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건당 청년파 '순욱'을 주목하라
    2008년 12월 03일 11:1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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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하늘의 색깔이 바뀔까?’

황건 농민 봉기에 가담하기로 결심한 뒤, 두 달째 집에도 안 들어가고 봉기 실무를 준비해온 스무살 청년, 순욱(荀彧)은 갑자기 하늘 색깔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태평도에서는 바로 그해, 그러니까 갑자년(甲子年)에 ‘푸른 하늘이 무너지고 누런 하늘이 새로 열린다.’는 구호를 내걸고 반공개적인 무장반역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무살 청년 순욱의 의문

황건당이 원래 처음부터 무장조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무장집단과는 아무 상관없는, 태평도라 불리는 교리 집단이었다. 조조가 태평도에 참여할 때만 해도 ‘땅을 좋아한다’며 누런 두건을 머리에 쓰고 다니는 순진한 사람들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태평도는 누런 종이에 자기 마음을 글로 옮기는 것만으로 길흉화복에 관한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선전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매우 수월하고 속편하게 심리적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한 셈이었다.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태평도는 주로 화북 지방에서 신자 수십만 명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이들이 급격히 무장조직으로 개편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조조가 태평도를 떠나 관직에 진출한 일이 있은 지 몇 년 뒤부터 한나라 정국은 급격히 혁명적인 분위기로 빠져들고 있었다. 때맞춰 불어온 계절풍으로 3년 연속 흉작이 계속 되었으나 그 와중에도 외척과 환관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많은 농민들은 농토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유민이 되었고, 남아있는 사람들도 피죽으로 연명하는 등 비참한 삶이 계속되었다. 인심 좋던 인간간의 유대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민심은 흉흉해졌다.

날이 갈수록 황제를 둘러싼 10명의 내시들(이를 십상시十常侍라 불렀다)의 횡포가 심각해지고 각지에서 탐관오리의 가렴주구(苛斂誅求)가 계속되자 지방에서부터 폭동의 조짐이 심각하게 일어났다.

약화된 천자에 의해 지방의 탐관오리들은 중앙통제를 벗어나 마음껏 착취와 억압의 칼을 휘둘렀고 이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현실의 어려움을 중앙의 천자에게 호소하기 보다는 황건당의 지방조직에 의존하는 경향이 생겼다.

황건당 내부의 노선 투쟁

황건당 지도부가 무장봉기 전술을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태평도 중앙은 경향각지에서 올라오는 격정에 찬 민원의 집합소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천자에 대한 불만과 피를 토하는 격정들은 무장투쟁으로 나아가는 자양분이 되었다. 무장 봉기 전략의 채택은 중앙차원의 일방적인 결정이 아니라 지방에서 올라오는 무수하고 자연스런 요청의 결과였던 것이다.

이렇게 반역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자마자, 황건당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급격히 무장궐기의 폭풍 속으로 빠져 들게 된다. 그러나 무장 투쟁 결정이 한 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최초에 아래로부터 무장 봉기에 대한 강력한 요청이 있었을 때 장각을 비롯한 황건당 지도부는 매우 신속하게 무장 봉기가 불가피 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논의가 확산되면서 "언제 봉기할 것이냐?" 라는 문제를 놓고 내부에 의견 대립이 발생하게 된다. 즉각 개전파와 준비파로 의견이 갈라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심각한 문제는 주로 농민출신들이 즉각 개전을 요구했고 젊은 선비출신들은 즉각 개전 보다는 ‘준비’를 주장 하는 등 출신에 따라 의견이 나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주로 몰락한 선비 출신의 젊은 태평도 신도들이 반역자체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평도 운동은 단지 농민들만의 운동은 아니었다. 태평도 운동은 나중에 한나라 멸망의 간접 원인을 제공하는 거대한 대중운동이었다. 가히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념운동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운동은 농민 뿐 아니라 주로 몰락한 선비 계층에 속한 많은 젊은이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내시와 외척의 지배로 중앙정치가 대 혼란에 빠지자 당시의 뜻있는 젊은이들은 대거 새로운 정치적 희망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고 그 대안의 하나로 태평도라는 일종의 이념체계가 제시된 것이었다.

따라서 황건 농민 봉기가 있기 한참 전 부터 벼슬길을 포기하고 태평도에 들어와 있던 젊은 청년층이 상당수 존재했었다.

