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혼합경제와 풀뿌리경제
    2008년 11월 13일 09:01 오전

Print Friendly

“우리들은 자본주의의 죽음의 침상 앞에 앉아 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 우리는, 병자를 치료하고자 하는 의사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죽음을 기다릴 수 없어 독을 주입, 죽음을 재촉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예정상속인으로서도 앉아 있다.

나는 생각한다. 우리들은 열심히 치료해야 할 의사의 운명을 부여받았지만, 그러나 자본주의 제도의 모든 유산을 내일이 아닌 바로 오늘 물려받고자 하는 상속인의 사명 또한 지고 있다고. 의사와 상속인, 이 이중의 역할을 동시에 행하는 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다.”

의사가 될 것인가, 상속인이 될 것인가

   
  ▲ 장석준 진보신당 서울 당원

대공황의 격랑 속에서 거리에는 실업자가 넘쳐나고 나치가 세를 불려가던 1931년, 독일 사회민주당 당대회에서 당 경제이론가인 F. 타르노프는 이렇게 고심을 토로했다. ‘의사가 될 것인가, 상속인이 될 것인가?’ 이 고민은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한데 찬찬히 들여다보면, 물음 자체에 함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저 환자가 현존 자본주의 경제가 맞다면, 우리가 상속받을 유산은 환자의 재산이나 뭐 그런 게 아니다. 사실은 병든 유기체 그 자체다.

그 유기체의 ‘죽음’은 자본주의 지배 체제만의 붕괴가 아니라 “서로 투쟁하던 두 계급의 공멸”(『공산당 선언』)이기 십상이다. 바이마르 공화국 식의 사회 붕괴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보다는 절망적 몸부림, 즉 파시즘에 더 이로운 토양이 된다. 이런 ‘돌연사’를 막는 것 역시 분명 진보 좌파의 과제다.

그래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상속자의 입장을 취해야 하되 환자를 죽게 내버려둘 수도 없다. 아니, 일단 살려놔야 한다. 그리고 그 체질을 바꿔야 한다.

살리면서 바꾸기?

세계사의 격랑 속에서 진보정당이 할 일은 한국 사회의 좌초를 막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방향으로 그 키를 돌리는 것이다. 한편으로 위기에 대한 한국 사회의 대응력을 높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다름 아닌 바로 그 대응 과정을 통해 한국 자본주의를 바꾸어야 한다. 서로 다른 두 과제를 하나의 실천 과정 안에 결합시켜야 한다.

어떤 이들은 그래서 진보 세력도 이제 성장 정책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니, 아예 ‘진보적 성장’을 약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진보 세력에게 또 다른 자승자박이 되고 말 것이다. 대중의 입말 속에서 ‘성장’은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냉정한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산업화 초기의 고성장에 대한 아련한 기대다.

이제는 아무도 이런 고성장을 약속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전 세계적인 침체 상황에서는 국내에서 아무리 생산성이 향상되더라도 이것이 곧바로 경제 실적 개선으로 이어지리라는 보장이 없다. 수출 경쟁이 더욱 가열될 것이고, 실물 경제와 괴리된 금융 부문의 롤러코스터 운동도 계속될 터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공공적인 산업 정책 따위는 이제 전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허나 이것은 고성장의 단 꿈에 대한 약속보다는 경제 활동의 교란을 막아보려는 안간힘 쪽에 더 가까울 것이다.

‘진보적 성장’론의 무모함

산업화 이후 지금까지 대중을 지배해온 한국 사회의 경제 이상은 ‘선진국 따라잡기’였다. 달리 말하면, ‘번영’. 이제 와서 진보 좌파가 이 흔들리는 이상을 떠받치겠다고 나서는 것은 어리석음을 논하기 이전에 너무 무모해 보인다.

박정희의 산업화, 김대중의 자유화 모두 저마다의 세계사적 배경 아래서 가능했음을 잊지 말자. 우리는 대혼돈의 시대라는 또 다른 시대 상황 앞에 서 있다. 어떤 진공 상태가 아니라 바로 이 난처한 무대 배경 위에서 한국 사회의 방향을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이제 우리의 경제 이상은 ‘소박하지만 보람 있고 안정된 삶’의 보장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부자가 되기는 이전보다 더 힘들지 모르지만, 적어도 소외되고 배제되는 일은 없는 경제 생활. 진보 좌파는 지금부터 이러한 이상을 확산시키고 그 지지 세력을 규합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경제 이상은 시장이 거의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현재의 한국 경제 체제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꿈일 뿐이다. 지금부터 새로운 요소들을 싹 틔우고 키우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이 새로운 요소들은 장기 위기 속에서 한국 사회의 대응력을 높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대위기 이후의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토대 역할을 할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혼합 경제를 건설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진보 좌파가 추진할 구조 개혁의 핵심 과제다.

