지를 알지 못한다”고 하여 모두 석방하고, 총용청 수장에 대해서도 아무런 문책이 내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3.

이 사건을 보면 여러 가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왜 환곡을 군대인 총융청에서 관리하였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환곡은 구휼미로 알려져 있는데 왜 구휼미를 군대에서 일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가하는 것이다.

둘째, 왜 이처럼 관리들에게는 솜방망이 처벌이 이루어졌을까 하는 것이다. 뇌물을 바친 자도 있었으며, 확인하지 않고 쌀을 나누어주는 것은 지금도 그렇거니와 당시의 형법인 대명률이나 속대전에 의해 중하게 처벌할 수 있는 것이었다.

관리들 솜방망이 처벌 예나 지금이나

속대전에서는 통상적으로 창고를 관리하는 자가 곡물을 축내거나 포흠(逋欠)하는 경우에는, 관리들이 국가 재물을 유용했을 때 적용되는 법률인 감수자도율 등에 의해서 무겁게 처벌하고 있었고, 감수자도율이 적용될 경우 피해액이 40관 이상이면 참형이었다.

위와 같은 의문에 대한 해답은 정조 자신이 이야기하고 있다. “오로지 관청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재고의 전량을 기울여 모곡(=이자)을 취득하는 법을 비록 이제에 이르러 갑자기 폐지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해당 관청이 만약 환곡을 나눠 줄 때에 환곡 받아가기를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가를 구별하고 실, 부실을 정선하여 식구의 수를 계산하여 내주고 혹이나 소홀함이 없다면 금번의 폐단이 생기겠는가”라고 한탄하고 있다.

이 말은 당시 환곡에서 발생하는 모곡을 가지고 관청을 운영했다는 것인데, 이러한 구조적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일처리를 하는 관리를 처벌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총융청이라면 주요 권력기관이니 자신을 위해 충성을 바치는 자들에 대해서 총융청의 관리들을 이 정도만 가지고 처벌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왜 환곡제도는 이렇게 변질되었을까. 원래 환곡은 구휼을 위한 것이었다. 경국대전에는 “군자창에는 별창을 두어 잡곡을 헤아려 쌓아 두고 백성들에게 빌려주며 가을에 빌려준 본래의 수량을 받아들인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즉, 빌려준 환곡에 대해서는 이자를 받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원금만을 받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속대전에서는 “세수기가 되어 거두어 들일 때는 耗穀(모곡)으로 10분의 1을 받아들인다”고 규정하고 있는 바, 여기서 모곡은 원래 보관시 소실되는 자연 감소분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자연감소분 치고 10%는 과다하다고 할 수 있다.

이미 16세기에 모곡을 국가재정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제도가 채용되었고, 환곡은 원칙 상 원곡의 손실 없이 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 방편이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 정부의 주요기관에서부터 지방의 군현까지 광범위하게 재정 보충수단으로 활용되었는데 속대전의 이 10% 조항은 환곡을 재정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합법화한 것이다.

4.

한마디로 이 당시 국가기관들은 지금 개념으로 하면 국민들을 상대로 이자놀이를 하여 자신의 경비와 소속 관리들의 급료를 충당했다는 것인데, 이 본말이 전도된 재정 관행은 조선후기 재정 적자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재정 적자를 더욱 심화시키기도 했다.

정조 시대 조선왕조는 대부업 정부

게다가 군대인 총융청까지 이런 식으로 운용했으니 그 결과는 더욱 심각했을 것이다. 자신들은 빌리지도 않거나, 도박 빚에 연루된 환곡을 받아내기 위해 군인들이 무차별적으로 백성과 그 친척들을 잡아들인다고 생각해 보라.

그런데도 처벌된 사람들은 조직폭력배 몇 명에 불과하다면 아무리 봉건왕조라고 하더라도 당시 체제가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심하게 말하면 당시 정조 시대의 조선왕조는 일종의 대부업 정부였던 것이다.

즉, 성군이라고 칭송되던 정조도 결국은 백성들을 상대로 이자놀이를 하면서 그 돈으로 권력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영정조는 이러한 잘못된 재정운용에 대해서 개선을 하려고 했을까? 그러한 시도도 역시 노론 벽파에 의해서 좌절된 것일까?

                                                      * * *

참고 문헌

법제처 역, 추관지 제3권, 1975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대명률독회 역주, “대명률강해”, BK21 법학연구단 독회지원 최종보고서, 2006
한국법제연구원, “대전회통연구 : 호전․예전편”,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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