쟁쟁한 청년파들, 순욱-방통-조운 등

후세의 사가(史家)들은 황건당 안에서도 독자적인 색채를 갖고 있던 이들을 ‘황건당 청년파’라고 불렀다. 이에 가담했던 젊은이들 중에 순욱, 방통, 조운 같은 뒤에 보게 될 낯익은 이름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나중에 황건당 와해 이후 각자 유비파, 조조파, 손권파, 공손찬파 등으로 흩어져 각자 알아서 현실정치에 참여하게 된다. 특히 황건당 청년파의 주류가 순욱의 주도하에 거의 대부분 조조파로 넘어가게 된다.

어쨌든 대개 선비 출신들이던 ‘황건당 청년파’는 준비파라고 했지만 사실상 무장봉기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왜냐하면 선비 출신들은 현재의 천자(天子)를 완전 부정하기보다는 한(漢) 황실을 복구하는 방법으로 태평도가 꿈꾸는 태평세, 즉 태평균등협약세상을 구현하는데 목표를 두었기 때문이었다.

황건당 청년파의 가슴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던 나라인 ‘한(漢)’의 이상은 강력했다. 진시황제 이후의 혼란한 국면에서 항우와 싸워 이겨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劉邦)은 건국 이후 제2의 혁명을 추진하게 된다. 그 때까지 자신을 도와준 자신의 수족들을 하나씩 잘라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실 이것은 일종의 내부 혁명이라고 부를 만큼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대개 권력을 잡게 되면 그 순간부터 자신을 그 자리에 있게 해 준 수많은 자신의 동료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부정과 비리가 형성되고 지배계급은 순식간에 새로 형성된다.

한고조 유방의 2단계 혁명

그러나 한 고조 유방은 기존 지배계급을 싹쓸어 버린 이후에 2단계로 그 때까지 자신을 도왔던 자기 측근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구지배계급을 쓸어버린 직후, 신지배계급의 급속한 형성과정을 완전히 좌절시킨 것이다. 오로지 유일한 지배층은 ‘유씨’ 족속뿐이었다. 세상을 ‘황제와 농민’ 이라는 아주 단순한 2원 구조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로써 천하에 유일한 지배자는 천자(天子)뿐인 세상이 되었다. 1인 지배자로서 ‘천자’만 있을 뿐, 거대 지배 집단이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이렇게 천자가 유일하게 세상의 중심 역할을 하면서 나머지는 모두 평등한 상태가 되고 천하는 계급적 분화 없이 천자와 농민이 직접 연결되었다. 이것이 유방(劉邦)이 만든 나라-‘한’의 이상과 꿈이었다.

주로 선비출신들이었던 황건당 청년파는 이러한 한나라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었다. 오죽했으면 그들은 수 천년이 지날 때까지 스스로를 한족(漢族)이라고 부를 정도였을까. 그들의 세계관에 의하면 세상은 평등세상인 한족과 계급사회인 오랑캐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뿌리 깊은 관념 때문에 황건당 청년파는 애시당초 자신들의 계급적 기반과는 정반대의 지향을 갖는 ‘황건당’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중요한 시기에는 역시 자신들의 계급적 기반에 부응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러나 태평도의 창시자인 장각(張角)은 이러한 청년파의 이상과 정세판단에 동의할 수 없었다. 장각은 지금 당장 무장투쟁을 밀고 나가고 싶었다. 장각에게는 집단 봉기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었다. 중앙군사조직의 부패와 무능을 잘 알고 있는 그에겐 훈련받지 않은 농민군만으로도 쉽게 저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장각의 ‘노래 전술’

결국 장각이 더 중시한 것은 생동하는 대중의 정서를 기초로 한 정세의 역동성이었다. 이 거대한 흐름을 제대로 탈 수 있다면 단숨에 낙양성 까지 밀고 들어가 천자인지 뭔지 당장 갈아치울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런 판단의 근저에는 더 이상 비대해진 태평도 조직을 정세에 둔감한 상태로 계속 유지하는 것은 힘들다는 생각도 있었다. 태평도를 창시하고 수십만의 조직 전체를 이끌어온 장각의 입장에서는 뭔가 조직 전체를 뜨겁게 달궈줄 만한 강력한 동력과 자극이 필요했다. 현실참여 없는 태평도의 교리는 어느덧 벽에 부딪히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장각은 어느 날, 태평도 조직에서 가장 믿는 자신의 두 동생을 모아놓고 말했다.