혼합 경제의 한 축, ‘풀뿌리 경제’ 부문

과거 케인스주의 시기에 ‘혼합 경제’라고 하면 흔히 사적 시장과 공공 부문의 공존을 뜻했다. 지금도 스웨덴 사회민주당 강령을 보면, 그렇게 돼 있다. 물론 우리가 건설할 혼합 경제에서도 이들 부문은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한 축이 존재한다. 그것은 우석훈이 ‘제3부문’이라 표현하고(『괴물의 탄생』), 독일의 좌파 경제학자 엘마 알트파터가 ‘연대 경제’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자본주의의 종말』). 즉, 다양한 생산 및 소비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등 풀뿌리 결사체가 생산과 교환의 주역이 되는 영역이다.

필자는 이 영역을 ‘풀뿌리 경제’ 부문이라 부르고 싶다. 그리고 이 풀뿌리 부문을 건설하는 일이 지금부터 진보 세력의 주된 과제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이미 작년 민노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심상정 후보가 ‘세 박자 경제’라는 정책 패키지 중 일부로 제창한 바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다만 그 의미를 좀 더 강조하려는 것뿐이다.

좌파 정책의 새로운 실천 주체

필자가 보기에 풀뿌리 부문은 다음과 같은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다. 첫째, 대안 경제 정책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실천 주체 역할을 한다.

어떤 정책이든 정책 집행 수단이 없다면, 공문구에 불과하다. 집권을 준비하는 세력은 단지 정책을 준비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정책을 집행할 수단들을 미리 구비해나가야 한다.

케인스주의의 전통적인 정책 집행 수단은 국가기구였다. 하지만 기존 국가기구는 많은 한계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비록 진보 좌파가 집권하더라도 이러한 기존 국가기구 외에 또 다른 사회적 주체들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진보 세력은 국가기구의 한계를 넘어서 한 발자국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 ‘또 다른 사회적 주체들’의 유력한 후보 중 하나가 바로 풀뿌리 부문의 다양한 민중 결사체들이다(또 다른 후보로는 강력한 초기업단위 노동조합 등이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진보 세력이 앞장서서 풀뿌리 부문을 키워나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미 대공황 시기에도 미국의 사회주의자 업튼 싱클레어는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뉴딜형 재정 팽창 계획을 농업 협동조합 건설과 연결하는 EPIC(End Poverty in California) 프로그램을 제시한 바 있다. 최근에는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부가 핵심 경제 정책으로서, 협동조합 기업 설립을 지원하고 있다. 이게 베네수엘라의 특수한 사정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라 본다.

생태적 전환의 주된 통로

둘째, 풀뿌리 부문은 생태적 전환의 주된 통로 역할을 할 수 있다. 생태 전환의 핵심 내용 중 하나는 대자본과 국가 관료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지역 주민들의 소박하지만 안정된 삶을 보장할 지역 순환 경제의 구축이다. 그리고 그 가장 확실한 시작은 각 지역의 주민 생활에 깊이 뿌리박은 풀뿌리 부문을 육성하는 일이다.

생태 전환의 또 다른 중심 과제인 에너지 체제 전환과 농업 회생에서도 마찬가지다. 풀뿌리 부문은 다른 부문에 비해 분권형 에너지 생산-소비 체제의 출발점 역할을 하기 쉽다. 또한 도시와 인근 농촌 사이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농업을 새롭게 회생시킬 주역 역시 다른 누가 아닌 도시와 농촌 양쪽의 풀뿌리 부문이다.

셋째, 풀뿌리 부문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중요성을 지닌다. 그것은 사회성 자체의 재구성이다.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흔히 ‘사회주의’를 이야기하곤 하지만, ‘자본’ 대신 ‘사회’가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막상 그 ‘사회’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불분명한 데가 있다. 그것은 그렇게 당연하고 간단한 게 아니다. ‘사회’란 과연 무엇인가? 이것은 과연 우리 주위에 이미 존재하는가?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그 답은 부정적이지 않을까? 박경리의 소설 제목(『시장과 전장』)을 원용해 말한다면, 한국 사회는 전장(戰場)에서 곧바로, 모두 다 시장(市場)으로 넘어갔다고 하겠다. 다른 게 존재했다면, 오직 ‘가족’ 정도? 우리에게 ‘사회’란 오히려 아직 오지 않은 무엇에 가깝다.

우리는 생산-재생산 활동 내에서 ‘사회’의 경험과 의미 자체를 새로 구성해야 한다. 이윤 추구 행위와 관료 체계를 넘어선 협동과 연대의 행위 양식을 찾고 만들어내야 한다. 맑스 식으로 말하면 자유로운 사람들의 연합을 훈련해야 하며, 폴라니 식으로 말하면 시장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사회를 재건해야 한다.

풀뿌리 부문은 그 유일한 무대는 아니다. 하지만 분명 가장 좋은 출발점이다. 이 영역은 ‘자본’을 대체할 ‘사회’의 실체를 배양하고 육성할 묘목장이 될 것이다. (계속)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