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냥하고 아름다웠던 그녀…행려 변사자로
        2008년 11월 21일 10:5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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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포스터
     

    강변에서 맞아 죽은 무연고자 중년 여인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죽은 여인의 모습은 추하고, 생전의 성정은 괴팍했으며, 주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 돌보지 않아 살던 흔적마저 구질구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쨌든 죽은 이를 수습해야 하고, 그래서 영화는 살해의 동기를 밝히는 수사물의 길을 가는 대신, 여인의 이름과 과거를 찾는 좌절된 성장영화의 길을 되짚어 밝히고자 한다.

    도대체 무엇이 이 여인으로 하여금 그토록 혐오스러운 삶을 살다 죽음에 이르게 했던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이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구슬프고 우스꽝스러운 추모사이다.

    그녀의 이름은 마츠코. 가족도 있었다. 지극히 평범하고 단란한 일상을 살아가는. 그러나 생전의 그녀를 기억하는 가족은 그녀를 외면하고, 그녀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백수건달 조카가 마츠코의 쓰레기더미 인생에서 남은 부스러기를 정리하는 일을 느닷없이 떠맡으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사랑스런 음악선생님, 가망없는 사람에 빠지다

    그런데 세상에! 알고 보니 젊은 날 마츠코는 상냥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음악선생님이었더란다. 어쩌다 이렇게 망가져버린 걸까? 매번 형편없는 남자와 가망없는 사랑을 하면서 점점 더 악랄해지는 윤락과 범죄의 수렁에 빠져들더니 마침내 살인범이 되고 자신도 누군가에게 맞아 죽은 피살자가 되었던 걸까?

    마츠코의 곡절 많은 생애를 굽이굽이 되짚어가면 남을 기쁘게 하려는, 그래서 사랑이라는 걸 제대로 한 번 받아보려는 애절한 바람으로 목이 바짝 타는 아가씨를 만나게 된다. 사랑과 인정에 목마른 나머지 어쩌다 저지른 실수 하나에 발목이 잡히자 그 매듭을 푸는 대신 감추고 더 꼬아버린 것이 빛나던 한 인간의 삶을 어둡고 불쾌한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렸다.

    수학여행에서 돈을 훔치던 학생의 죄를 덮어 보겠다고 어영부영 상황을 악화시키던 순간, 무엇이 잘못되었고, 자신은 또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밝히기보다 ‘잘못’ 자체를 덮어버리려던 그 순간이 마츠코의 일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 ‘혐오스러운’ 변곡점이다.

    그 ‘잘못’을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그 ‘잘못’을 덮어주지 않는다고, ‘잘못’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망가뜨려버린 것이 ‘잘못’ 자체보다 더 큰 마츠코의 ‘잘못’이다. 그 ‘잘못’은 마츠코를 가족과 절연하게 만들고, 세상과 불화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대신 오직 사랑받기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느라 혐오스런 일생을 감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무도 진정으로 마츠코를 사랑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마츠코는 텅 빈 집에 들어설 때마다 공허함을 흩어버리는 인사를 한다. ‘다녀왔습니다.’라고.

    마츠코로 하여금 혐오스러운 삶을 버텨내도록 한 것은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그 ‘다녀왔습니다.’라는 인사에 대한 화답이 있으리라는 희망이었을 터. 어두운 시절을 함께했던 벗의 손짓에서 작은 희망의 실마리를 발견하고 세상과의 벽을 허물고 밤길을 헤매는 아이들에게 말을 건네는 순간 화답 대신 돌아온 것은 몽둥이였다.

    ‘다녀왔습니다’, 대답은 몽둥이

       
    ▲ 영화의 한 장면

    그렇게 마츠코는 맞아죽었고 몸은 혐오스런 삶의 더께로 덕지덕지 얼룩진 채 버려졌다. 그러나 마츠코의 죽음을 마주했을 때 시신이 아니라 삶을 수습하려는 조카의 노력은 마침내 마츠코를 ‘잘못’으로 어긋나기 전의 순간으로 되돌려 환한 웃음으로 인사하게 만든다.

    스크린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마츠코의 웃음어린 ‘다녀왔습니다’라는 인사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마츠코는 스스로의 삶을 바쳐 ‘잘못’에 대처하는 자세가 어떻게 되어서는 안되는가를 몸과 마음으로 겪어내고서야 자신과 세상에 대한 모든 혐오를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러므로 마츠코의 인사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대답하기 위해 나의 ‘잘못’을 털어놓고, 바로잡으려 한다.

    지난 번 <몽상가들>에 대한 글에서 나는 이 영화가 제대로 극장에서 개봉되지 못했다고 말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2003년 영화제에서 영화를 본 지 이태가 흐른 후에야 심의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던 것만 기억하고, 재심의 통과 여부나 극장 개봉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것은 열린 매체에 글을 쓰는 사람이 저질러서는 안되는 잘못이다.

    이 영화는 2005년 3월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과정에서 처음에는 몇몇 장면의 노출수위와 근친상간에 대한 암시 등이 문제가 되어 반려되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재심의를 요청한 사람들의 노력으로 18세 관람가 등급에 무삭제로 심의를 통과해 극장에서 제대로 상영되었으며, 이후 <천국의 전쟁>이나 <숏버스>처럼 노출 정도를 둘러싸고 심의 통과 여부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심의 잣대의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는 기준이 되었다.

    <몽상가들>을 만들고, 걸고, 본 사람들에 대한 잘못

    제대로 된 제한상영관이 없는 한국 현실에서 ‘제한상영가’ 등급 자체가 상영불가와 마찬가지인 마당에 허울에 불과한 제한상영가 등급은 검열에 다름 아니라는 지적이 있을 때마다 <몽상가들>은 작품성, 예술성 여부 뿐만 아니라 표현의 자유, 상영의 기회와 자유를 성취한 예가 되었다.

    그러니 이 영화가 극장 상영될 기회가 없었다는 나의 글은 제대로 사실 확인을 하지 못한 잘못 뿐 아니라, 이 영화를 스크린에 제대로 올리기 위해 노력한 관계자들과 심의의 기준을 새로이 세운 심의위원들, 그리고 수고로이 극장을 찾아가 영화를 관람한 모든 분들에 대한 ‘잘못’이다. 그리고 나를 믿고 글을 맡겨주신 분들에게도 누를 끼치고 말았다.

    이런 잘못을 덮어버릴 수도 없고, 잘못을 사죄한다고 해서 수습이 될 것도 아니지만 자기혐오로부터 벗어나 잘못을 인정하고 부끄러움을 제대로 고백해야만 마츠코의 인사를 제대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허물 많은 글을 읽어주신 분들에게 나도 감히 인사를 건넨다.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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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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