"무릇 얻기 힘든 것이 민심이다. 그런데 이제 민심이 이미 태평도를 따르고 있으니, 만약 이 기세를 타고 천하를 얻지 못한다면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반역에 대한 강력한 의사표현이었던 것이다.

그 후, 장각은 내부를 먼저 추스르기 시작한다. 청년파를 중심으로 한 내부 반론을 무시하거나 힘으로 배척하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내부를 설득하는 과정을 밟은 것이다. 상황이 더 무르익으면 그들도 언젠가 자기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기다림’을 택한 셈이다.

물론 그 ‘장각의 기다림’은 아무런 준비 없이 보내는 무료한 시간은 아니었다. 장각은 향후 도래할 결정적 시기를 알리고 준비하기 위해 새로운 전술을 동원했다. 이 때 나온 계책이 ‘푸른 하늘이 무너지고 누런 하늘이 새로 열린다.’는 노래를 전파하는 방법이었다. 그 노래의 전문은 이랬다.

푸른 하늘은 이미 무너졌으니
누런 하늘이 마땅히 서리라
갑자년에 때가 오면
천하가 크게 길하리라

蒼天旣死
黃天當立
世在甲子
天下大吉

"가을 바람에 날리는 잎새들처럼"

장각은 이 노래를 지어 퍼트렸다. 만약 거사가 일어났을 경우, 앞장서서 죽을 농민의 자발성을 얼마나 끌어내느냐가 혁명 성공의 관건이었다. 따라서 일부러 봉기의 시점을 명시해서 내부에 끊임없이 암시하고 교육할 수단이 필요했다.

장각은 이를 ‘노래’라는 수단에서 찾았다. 결정적인 시기가 되었을 때 조직 내부가 그 상황을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심리적으로 예고하고 준비시켜야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장각은 처음부터 집단적인 민심을 얻는 능력이 매우 탁월했다. 부적이라는 도구를 만들어내고 이를 바람에 날려 글을 읽을 줄 아는 선비들이나 청년들에게 황건당을 알렸던 것도 그의 계책이었고, 이제 마치 바람에 부적을 날리듯이 노래라는 형식으로 생각을 날려 보내 황건당 조직내부는 물론 태평도에 참여하지 않은 바깥의 농민들에게도 큰 파문을 일으켰던 것이다.

특히 이 노래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농민들이나 어린아이들에게 널리 유행이 되었다. 장각은 이러한 방법을 ‘가을 바람에 날리는 잎새들처럼 생각을 날리는 계책’ 이라고 말하곤 했다.

장각의 이러한 전망과 노력은 오래가지 않아 효과를 나타냈다. 한 황실의 부패와 무능이 계속되자 황건당 청년파는 입장을 바꿔 황제를 십상시와 외척들로부터 구해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유일한 방법은 황제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십상시를 무력으로 격파하는 것 뿐이었다.

태평도 조직의 대변혁

그렇게 2년이 지나자 아무도 봉기의 정당성이나 시기에 대한 반론을 내는 사람은 없었다. 황건당 청년파는 이미 몇 달 전부터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이제는 오히려 강력한 무장봉기의 주창자가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잘 진행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무장봉기에 필요한 군사활동 경력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던 것이다. 이 바람에 황건당을 군사조직으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태평도 조직은 내부적으로 완전히 대변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동안은 농민들 중에 신망이 있는 사람들이나 선비 출신들 중에 벼슬길로 가기를 포기하고 변혁에 뛰어든 젊은 청년들이 조직의 광범한 하부에서 두툼한 허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장봉기 전략으로의 전환 이후 조금이라도 군사적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조직내부에서 중용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때 지역 군벌에 군사로 참여했던 사람들이나 농민 출신으로 심지어는 산속에 들어가 도적질을 했던 사람들조차 칼을 써봤다는 이유로 조직핵심에 진출하는 현상이 황건당 내부에 광범하게 나타난다. 이는 향후 황건당이 갖고 있던 조직 초기의 건강성을 상실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하여튼 정작 봉기 날짜가 다가오자, 봉기를 준비해 온 주체들 사이에서는 황건농민들이 과연 얼마나 참여할 것인지가 최대의 문제로 떠올랐다.

