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번 부서져보자”
        2008년 11월 28일 04:5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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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조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구김살 없는 소년기를 보냈다. 그렇지만 생김새는 별로 귀족답지 못했다. 조조의 얼굴은 눈이 작고 입술이 봉긋하게 튀어나와 촌스러운 분위기를 맘껏 풍기고 있었다.

    성격도 꽤나 솔직한 아이였고, 활달하고 명랑한 인물이었다. 품성도 소탈한 편이라 부잣집 아이 답지 않게 늘 별로 귀티가 나지 않는 비단옷을 아무렇게나 입고 다녔다.

    조조는 열여덟살 되던 해에 효렴(孝廉)이라는 예비 벼슬을 받게 된다. 당시에는 어차피 추천으로 관직에 나아갈 귀족 자제들에게 ‘효자이면서 청렴한 사람’ 이라는 뜻으로 ‘효렴’이라는 명예직을 주었는데 이 ‘효렴’을 받아야 나중에 본격적인 중앙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아들이 벼슬길에 나갈 일이 코앞에 닥치자 조조의 아버지 조숭은 어느 날 조조를 데리고 황하(黃河)가 굽이쳐 흐르는 강가의 모래사장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조숭 자신의 아버지, 그러니까 조조의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맹덕(孟德, 조조의 자)아, 네 할아버지는 궁궐에 들어가기 위해 자청해서 남성(男性)을 거세하신 분이셨다.”

    남성을 자른 할아버지

    조조의 할아버지는 환관 즉 내시 출신이었다. 조조도 그것은 익히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왜 이곳까지 와서 새삼스레 그 얘기를 꺼내는지? 갑자기 궁금한 마음이 일었다.

    조조의 아버지는 손가락으로 강가의 어느 지점을 가리켰다. 거기엔 부서진 채, 몇 달째 방치되어 흉물이 된 난파선 하나가 있었다.

       
    ▲ 그림=억수씨
     

    “아들아, 저배는 원래 보물선이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짐을 싣고 가다가 강에 빠져 저렇게 흉물이 되었단다. 속절없이 권세와 재물만을 탐하면 저런 꼴이 날지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

    권세욕은 자기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가족은 물론 후세에까지 큰 파장을 미친다. 네 할아버지처럼 말이지, 그것이 우리 집안이 하후씨에서 조씨로 바뀐 이유이다.”

    그랬다. 조조의 집안은 원래 조씨가 아니라 하후씨였다. 조숭은 자신이 지금 조조의 나이 쯤 되었을 때, 아버지가 처자식을 모두 버리고 환관이 되어 궁궐로 들어가 버렸다. 남은 식솔들은 그 일로 하루아침에 황망한 신세가 되었고 결국은 하후씨를 버리고 아예 조씨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아들아, 이 부서진 배를 보며 다짐해라. 절대 네 할아버지처럼 권력을 얻기 위해 영혼을 팔아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이 아비는 네가 아무리 높은 벼슬을 하더라도 인간의 본분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려고 널 이리 데려왔다. 나는 네가 벼슬길에 나가기 전에 이 다짐을 꼭 했으면 좋겠다.”

    구구절절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이 묻어있는 듯했다. 그래서 조조는 그 마음을 거스르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예, 아버님 말씀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입을 놀리면서도 조조의 마음속에는 전에 별로 생각해보지 못했던 한 가닥 호기심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권세와 영화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내 할아버지는 거세를 하면서까지 궁궐에 들어가려 했던 것일까?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은 몸의 한가운데에서 솟구치는 것일진데, 그것보다 더 큰 욕망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조조는 아버지와 함께 백사장을 걸어 나오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부서진 배가 정말 산산이 찢겨진 채로 백사장 위에 처박혀 있었다. 그 순간 조조의 머릿속에 한줄기 악마의 유혹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도 한번 부서져 볼까?!’

    의심 많은 조조

    조조는 원래 누가 무슨 말을 하면,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정반대로 생각해보는 버릇이 있었다. 이런 성격 때문에 조조는 나중에 ‘의심이 많다’는 평가를 듣게 된다. 그러나 조조로서는 들어오는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한 번 거르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 악마의 유혹 같은 생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버지의 진심이 전달되어서였을까? 조조는 아버지의 충고만큼은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조조가 세상에 대한 맹렬한 관심을 키우게 된 것은 그날 이후였다.

