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혁명과 급진개혁을 넘어
    2009년 02월 14일 12:5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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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맑스주의적 전통 아래에서 혁명적 사고는 ‘급진개혁’으로 귀착된다. 사실 개혁주의란 부르주아의 후퇴나 포섭일 뿐 아니라, 폭력혁명에 회의한 맑스주의자들의 선택이기도 하다. 맑스가 영국과 네덜란드 등에서의 ‘평화혁명’을 검토한 이래 맑스주의자들은 제도 변혁의 수단으로 선거권과 의회를 상정하고, 다양한 급진분파에 반대하거나 때로 압살했다.

아래와 같이 말하는 장석준은 맑스주의의 이런 정통에 가깝다.

“10월 혁명과 같은 사건이 반복되길 기대하기 힘들다. … 이번에 닥쳐올 붕괴의 시대에도 동궁 습격과 제헌의회의 해산이 그대로 반복될 수 있을 것이라 오판해서는 안 된다. 일단 대의민주주의가 일정하게 정착하면, 그 다음부터는 노동 대중 자신이 선거를 유일한 집권 경로로 받아들이게 된다.

… 변혁 세력에게 선거를 통한 집권 외에 다른 길이 없다면, 이것은 이들의 고뇌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 또한 혁명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 급진적, 구조적 개혁이라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변혁 세력이 붕괴의 시대에 개입할 길은 선거를 통한 집권과 급진 개혁뿐이라는 것이다.” – 장석준, 윗글

그런데 민주노동당 강령은 “국가사회주의의 오류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노동의 현장, 문화의 현장 등 민중의 삶이 이루어지는 일상의 곳곳에서 지배 구조와 지배 이념에 대항하는 민중 권력을 구축”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생각은 제2인터내셔널의 분화에 따른 두 조류,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와 동유럽 국가사회주의라는 것이 급진개혁을 택하든 폭력혁명을 택하든 공히 [전위 구축 → 상승을 통한 중앙국가 장악 → 하향식 사회 재구성]이라는 전략을 취했다고 인식하고, 그런 경향을 극복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생각은 ‘사회운동적 정당’ 노선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번 토론에서 가장 실천적인 처지에 서 있었을 장석준의 의견은 그람시와 풀란차스의 입을 빌려, 맑스주의적 급진개혁에서 사회운동적 정당 노선으로 조금 더 나아간다.

“그람시의 비유는, 그가 말한 ‘진지전’을 ‘기동전’의 대립 개념, 즉 ‘참호전’이 아니라 ‘총력전’이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현상을 뜻하려던 것으로 이해할 때에만 의미가 있다.” – 「동시대인의 의견 ④-1」, 2008. 11. 24

“새로운 국가관을 뒤따르는 좌파의 정치 전략은 무엇인가? 풀란차스는 국가의 ‘장악’도, ‘분쇄’도 아닌 그 ‘근저적 변혁(변형)’을 말한다. 그에 따르면 국가의 ‘변형’이란 ‘국가 조직망에서 대중이 항상 가지는 분산적인 저항의 중심이 국가라는 전략적 지형에서 실질적인 권력의 현실적 중심이 되는 형태로 새로운 저항의 중심을 창출, 발전시키고, 보급, 발전, 강화, 지도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대의제 민주주의의 제도 및 자유(인민대중이 획득한 성과)의 확대, 심화와 직접 기층 민주주의의 확장 및 자주관리적 거점의 분산, 확대를 접합’한다.” – 「진보 좌파에게 대한민국은 무엇인가?」, 참여사회연구소, <시민과 세계> 2008년 겨울호

3. 진입 난관, 이행 곤란의 맑스주의

맑스주의적 혁명 전통이 사회주의 자원을 스스로 파괴하는 폭력혁명이나, 아예 사회주의로의 진입이 난망한 급진개혁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것은 그 이념이 가지고 있는 맹점, 그 이념이 형성될 당시의 낙후된 사회상, 저급한 과학과 철학으로부터 기원한다.

맑스주의의 문제 ① – 공산주의라는 피안과 계몽

정치 또는 인간행위는 욕구의 무한함에 의해 추동된다. 인간의 욕구 확대가 어떤 수준에서 멈추리라는 가정은 먹은 것을 토해내던 로마의 귀족, 명품 소비문화를 창조한 근대 부르주아, 지난 세기 최부유층보다도 더 많은 에너지와 영양을 사용하고 있는 제3세계 노동자들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

아울러 정치는 무한욕구끼리의 상이함과 충돌에 의해 발생하며, 한편으로 제한된다. 사회조직자에 의해 평균적으로 권장되는 모범적 욕구 같은 것은 인류 역사에 존재한 바가 없다.