장각은 전국의 태평도 조직을 1개 방에 1만명~5천명씩 36개 방으로 나누어 군대조직으로 편성했다. 그리고 두 동생인 장보와 장량을 지공장군과 인공장군으로 삼아 군대의 지휘권을 주고 자신은 스스로 천공장군 겸 대현량사로 칭하며 최상급의 사령관에 올랐다. 그리고는 봉기에 대비하여 전국에 걸쳐 태평도장 단위로 비밀 군사훈련을 실시하라는 지침을 내려 보냈다.

순욱의 계책

그렇지만 집계된 신도들의 군사훈련 참가율은 매우 낮았다. 형식적으로 올라오는 보고만으로도 신도들의 절반도 채 참가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나마 지방조직에서 자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군사훈련이라는 것도 매우 형편없었다. 의지는 충천했으나 구체적인 군사행동에는 경험이 전무했다.

아무도 사람의 목을 베어 죽이는 것 같은 전문적인 행동은 해 본적이 없는 평생 농사꾼이거나 골방에서 책이나 보던 선비 출신 이었다. 칼, 창, 활, 극 같은 병장기를 다뤄본 경험자 자체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유일하게 어느 정도 군사행동 준비를 갖춘 곳은 청주지방(산동반도山東半島 동쪽지역)의 태평도 조직 정도였다.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2년 전부터 위험을 무릅쓰고 노래를 지어 퍼트리며 노력한 것에 비하면 농민군의 참여율은 기대 이하였다. 장각이 어떻게 하면 봉기 참가율을 높일 수 있는지? 궁리에 골몰하자 순욱이 한 가지 계책을 제안하였다.

   
▲ 그림=억수씨
 

"걱정마십시오. 대현량사, 제게 좋은 계책이 있습니다. 만약 거사 당일 갑자기 신도들에게 농기구를 병장기로 바꿔들고 나오라고 하면 막상 흔들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몇 년째 계속되던 흉년도 어느 정도 진정되고 있는 시점입니다.

따라서 당일 날 봉기군을 동원할 것이 아니라 모든 신도들을 한참 전부터 미리 나오게 하여 함께 움직이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집을 떠나서 모두가 함께 움직이다보면 거사 당일 한사람도 빠짐없이 봉기에 참여시킬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집합 전략이었다. 장각은 즉각 동의했다.

1백만 대군의 실체

순욱이 이렇게 한 것은 황건군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이미 광범하게 퍼져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보안 유지를 위해 36방의 농민군을 미리 집에서 나오게 하여 중앙으로 집결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정작 중요한 비밀은 중앙에서 깨졌다. 반란군이 낙양성 안의 거사 협조자와 통문을 주고받던 중 이 서신이 관군의 검문에 발각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거사일은 한 달이나 앞당겨졌다.

황건군이 봉기하는 날, 너무 많은 농민군이 모여드는 바람에 작은 언덕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농민들은 거사일도 모른 채, 무작정 집에서 나오는 바람에 각종 농기구는 물론이요 달구지를 비롯해 소나 닭 같은 가축도 데리고 나왔었다. 심지어는 노모와 여자들 그리고 아이들도 모두 손에 손을 잡고 거사를 일으키기 위해 나왔다.

이것이 훗날 사람들이 말하던 1백만 대군의 실체였던 것이다. 원래 36방에 걸쳐 편성된 농민군은 1방에 5천~1만 명 정도로 전체 규모는 30만 명 수준이었다. 이들이 정확한 거사일도 모른채 집안의 식솔들 까지 다 데리고 나오는 바람에 1백만 대군이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황건당의 1백만 대군을 만들어낸 것은 다름 아닌, 조직 동원에 자신감이 없었던 황건당 지도부의 궁여지책 이었다.

그러나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분명히 ‘봉기’를 목적으로 집합한 민중 반란군이었다. 누군가 작은 산 하나를 인간들로 빼곡하게 가득 채운 그 장관을 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가히 인간의 산이라 할 만 하군요."

그 소릴 듣고 있던 순욱도 거들었다.

"인간의 바다이기도 하지요"

장각의 연설

그렇다. 그것은 인간의 바다였다. 상상하기 힘들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꿈, 같은 희망을 가지고 모여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흐르는 온기의 흐름까지 느낄 수 있었던 그것은 진정한 인간의 바다였다.