    소년 조조는 그 날 이후부터 어떤 정치를 해야 권력을 취하면서도 영혼을 팔지 않을 수 있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내 욕망의 뿌리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권력을 얻고, 할아버지처럼 내시의 길을 걷지 않으면서도 참된 정치를 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이 끊이지 않았다. 장차 본격적인 벼슬길에 올라야할 청년 조조로서는 피할 수 없는 고민이기도 했다.

    그런데 고민 끝에 결국 조조가 찾아낸 나름의 해답은 엉뚱하게도 이념운동이었다. 당시에는 황하 하류의 일대를 중심으로 태평도 운동이 조용하면서도 맹렬하게 확산되고 있던 중이었다.

    태평도는 장각(張角)이라는 사람이 창시한 종교적 형태의 사회운동이었다. 그들은 황로학파의 사상을 추앙하는 교리를 갖고 있었다. 황로학파는 전설 속의 군주인 황제(黃帝)와 춘추시대의 이론가 인 노자(老子)의 사상을 추종하는 학파였다.

    태평도라는 이름은 그들이 추구하는 세상을 태평세(太平世)라고 부르면서 시작된 명칭이었다. 태평세란 태평균등협약세상(太平均等協約世上)의 약자로 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라는 경전에 명시된 천·지·인(天地人)의 조화가 이루어진 이상적인 사회였다.

    태평도 신자는 땅을 상징하는 황색을 조직원의 표식으로 삼고 이를 신성시했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태평도라는 이름보다 황건당(黃巾黨)이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바로 이 태평도의 교리가 벼슬길을 앞에 둔 청년 조조의 귀에 들어온 것이었다. 청년 조조가 태평도 운동에 참가하게 된 경위는 대충 이렇다.

    황건당에 빠지다

    하루는 조조가 마당에 앉아 가을바람에 무수히 떨어지는 낙엽들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떨어지는 낙엽 사이로 어른 얼굴 만한 크기의 종이 한 장이 바람결에 실려 함께 날아왔다. 조조는 처음에 그것도 낙엽인줄 알았다. 그러나 그 종이는 태평도에서 만든 ‘부적’이라는 종이였다.

    부적의 생김새는 참으로 묘했다. 누런 종이에 붉은 글씨로 황(黃)자처럼 생긴 그림인지 글자인지 모를 이상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조조는 그 부적이라는 종이를 보는 순간, 가슴 속에서 묘한 미학적 감흥이 일었다.

    그 전까지는 모든 글자를 단순히 흔해 터진 ‘문자’라고만 보고 지나갔지만 부적이란 것을 펼쳐 놓고 보니 글자라는 것의 의미가 남달라 보였다. 그것은 면 위에 펼쳐진 아름다운 선이었다. 조조는 이때부터 ‘선’의 아름다움과 그 의미를 중시하게 되었다.

    그 ‘부적’이라는 것은 장각이 발명한 것으로, “쓰면 이루어진다”는 태평도의 교리에 따라 만들어 낸 것이었다. 태평도 조직원들은 정기적으로 이를 바람에 태워 선전용으로 뿌리곤 했는데 조조가 이를 주워본 것이었다. 조조가 살던 마을의 근처에도 장각(張角)이 파견한 태평도의 지방조직이 공공연히 활동하고 있던 중이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조조는 점차 태평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점점 그 교리에 심취하게 되었다. 급기야는 태평도 지방조직의 집결지인 태평도장에까지 나가게 되었다. 태평도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조는 태평도 운동에 참여한 지 불과 몇 달 만에 다시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 계기는 아주 단순했다.

    태평도는 교리 상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기위해 정전제(井田制)라는 독특한 토지제도를 강령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이것은 농지를 우물 정자 (井) 로 나누어 9등분하고 여기서 8호가 한 단위가 되어 우물정자 주변의 8토막 난 토지를 하나씩 경작하되, 한가운데의 네모난 토지를 모두가 돌아가면서 경작해 거기서 나온 생산물로 공동의 경비를 충당한다는 발상이었다.