이런 점에서 욕구 확대의 정지를 뜻하는 공산주의, 욕구의 궁극적 평형을 뜻하는 공산주의란 인간 본성과 다양성에 대한 몰이해로부터의 환상이다. 맑스주의판 야경국가론이자 근대적 피안론인 공산주의론은 어떤 전환 이후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유보하자거나, 유보시킬 수 있다는 전치된 목적론적 세계관이다.

이로부터 목표가 과정을, 공산주의적 선도자가 인민 동의나 평화, 민주주의를 초월하는 것을 ‘혁명’이라 천박하게 불렀다.

맑스주의의 문제 ② – 추상이념에서의 정지

“자연과정을 관찰할 때 물리학자는 가장 내용이 충실한 형태에서, 그리고 교란적인 영향으로 말미암은 불순화가 가장 적은 상태에서 관찰하거나, 과정의 순수한 진행을 보증하는 조건들 아래에서 실험을 한다.” – 맑스, 「서문」, 『자본』, 1867

맑스는 이를 연구 방법론이라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발견한 진리가 널리 전파되는 것에 관건적 의미 부여를 하였고, 맑스주의에는 일반이론, 즉 인간 두뇌 속에서 일어나는 인문학적 실험, ‘추상력(『자본』)’에서 아무 매개고리 없이 현실에 개입하려 한 19세기와 20세기의 혁명주의가 나타난다.

그러나 실재는 미미하면서도 다기한 변수들의 항상적 개입 하에 형성되고, 바로 여기에서 이론과 실재의 간극, 맑스주의 이론의 전횡과 실패가 발생한다. 이제 어떤 좌파 정치집단도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을 ‘과학으로부터의 예측, 예측으로부터의 행동(꽁트)’으로 진지하게 이용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대부분의 좌파 정치집단은 실증주의 사회학이나 미시경제학, 미국과 소련의 경험주의 선전론을 자기 행동에 널리 차용한다.

더 복잡한 문제들에게로 시야를 넓혀 자신의 이론을 복잡화․다양화․구체화함으로써 실재에 최근사(最近似), 아실재(亞實在)를 획득하는 것이 현대 혁명 과학의 과제다.

맑스주의의 문제 ③ – 혁명에서 멀어지는 노동계급

“박노자 씨는 개혁주의가 주로 서구 노동 계급이 여타 지역의 노동 계급보다 상대적으로 나은 소비 수준을 누리는 데에서 비롯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노동 계급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겪는 소외의 산물이다.

… 일상적 시기에 노동자들은 세계 전체를 노동 계급의 집단적 통제 하에 둘 자신감이 높지 않다. 이 때문에 많은 노동자들이 체제의 그 일부만을 개선하고자 하는 개혁주의를 지지하게 된다.” – 정병호, 「박노자 ‘혁명론’에는 혁명이 없다」

혁명하고 싶지 않을 만큼 어지간히 먹고 살아서가 아니라, 전략 비전을 가지지 못한 데서 개혁주의가 비롯된다는 주장은 전위에 이미 획득돼 있는 진리의 전파 이론 즉, 사회주의와 노동계급의 결합론에 고유한 것이다.

여기서 숙련 노동자와 비판적 지식인의 결합이라는 유럽 사회주의 운동의 실천 전략이 나온다. 사회집단의 규모와 성격, 교육받은 정도, 조직화의 가능성에서 이런 전략은 기본적으로 옳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전략은 숙련 노동계급 외의 다양한 하층계급이 극우집단에 속박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고, 사회복지 정책의 수혜가 중간 노동계층에게로 차별적으로 집중되면서 변혁 주체를 중도개혁주의로 수렴되게 하였다.

이런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는 유럽 사민당들의 공산당, 녹색당 등과의 선거연합 시도로 나타났지만, 공산당의 급진인텔리와 노동운동 소수, 녹색당의 도시소부르주아 상층을 포괄하는 데 그침으로써 인구학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근래 남미에서의 다른 시도, 즉 도시빈민에 대한 베네주엘라의 선동 정치, 브라질에서 농업노동자와의 결합 등이 오히려 더 발전적이고, 한국에서 그러한 집단은 아마도 비정규노동자들과 도시소부르주아 하층일 것으로 추측된다.

