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은 왜 자본주의 체제에 동의하나
    2008년 11월 16일 11:0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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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자 교수

‘노르웨이와 같은 핵심부 나라에서 혁명적 활동을 하자면 어떻게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일까’라는 부분에 대한 제 단상을, 그나마 약간 숨이 트이는 토요일인 오늘에 계속 적어보겠습니다.

평일날에는 낮에 학교 일을 보고 저녁에 아이를 봐주느라 거의 몇 줄 적을 시간도 없는데, 주말에는 그래도 망중한을 좀 즐길 수 있습니다.

노르웨이 근로대중의 다수가 복지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동의’를 하고 있다는 지난 번의 제 말씀에 실망을 표명한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원칙상 늘 혁명을 향한 일편단심을 가져야 할 신성한 민중들은 자본주의를 동의한다 하니 당신도 어용이 아니냐, 이런 식의 반응에 직면할 수 있었습니다.

자본주의에 동의하는 민중

글쎄, 제게도 슬픈 사실이지만, 우리가 주자학적인 주리론 식으로 ‘원칙’부터 따지지 말고 반계 선생과 연암 선생의 실사구시론으로 하자면, 일단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제가 8년 전에 노르웨이에 왔을 때부터 가장 애타게 찾고 있었던 것은 바로 ‘혁명가’들이었는데, 정말 혁명적인, 즉 자본주의 그 자체를 시종일관 부정하여 비(非)자본주의적 사회를 건설하려는 이들을 오로지 인텔리 중에서만 좀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외국의 선진 이론을 번역, 소개하여 그 선진 이론 이외에 인류의 문화를 그냥 도외시하는 그러한 방식의 혁명가들은 아니고 (뭐, 선진 이론, 즉 ‘중심’으로부터의 올바른 관념에 대한 갈망을, 주자학이 500년 동안 다스렸던 나라만큼 더 하는 사회는 있을까요?) 주로 저와 같은 모양으로 불교나 도교도 즐겨보고 권위와 공해가 없는, 즉 ‘무위계적이고 생태적인 사회’를 목적으로 삼는, 그런 부류의 시인들이나 화가,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자본주의에 대한 ‘아름다운 개인적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고, 저도 이와 같은 반란에 십분 찬동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죠. 나만의 깨달음, 즉 우리 부처님이 말씀하신 성문과 연각, 벽지불의 깨달음을 일체 중생의 대중적 깨달음으로 어떻게 전환시키느냐, 즉 개인적 반란을 대중적, 세계적 반란으로 어떻게 ‘대승화’시키느냐 이게 문제입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제 화두죠.

동의하는 이유들

노르웨이의 절대 대다수 근로인민들이 ‘지금 여기’의 체제를 긍정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으니, 그 중생들을 멸시하면 안돼요.

첫째 이유는, 1973년 이후로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이 사실상 제자리걸음해온 미국이나, 1997년 이후에 저임금 노동자의 실질 소득이 사실 계속 소폭으로 감소돼온, ’88만원 세대’의 대한민국과 달리, 노르웨이에서는 여태까지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감소된 해는 거의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저임금노동자까지도, 연대주의적 임단협 방식 (먼저 전국적으로 노총이 저임금 노동자를 특히 배려하는 임금인상 요구를 해마다 경총에다 하는 방식) 덕택에 소폭으로나마 그 구매력을 그래도 꾸준히 키워나갔습니다.

1950~60년대의 비교적으로 가난했던 – 그리고 부모의 아동에 대한 손찌검이라든가 존대말과 반말의 차이 등 언어적 차별주의라든가 야만 시대의 잔재들이 많이 남았던 – 노르웨이를 기억하는 노동계급의 윗세대는, 지금의 시대를 ‘성대'(盛代)로 안볼 수 없죠.

거기에다가 노동계급 사이에서의 체제에 대한 동의적 기반을 만드는 또 한 가지 요소는, 복지주의보다 더 나은 가시적, 현실적 이상형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980년대 한국 운동권으로서 그나마 무상 의료/교육이 있었던 소련/북한이 이상시될 수 있는 여지도 있었지만, 무상 의료/교육이 다 있는 데다가 민주주의까지도 있는 노르웨이 입장에서는 이미 1950년대에 소련은 아주 모자라는 사회이었죠.