그 순간 항상 아홉 마디의 지팡이를 들고 다니던 장각이 모습을 나타냈다. 장각의 동선을 따라 수 십 만개의 시선이 함께 움직이며 그 인간의 바다는 출렁거렸다. 그것은 장각의 손짓하나 말 한마디에 함께 춤추는 거대한 인간의 파도였다.

장각이 큰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가히 1백만에 가까운 대중이 운집했지만 장각의 말소리를 들으려고 누구하나 찍소리 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고요하지만 거대한 공감이었다.

장각의 손에는 서책이 한권 쥐어져 있었다. 황제가 금서로 정한 태평도의 경전-태평청령서였다. 장각은 말없이 언덕 꼭대기에서 책을 펼쳐 큰소리로 책의 첫줄을 읽기 시작했다.

"천하는 민심의 합의체일 뿐이다."

나지막하지만 묵직한 탄성이 동심원을 그리며 마치 파도처럼 인간의 바다 위에서 잔잔하게 번져나갔다.

"와~!!"

순욱을 가슴 뛰게 만든 태평청령서 첫 귀절

그 소리를 옆에서 듣고 있던 순욱은 가슴이 쿵쿵거렸다. "천하는 민심의 합의체 일 뿐이다." 그 말은 언제 읽어도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의 첫 귀절이었다. 장각이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태평도 신도 여러분,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자랑스런 황건의 농민군 여러분, 천하의 9할이 우리 농민네들인데 왜 우리가 칼 들고 설치는 저 권세 있는 놈들의 지배를 받고 살아야 합니까? 자 이제 낫과 쟁기를 버리고 칼과 창을 듭시다.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입니다.

가을바람에 휩쓸리는 낙엽 쓸어버리듯이 저놈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이제 땅바닥에 붙어 죽어라 일만하는 사람들이 주인 되는 농민의 세상을 만듭시다. 자! 모두 함께 외칩시다. 천하는 공물(公物)이다!! "

"천하는 공물이다.!!"

"창천이 지고 황천이 열린다."

"창천이 지고 황천이 열린다."

"와!!!! 와!!!"

   
▲ 그림=억수씨

거대한 공감과 누런 하늘

천하가 열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렇게 수많은 입으로 똑같은 말을 외친 적은 없었다. 그들은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동원된 군중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 운명의 땅을 자신의 힘으로 갈아엎기 위해 스스로의 의지로 모인 자발적 농민들이었다.

그것은 억압과 착취가 없는 세상에 대한 인간과 인간의 거대한 공감이었다. 그들이 서로 다른 입으로 똑같은 말을 외쳤던 것은 그 공감을 확인하기 위한 형식이었다.

그렇게 함성과 감탄, 분노와 슬픔과 회한이 어우러지며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난무하고 있을 때 였다. 갑자기 누군가 하늘을 가리키며 외쳤다.

"누런 하늘이다!"

사람들이 일제히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정말 하늘색이 바뀐 것 같았다. 거의 모든 사람들의 눈에 정말 하늘이 누렇게 보였다. 해질녘이 되면서 노을 때문에 하늘이 누렇게 보였던 것이다.

자세히 보면 붉은 하늘이라고 말해야 했지만 때는 갑자년이었다. 사람들은 자연을 향한 투쟁도구를 인간에 대한 투쟁도구로 바꿔들고 저마다 앞으로 닥쳐올 거센 운명의 바람을 맞으며 벅찬 가슴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당연히 누런 하늘로 보였던 것이다.

순욱은 속으로 감탄했다.

"정말 파란 하늘이 무너지고 누런 하늘이 왔구나! 장각선생은 대단한 인물이다."

농민에게는 땅이 곧 하늘이었다. 땅에 붙어서 일을 하고 자기 땀의 대가로 땅이 주는 곡식을 먹어야 살 수 있었다. 농민에게는 땅을 지배하는 하늘 보다는 그 땅의 색깔을 한 하늘, 그 누런 하늘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 황실에 의해 황건적의 난이라고 규정된 갑자년 황건 농민 운동의 시작이었다. 이것은 한나라를 무너뜨린 거대한 계급운동이었다. 유방이 만든 나라-한 황실을 400년 만에 무너뜨린 저 거대한 태풍은 그렇게 붉은 노을 아래서 시작하고 있었다. (4편 도원결의 – 권력의 원초적 축적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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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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