맑스주의의 문제 ④ – 사회이행의 다양한 거점

“초기에 요동하는 지역의 크기가 어떤 임계값보다 큰가 또는 작은가 하는 것에 따라 그 요동은 퇴화하든가 또는 전체 계로 퍼져 나가든가 한다. … 만일 구조적인 요동이 그 자신을 성공적으로 강요하게 되면, 만일 혁신자들의 수가 증가하는 속도가 충분히 빨라서 그들이 파괴되는 대신에 계를 침범하게 된다면 전체 계는 새로운 기능방식을 택하게 될 것이다. 그것의 활동은 새로운 ‘구문 syntax’에 의하여 지배될 것이다.

… 미시적인 사건들로부터 나타나는 거시적인 구조들은 이어서 미시적인 기구들의 수정에 이르게 한다.” – 일리야 프리고진,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새로운 종은 그들의 모집단에서 이탈하여 조상 영역의 주변에 위치하는 지극히 작은 개체군에서 나타난다. … 그와는 반대로 중앙에 자리잡은 대규모의 개체군에서는 유리한 변이가 아주 느리게 퍼져 나가고, 대부분의 변화는 잘 적응하고 있는 개체군의 집요한 저항을 받는다.

… 거의 예외없이 중대한 유전적 재편성은 새로운 종을 형성하게 될 주변의 고립된 작은 개체군에서 일어나게 마련이다.” – 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

맑스주의적 전통 – 목적론적이고 계몽적인 세계관, 진리로서의 추상이념, 노동계급 신봉 등은 자연스레 정치권력과 그 수임자인 당의 문제로만 집중된다. 그래서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시대전환을 영웅적 군사행동이나 전율스러운 테러로 계승했고, 현재의 혁명주의가 그런 전통을 그 전통의 완화된 형태인 ‘급진개혁’과 가두시위의 획기적 증가 정도로 표방하게 만들었다.

위 인용문에 나오는 ‘요동’과 ‘작은 개체군’은 과연 정치정당과 정치권력뿐인가? 부르주아혁명이 정치혁명, 산업혁명, 문화 전이(轉移) 등 다양한 사회변혁의 복합산물인 것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혁명도 그러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혁명에서의 탈주농노나 자유도시 같은 거점은 과연 무엇일까?

무정부주의로부터 국가의 파괴라는 개념을 수용한 맑스는 공상적 사회주의의 ‘공동체’ 구상은 철저히 배격한다. 당시 상황에서 ‘아메리카로 탈출하자’거나 ‘토지를 구입하여 공동 경영하자’는 구상이 퇴행적이었음은 분명하지만, ‘비자본주의적 공동체’를 배타시한 전통은 이후 맑스주의의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런 전통에서의 이탈은 볼셰비키가 마지못해 소비에트를 긍정한 정도에서만 나타난다.

인간이란, 인간 활동의 결과인 사회적 관계에 의한 역사적 구성체다. 인간과 인간 관계는 혁명에 의해 일거에 전변(轉變)하지 않는다. 사회주의적 인간 관계는, ‘자본 독점화’라는 추상 구조가 아니라 자본주의 안의 구체적 거점인 비자본주의적 공동체들에 의해 준비되어야 한다.

4. 폭력혁명과 급진개혁을 넘어

인류의 전사(前史)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해결을 위해 인간 간의 관계 변화를 이용해왔다. 이제 인간과 자연 관계의 성과에 힘입어 인간 관계의 해결이 가능한 충분한 조건이 이루어졌다.

우리 시대의 평화혁명은 낙후한 사회의 즉자적 대체인 폭력혁명, 그리고 폭력혁명의 완화인 맑스주의적 ‘평화혁명’, 즉 급진개혁과는 다르다. 평화혁명은 다중 동의를 전제하는 다중혁명이며, 다양한 사회영역에서의 동시혁명이며, 공산주의라는 이상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불완전성에서 연유하여 끊임없이 지속되는 계속혁명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양적 시간이 아니라 질적 시간이고,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철학적 시간이다.

영웅적 개인, 무오류의 당, 혁명적 노동계급이란, 점․선․면처럼 현실에서는 실재하지 않는 관념일 뿐이다. 객관적 자동을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주체의 의지나 도덕, 능력을 신뢰하는 것은 어리석다. 마찬가지로 그 무능에 낙담하는 것도 어리석다. 혁명은 주체의 의지나 능력 밖에서도 운동하고 있다. <끝>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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