모택동과 위수김동의 나라

뭐, 1970년대 초반에 일부의 아주 정신이 없는 사이비 ‘혁명가’들이 모택동과 문화혁명을 이상화시키는 쪽으로 갔습니다만, 그들에게마저도 ‘하방해서 인민공사에서 하루 12시간씩 밭갈이하라’고 누가 그랬다면 아마도 당장 모택동의 어록을 던져버리고 도망쳤을 것입니다.

문화혁명 와중의 중국에다가 온갖 야무진 ‘긍정적 오리엔탈리즘적’ 상상을 다 덮어씌울 수야 있었지만 아예 거기에서 남아 살 자신이 있는 사람, 즉 그걸 현실적 대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몇 명이나 있었나요?

뭐,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편집자)을 말로 찬양하면서도 위수김동이 세우신 현대판 동방예의지국에 이사갈 생각을 별로 안하는 이쪽의 한 유명한 부류와 다를 게 있어야죠.

그러면, 이 ‘동의적 기반’에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이들이 균열을 일으키자면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실효적일까요? 이 동의적 기반의 조직적 실체는, 85만 명의 노동대중들을 결집시키는 노르웨이의 노총입니다 (http://www.lo.no/language/English/?tabid=894). 사실, 이 나라의 영향력 제일의 조직이죠.

노총이야말로 노동계급의 경제적, 사회적 요구를 표명하여 그 요구의 관철을 위해 자산계급을 압박하는, 즉, 궁극적 차원에서 우리 요구의 조절과 평화적 실현을 통해 우리 계급과 자산 계급의 일시적인 ‘평화 공존’을 가능케 하는 복지주의의 ‘기둥’입니다.

노동과 자본의 일시적 ‘평화공존’

일선에서 이 과정을 담당하는 이들은 약 13만 명에 달하는 각급 노조의 간부들, 즉 단위 직장에서의 조합장들과 상위 조합의 지회장들, 지회 임원진, 그리고 노련들의 대표자 등등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우리 계급의 의향을 구체화시키고 정책화시키는 핵심적 계층이죠. 그러면 우리 계급이 급진화되자면, 계급 조직의 핵심인 그들부터 급진화돼야 할 것이죠.

만약 그들이 노총을 압박하여 시장 논리의 보다 급진적 지양을 지향하는 요구들 – 예컨대 은행 국유화 요구 등 – 을 내세우자면 이는 정국의 ‘좌향좌’를 가져다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노르웨이 같은 사회에서 급진적 분자, 혁명가가 할 일은 무엇보다 노동조합에서의 사업입니다. 조합으로 움직이는 나라는, 조합이 왼쪽으록 가면 역시 왼쪽으로 가게 돼 있죠.

노르웨이 경우에는 이는 틀림 없는 이야기지만, 노르웨이와 달리 ‘조합주의 국가’가 아닌 한국에서도 어느 정도 통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왜냐하면 대기업만큼은 한국에서도 노조가 60% 가까운 조직률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볼셰비키적인 길로 가자면 (볼셰비키들의 장단점을 따로 논할 수 있지만, 어쨌든 그들이 진정한 노동계급의 조직자요, 혁명가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특정 이념을 중심으로 해서 따로 ‘이념적 조직’을 만드는 것보다는 ‘노힘’처럼 조직화된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해서 급진화 사업을 전개하는 것이 더 논리적이지 않을까요?

혁명은 이념보다 힘

저는 조직 사업의 국외자인 만큼 뭐라고 충고할 입장이 안되지만, 적어도 여기 노르웨이에서 ‘노조는 힘’이라는 등식을 체험적으로 익혔습니다. 그리고 혁명이란 결국 ‘이념’이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 한 계급의 조직화된 ‘힘’의 표출이 아닌가요?

그건 그렇고 대한민국 등 준핵심부 관련 이야기를 제3회에다가 보다 자세히 적겠습니다. 이제 9시가 다 됐으니 자판기를 괴롭히는 일을 그만 파하고 집에 가서 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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