    그러나 조조의 생각은 달랐다. 어차피 당시에는 농사지을 땅 자체가 모자란 것은 아니었다. 조조가 볼 때 오히려 땅은 충분했다. 문제는 황실의 무능과 관리들의 부패로 자꾸 유민이 발생해 경작할 땅이 계속 사라지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강령과 조직문화에 반발해서…

    따라서 농토를 똑같이 나누기보다는 농민을 땅위에 붙여놓을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조조의 생각이었다. 물론 이런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교리라는 것은 애당초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지 그 반대로 올라올 수는 없는 것이었다. 조조는 실망했다.

    그러던 차에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어느 날, 태평도의 지방 책임자가 조조를 부르더니 조조의 집안에 대해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태평도의 신도들은 대개 유랑 농민 출신이거나 몰락한 선비 집안에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청년 출신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돈으로 관직을 산 고관대작의 자제가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태평도 책임자들은 조조를 경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갑자기 의심을 받게 되자 조조의 태도 역시 돌변하였다. ‘태평도라는 것이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아래 사람 없는 태평세(太平世)를 만든다더니 여기서도 결국 나 같은 사람은 출신 때문에 차별 받는게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동안 모른 척 했지만 사실 태평도장 사람들 중에는 조조를 가리키며 “내시의 자손”이라고 쑥덕거리는 경우가 많았었다.

    “이것이 태평도가 말하는 황건동지연대야(黃巾同志連帶吔) 라는 말인가?”

    이 사건은 조조로 하여금 태평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만들었다. 한 때는 천하를 구원할만한 큰 진리를 얻은 듯이 기뻐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조조는 여러 날을 고민하였다.

    조조는 생각했다.

    ‘황건당(태평도)이 좋은 말을 많이 모아놓은 것은 사실이지만, 교리는 현실을 따라오지 못한다. 어차피 교리라는 것은 이념작가가 현실을 보고 머릿속에 재구성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나는 교리를 무작정 숭상하기보다는 눈앞의 현실을 해결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더 이상 위험을 감수하고 태평도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사실 조조로서는 매우 큰 위험을 무릅쓰고 태평도에 참여했었다.

    조조는 일종의 예비 관원이나 마찬가지 신분인 효렴에 천거되어 벼슬길에 나가기 직전에 있었다. 또 당시 조정에서는 태평도의 경전인 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에 금서 처분을 내리고 태평도에 대한 감시와 경계를 노골화하고 있었다.

    때문에 조조는 태평도장에 출입했던 사실을 가족들에게도 모두 숨겨야만 했다. 한나라 황실이 감시만 제대로 했었다면 조조는 벼슬길에 나가지도 못했을 일이었다.

    어쨌든 그 길로 조조는 태평도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그 후로는 태평도장에 두 번 다시 나가지 않았다. 다만 태평도에서 특히 매력을 느꼈던 부적 한 장을 기념으로 챙겼을 뿐이었다.

    벼슬길에 오르다

    사람들은 어느 날 부터인가 보이지 않게 된 조조를 두고 “부잣집 아들놈이 그럼 그렇지, 언젠가 떠날 줄 알았다”며 쑥덕거렸다. 조조도 그렇게 조용히 태평도장을 떠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떠남이 아니었다.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원한관계의 시작인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1년 후, 조조는 ‘낙양북부교위’라는 작은 벼슬을 얻어 본격적인 중앙관직으로 나가게 된다.

    벼슬을 얻어 낙양으로 떠나기 전에 조조는 다시 부서진 배가 있던 자리에 가 보았다. 그 때의 그 난파선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옛일을 떠올려 보던 조조의 입가에 잠시 웃음이 번졌다. 1년 전, 아버지와 함께 난파선을 바라보며 ‘나도 한번 부서져볼까?’라고 생각했던 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조조는 생각했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벼슬아치들이 있었겠는가? 기왕 벼슬길에 오른 이상 나도 난파선이 한 번 되어 보아야겠다. 그러나 할아버지처럼 황제의 옆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식으로 부서지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훨씬 더 강력한 방법으로 더 치열하게 부서질 테다. 할아버지는 욕망의 한가운데를 도려내고 그 자리에 권력욕을 대신 채웠지만 나는 내 삶을 전부 다 던져 치세(治世)의 능신(能臣)이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조조는 맹렬하게 흐르는 누런 강의 물줄기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때는 한(漢) 영제(靈帝) 희평(憙平)3년 (174년) 조조의 나이 20살 때였다.

    [다음은 3편, 황건 농민군 봉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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